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에라블은 여전히 자신을 무서워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아무리 잘해 주고 다정하게 대해줘도, 설령 그처럼 기억이 없어진다고 해도 마찬가지겠지.
눈치 빠른 에라블이 그의 얄팍한 가면에 속을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건드리지도 못할 정도로 소중해져서, 에라블은 앞으로도 그를 맨정신으로 버텨내야 했다.
그러니 그가 안심할 날도 영원히 오지 않을 터였다.
“자기가 XXX XX 차고 XX해주면 믿을게요.”
“…예?”
그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런 엄청난 소릴 귓가에 속닥거리며 그는 웃고 있었다. 에라블이 바들바들 떨며 우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응?”
“그렇다면 다음 기회에….”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데제는 다시 에라블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파들파들 떨었다. 그러다 다시 불쑥 들고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선물이 있어요.”
* * *
데제의 선물은 에라블이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에라블은 처음엔 당황했고, 다음엔 갈피를 잡지 못했고, 그다음에 조금 멍하니 앉아 있었다.
“…….”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고민했다. 벌써 몇 시간째였다. 끙끙거리다가 몇 줄 적고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 하굣길이었다.
하굣길이었지.
- 내가 다니던 중학교 옆엔 작은 가게들이 있었다. 꽤 오랫동안 바뀌지 않고 유지됐던 것으로 보아 역시 학교 옆이라 수익성이….
에라블은 이제 때가 묻은 어른이었다.
가게를 보면 이제 한 달에 월세는 얼마인지, 부대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순수입은 어떤지 뭐 그런 생각이 자연히 드는 것이다.
그녀는 제게 존재했던 그 자체가 아득하고 신비로운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 보려 애썼다. 너무 돌아가 징얼대면 안 되기 때문에 더 조심스러웠다.
수익성 따윈 지우고 다시 썼다.
- 굉장히 맛있는 꽈배기 집도 하나 있었는데, 난 그 앞에서 실종됐다.
‘튀김 냄새가 아주 달달한 실종이었….’
아, 이것도 좀 아닌가. 너무 개그로 빠지면 곤란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적절한 지점을 찾아야 했다. 뭐, 다 사실이긴 했지만….
에라블은 아직도 그 냄새를 선명히 기억했다.
초여름의 풀냄새, 후덥지근한 기름과 뒤엉긴 그 끈적한 설탕 냄새, 그리고 곧 싸늘하게 몸을 식히던 낯선 항구 도시의 냄새도….
작게 심호흡을 한 뒤 몇 줄을 또 지웠다.
‘…….’
코가 지끈하고 눈앞이 아른아른했다. 욱신대는 코를 움켜쥐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눈물이 툭툭 떨어진다.
정신 좀-, 그녀는 대충 눈물을 닦아내며 자신을 나무랐다. 정신 좀 차리자.
꽈배기부터 벌써 이럼 곤란하다.
물론 그 부분이 제일 어려운 부분이긴 했다. 내 인생이 망한 최초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아주 미화를 해야 하니까. 특히 데제 얘기를….
그를 생각하자 바로 정신이 차려졌다.
그의 동공을 타고 빙글빙글 도는 지네 뱀처럼 어지럽던 머리가 찬물을 얻어맞은 듯 바로 차분해진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특히 데제에 관해선 아주…, 아주 미화를 해야만 했다. 대충 썼다가 걸리면 어떻게 하면 될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편하게 써요.”
데제의 말은 늘 그렇듯 살살 꼬여내는 듯한 구석이 있었지만, 에라블은 별로 속지 않았다. 그녀의 인생에서 사탕발림에 넘어갈 정도로 순진했던 시절은 끈적했던 설탕 냄새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너무 고민하진 말고. 그러면 선물이 아니잖아.”
하지만 그가 다정한 건 사실이었다. 그는 아주 녹은 설탕만큼이나 달게 대했다. 그녀가 데제의 선함을 믿지 않는 것만큼 여전히 그 역시 그녀의 고백을 믿어주진 않았지만.
데제는 혼자 쓸 시간이 필요할 거라며 자리도 피해주었다.
“…….”
이건 이렇게 멍하게 흘려보내기엔 너무 소중한 선물이다.
에라블은 느슨해진 머리를 다시 꽉 묶고 제게 일어났던 일들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
초여름의 하굣길, 그 전부터 있었던 몇 가지 조짐과 커뮤에 올라와 있던 조회 수 0의 게시물, 그 게시물.
그리고 이쪽 세계에 빠져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천천히 써 내려갔다.
조금은 미화하고 조금은 덜어내고 조금은 순화하면서, 하지만 사실만을 썼다.
그래야 저쪽으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았던 그 이야기처럼.
