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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132화 (132/132)

132.

“곧 오셔.”

에라블은 서둘러 패드를 정리하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데제도 느긋하게 일어나서 로브를 정리했다.

“아빠도 얼른 오세요.”

그가 아이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의외로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였다.

“잠깐 밖에서 기다릴래?”

“네.”

아이들도 아빠 말은 잘 들었다. 아빠가 무서워 엄마 말도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호가호위였다.

하여간 후다닥 움직이는 자신과는 달리 그는 느긋하게 움직이는데도, 결과적으로 그가 훨씬 더 빨리 준비가 끝났다. 팔다리 길이의 문제였다.

캠핑카 밖으로 나오니 햇빛이 정원수 잎사귀 사이로 반짝거렸다.

그들은 캠핑카를 백작가 저택 정원 한쪽에 주차해 두었다. 백작가의 정원사는 이들의 기행에 익숙해져 있었다.

잠시 나무 사이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데제가 햇볕을 가려주며 가볍게 입술을 눌러왔다.

부모에 애정행각에 익숙한 아이가 신경도 쓰지 않고 작은 손으로 그녀의 손만 잡아 끌어당겨 댔다.

“엄마 빨리.”

“…너 또 후작령 가려고 이러지.”

“아, 알면 빨리.”

이놈의 새끼는 대체 누굴 닮아서…. 하여간에 마음이 아주 급한 큰아이와 함께 정원을 질러 저택으로 올라가니, 마침 셔틀이 내려오고 있었다.

“오셨어요.”

데제가 먼저 여유롭게 부모님들을 맞이했다.

요새 백작과 부모님은 여행을 다니느라 아주 바빴다. 본격적인 후계 수업에 떠밀린 산체는 빼고, 여행 따윈 시간 낭비라고 여기며 질색하는 큰아이도 빼고,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작은 애만 끼고도는 여행이었다.

“아빠!”

데제는 자연스럽게 엄마에게서 둘째를 받아 안았다.

고등급인 첫째에 비해 시그눔 등급이 다소 떨어지는 둘째는 가족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도 둘째에겐 더 물렀다.

큰아이는 쟨 자존심도 없다고 제 동생 앞담을 깠지만, 해맑은 둘째는 간식이나 집어 먹으며 큰아이의 말을 씹었다.

자존심이 새로 나온 과자였으면 조금이나마 작은 애의 관심을 끌었을지도 모르겠다.

데제가 아이의 작은 등을 토닥이자 아이가 까르륵거리고 웃었다.

“넌 연태 자다 나왔니?”

손녀딸과 사위를 흐뭇하게 보던 엄마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곤 잔소리부터 했다.

“안 자다 나왔어.”

“엄마 게임 했어요.”

큰아이가 옆에서 바로 일러바쳤다.

“…….”

내 새끼지만 참…, 쥐어박고 싶을 때가 있다.

“으이구.”

엄마는 쯧쯧 혀를 차고선 손사래를 쳤다.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 저놈의 셔틀은 탈 때마다 멀미가 난다니까.”

멀미는 유전이었다.

어쨌든 엄마 아빠 입에서 저런 말 들을 때마다 기분 이상해졌다. 에라블은 달려가 엄마를 끌어안고 부비적거렸다. 엄마는 그가 둘째에게 하듯 등을 토닥여주었다.

“걷기 힘드니까 저리 가봐.”

잠깐이었다.

“…사랑이 식었네.”

에라블은 투덜대곤 데제에게 돌아가 작은 애의 통통한 뺨에 연신 입을 맞춰댔다.

“엄마 안 보고 싶었어?”

“보구 싶어쪄.”

“엄마두 우리 지숙이 보고 싶었쪄.”

속닥대는 소리에 엄마가 불평했다.

“넌 진짜 애 이름을 왜.”

“왜 지숙이 예쁘기만 하구만. 큰 지숙이 삐졌어?”

“…이눔 새끼.”

에라블은 등짝을 지키기 위해 뛰어다녔다.

“아 좀, 빨리! 나 빨리 밥 먹고 가야 한다니까?”

그거 좀 미적거렸다고 큰아이가 또 야단이었다.

후작령 가고 싶어서 아주 몸이 달았다. 어렸을 적 데제를 꼭 빼닮은 큰아이는 후작가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데제는 물론 그쪽은 바라보지 않았지만, 아이가 가는 것까지 막진 않았다.

큰아이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후작 부처의 모습은 안쓰럽기도 하고 좀 밉상이기도 하고 그랬다. 두 사람은 여전히 멀쩡히 살아있는 친아들은 만나기 꺼렸다.

“어휴.”

어쨌든 아이는 적극적으로 제후 부처의 사랑을 즐겼다.

차기 후작 자리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후작가에 관심 없는 아빠를 건너뛸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우진이 쟨 누굴 닮아서 저렇게 권력 지향적일까.”

“넌 진짜 왜 애 이름을.”

이번엔 아빠가 불평이었다.

“아 왜 자꾸 이름 가지고 난리야. 정 불만이면 지을 때 옆에 있지 그랬어.”

“…….”

에라블은 이번엔 아빠에게서 등짝을 지키기 위해 뛰어다녔다.

오랜만에 가족 모임이었다.

식사 자리는 화려하다기보단 단란했다. 에라블과 아직 이쪽에 적응 중인 두 소시민의 취향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이 자리를 못 견디게 지루해하는 건 권력 지향적인 큰아이뿐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식사를 쓸어 먹듯이 하고는 대기 중이던 개들과 함께 사라지는 큰아이를 보며 에라블은 진지하게 말했다.

“전 절대 아니고 데제를 닮았지 싶습니다.”

“자기야, 가주 자리를 연예인이라고 치면 우진인 자기 닮은 게 확실해요.”

“그걸 그렇게 치면 안 되지 싶습니다.”

“다를 게 뭐야?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게 아주 똑같은데.”

그 말에 부모님들이 냉큼 맞장구를 쳐댔다.

“쟤가 아주 어려서부터 연예인이면 정신을 못 차렸지.”

“여기서도 그랬지요.”

백작까지 한 패였다. 내 편은 아무도 없네. 에라블은 한숨을 내쉬며 데제가 썰어주는 고기를 집어 먹었다.

“네 남편 편히 식사 좀 하게 넌 좀 니가 알아서 먹어라.”

“와…, 이 여사 진짜 사랑 식었네.”

사실은 엄마가 말해주기 전까진 의식도 못 하고 있었다.

“전 괜찮습니다, 어머님.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어이구야, 세상에. 나도 서방 있네.”

에라블은 가만있다가 벼락 맞은 아빠들이 안쓰러웠다.

“엄마 그렇게 말하면 백작님이 뭐가 돼.”

“니가 제일 나빠, 이것아.”

“전 괜찮습니다.”

백작이 슬픈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내가 다 잘못했네.”

데제가 웃으면서 또 고기를 썰어주었다. 구박은 구박이고 먹이는 건 또 먹이는 것인가 보다.

“잘못? 뭔 잘못? 너 또 사고 쳤냐?”

그리고 하필 이 타이밍에 백작의 인수인계에 찌든 산체가 반쯤 썩은 얼굴로 대식당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에라블은 얼굴을 구겼다.

“안 쳤어, 멍청아.”

“삼촌!”

둘째가 산체한테 손을 뻗었다. 식구가 많고 애는 적어서 어려서부터 사랑받는 것에 시큰둥했던 큰 아이와 달리 작은 아이는 손을 엄청나게 탔다.

“뭐 먹고 있었어? 지숙이 이거 채소 다 남겼네?”

엄마의 표정도 다시 썩었다. 진짜 이름 잘 지었다니까. 에라블은 고소해하며 히죽거렸다.

“아버지, 저 진짜 일 좀 줄여 주….”

“소화도 시킬 겸 당구나 한 게임 할까요.”

백작은 산체를 먹 금하고 엄마와 같이 당구 친다고 가버렸다. 엄마가 가니 아빠도 졸졸 쫓아 사라졌다.