그러니 사실이라는 게 꼭 실체를 알게 하는 건 아니다. 패러다임은 선입견으로 작용하며 섣부른 판단을 의심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딱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었다.
‘데제는, 음, 전도유망하고 사람 좋은 차기 후작 정도로….’
왠지 그의 대외 이미지와 같아졌지만.
너무 많은 것을 알아 좋은 것이 없었다. 다 큰 딸의 사생활을 알아봐야 서로 상처뿐이지.
취사선택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좋은 것만, 되도록 몹시 나쁘지 않은 것만 전해줘야지.
비록 만날 순 없겠지만, 나는 이렇게 돌아서고 말았지만….
원래 자식새끼 키워봤자 다 소용없는 거다. 자기 짝 만나면 원래 다 그런 거지.
그러니까 잘살고 있다는 것만, 그것만이라도 잘 전하고 싶었다. 그래, 그러니까 잘하자.
에라블은 타닥타닥, 엄마와 아빠가 보게 될 글자들을 타이핑해 내려갔다.
* * *
“…1.”
중년의 여자는 부스스하게 죽은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달칵달칵, 마우스를 움직여 이미 몇 번이나 읽은 게시물을 다시 읽어내렸다.
“1….”
조회 수는 1, 몇 번을 다시 읽어도 1이다.
여자는 이미 익숙해져 버린 숫자에 신경을 쓰지 않고, 여러 번 읽어 이제 다 외워버린 텍스트를 다시 한 자 한 자 읽어내렸다.
“…….”
남편과 함께 게시물 올린 사람을 찾기 위해 사방팔방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사이트 관리자를 직접 찾아가기까지 했지만…, 그들은 이 게시물이 다른 사람들 눈엔 다 깨져 보인단 귀신에 씐 것 같은 사실만 알게 되었을 뿐이다.
남편과 그녀는 자신들이 미친 게 아닐까 의심했다. 두 번째 게시물이 올라온 건 그즈음이었다.
열다섯 살, 초여름, 그 끔찍한 초여름….
사라진 아이는 어른이 되었고, 배우자를 만나 아이를 낳았다. 우진, 민우진. 아이는 제 아이에게 아빠의 이름을 붙였다.
우연인가.
민지우가 자라 제가 낳은 아이에게 우진이란 이름을 붙인 게.
“우연이겠지….”
이것 역시 이미 여러 번 했던 생각이었지만, 여자는 애써 되풀이했다. 아무래도 믿기 힘든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차라리 그들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질 나쁜 장난을 하고 있다는 쪽이 더 믿기 쉽다.
몇 번을 눌러도 바뀌지 않는 조회 수, 깨진 텍스트, 관리자도 지우지 못하는 오류에 그런데도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까지….
겹쳐진 일련의 이상한 일들만 아니었다면.
이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퉁치기도 꺼림칙한 잡탕 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읽고 있진 않았을 것이었다. 공상 어스름에 안착해 있는 이 이야기에서 대체 뭘 바라는 것인지.
지친 얼굴로 텍스트를 읽어내리던 여자는 흠칫 굳었다.
세 번째 게시물이 올라와 있었다.
조회 수 0.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달칵, 누르니 숫자가 1로 바뀌었다. 몇 번을 눌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곧 둘째가 태어난다.
‘둘째….’
- 둘째는 딸이다. 아직 배양기에 있는 아이는 벌써 나와 많이 닮았다.
‘또 배양기네.’
우주가 배경이라 그런가, 아이를 수조에서 기르고 있었다. 좋지. 힘도 들이지 않고. 엄마도 없이 혼자서 몸조리도 못 할 텐데…, 여자는 문득 든 생각에 실소했다.
‘내가 또, 진짜….’
사람 생각하듯이 이러고 있다.
하지만 게시물이 그녀를 살리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 남편은 아빠만 닮은 첫째보다 둘째를 더 좋아했다. 물론 친가에선 첫째를 더 좋아한다. 너무 좋아해서 탈이다. 마음대로 이름 지은 것에 여전히 서운해하는 눈치였지만, 둘째도 마음대로 지을 계획이다.
‘어이구….’
여자는 글들을 읽어내리며 작게 실소하다가, 투둑, 툭, 눈물을 떨어트렸다.
- 둘째 이름은 지숙이다.
“…그 이름은, 너무 촌스럽잖아.”
지숙.
여자는 텍스트로 박힌 제 이름을 더듬으며 불이 들어온 전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안쪽에서 전화를 건 남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여, 여보, 지숙아. 지금….]
“나도 읽었어.”
이상하지, 이건 정말 이상한데.
두서없는 말을 나누던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게시글 위로 팝업창이 떠올라 있었다. 지숙은 남편도 똑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쪽으로 넘어오시겠습니까?]
[Y/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