잘 지내니 좋긴 한데…, 이러다 셋이 담요 깔고 앉아 고스톱이라도 치는 거 아닌가 걱정된다.

“으어어….”

먹금 당한 산체가 기괴한 소릴 내며 축 늘어졌고, 힘없이 반쯤 벌어진 입속에 지숙이가 열심히 채소를 찍어 날랐다.

“우진이는?”

“갔지.”

“또?”

산체가 입에 든 채소를 우적거리며 키득거렸다.

“형, 이러다 진짜 우진이한테 자리 뺏기시는 거 아니에요?”

“더 좋은데. 한가하게 놀고먹고.”

“…….”

산체가 다시 우울해졌다. 그리고 작은 아이의 행태를 보다 못한 에라블은 잔소리를 해댔다.

“지숙이 삼촌 입에 채소 그만 넣어. 지숙이가 먹어.”

“녜.”

대답은 잘하지만 약간 시무룩해진 아이의 동그란 머리를 산체가 마구 흐트러트렸다.

“그래, 지숙아 삼촌은 고기가 더 좋아.”

“지숙이두 고기 더 좋아….”

서로 맞장구치는 모습을 보며 데제가 웃고는 말했다.

“자기도 접시에 있는 그 채소 다 먹어요.”

에라블 빤히 접시 위의 채소를 보다가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도 채소보단 고기가 더.”

“응, 얼른 먹어요.”

“녜….”

둘째를 따라 하는 말투에 산체가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곧 데제의 표정이 부드러워진 것을 보고 움찔거렸다. 산체는 냉큼 지숙이 눈을 가렸다.

“와….”

그가 여러 번 입술을 눌러대는 광경에 이젠 질색을 넘어선 산체가 감탄했다.

“형은 진짜 저게.”

“난 귀엽다니까.”

“예에….”

소름 끼친다는 듯 바르르 몸을 떤 산체가 밀린 식사에 돌입했다. 진짜 몇 끼 굶었는지 정신없이 먹어대서 에라블은 저렇게는 살지 말자고 다짐했다.

일은 적당히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해고된 상태였다. 그러니까 여전히 해고된 상태다. 호시탐탐 재취업을 노리곤 있었지만, 길어지는 육아 기간에 자꾸 후순위로 밀리고 있었다.

에라블은 식당과 연결된 보조 룸에서 게임을 하는 부모님들과 식사 중인 산체와 어린 딸, 그리고 어린 딸에게 음식을 덜어주고 있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데제의 미니어처 같은 큰아이까지 떠오르니…, 걘 진짜 어린 게 벌써 권력에 눈이 멀어서 걱정이다.

“데제, 만약에 우리 우진이가 권력 투쟁 같은 거에 휘말리면….”

“자기야. 드라마를 그만 끊는 게 좋지 않을까?”

“노, 노력해 보겠습니다.”

“말 더듬네. 우진이는 자기 닮은 게 확실해요.”

그들은 그렇게 밤이 늦도록 느긋하게 식사하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뒤, 반쯤 잠이 든 딸아이를 안고 다시 캠핑카로 향했다.

좁고 낡은 캠핑카를 질색하는 큰아이와는 달리 작은 아이는 그 작은 공간을 아주 좋아했다. 작은 아이야말로 날 닮은 게 확실했다.

“…….”

본관을 나오니 밤하늘에 별이 쏟아질 것처럼 많았다.

저마다 행성신과 지성체의 콜로니가 있는 유인 행성들일 것이다. 이젠 퍽 익숙해져 버린 이계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참 묘한 감상에 젖어있던 에라블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얼른 와요.”

데제가 잠든 딸아이를 안고 돌아보며 웃고 있었다. 에라블은 걸음을 빨리해 그의 곁으로 갔다.

“손도 잡아줘요.”

“네.”

에라블도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느긋하게 어둑하지만, 별빛이 쏟아지는 밤길을 함께 걸었다.

어둠이 깊어 별은 더욱 아름다웠다. 그런 밤이었다.

개는 주인이 필요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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