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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126화 (126/132)

126.

“내일 금요일인 건 알죠? 휴가 냈으니까 주말 붙어서 3박 4일이야.”

엎드린 목덜미를 길게 핥으며 그가 이죽거렸다.

“침대에서 아주 못 나갈 줄 알아.”

“사, 사람 살려….”

“진짜 웃기고 있네.”

그는 핥던 목덜미를 이로 꽉 물어버렸다. 에라블은 구급차를 불렀고 간신히 그를 진짜 웃기는 데 성공했다. 침대에서 빠져나가는 데 성공하진 못했다.

* * *

“이번 회차도 끝이네.”

데제브 아브가니스는 낮게 웃으며 끝나가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살점이 타들어 간 냄새, 혈액과 내장의 비린내, 그 속에 메케하게 뒤섞이는 무너진 문명의 유독한 잔해들….

“…….”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웃으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이제 폐허가 된 일월 궁 복도를 천천히, 천천히.

세계는 저물고 있었다. 다시, 또다시….

자기가 만들어 놓은 괴물에 발정하던 황자의 머리채를 손아귀에 쥐고, 그는 제단으로 향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황자는 항상 그를 즐겁게 했다.

실체를 보여주면 똥오줌을 질질거리면서, 얄팍한 껍데기만 씌워놓으면 발정하고 야단인 게. 헐떡대며 저를 흥분시키려는 것도 언제나 즐거웠다.

다정히 안아주다가, 저를 향한 감정이 잘 여물었을 즘엔 늘 그랬듯 개들에게 던져 주었다.

개들은 지긋지긋하게 되풀이되는 울분을 감히 신성을 달랑달랑 귀에 매단 황자의 몸뚱이를 찢으며 풀어댔다.

찢고 회복시키고 또 회복시키고.

그랬는데도 황자는 그에게만 매달렸다.

마치 그가 제 삶의 구원자가 되어주리라 기대하는 것처럼.

그는 머리채를 질질 잡아끌고 온 황자를 제단 터 맨 아래에 던져두었다.

인간의 몸으로 뒤엉킨 제단 위로 개들이 기어 다닌다. 세계의 끝에서 형체를 잃은 제 수족들을 빤히 보던 그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

자신을 보고 있는 다갈색 머리칼의 눈이 동그란 소녀를. 뚝뚝 구더기가 떨어지는 눈으로 그는 빤히 계집아이를 쳐다봤다.

아이는 눈만 껌벅거렸다.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는 대신에.

‘눈치가 빠르네.’

데제는 닫히는 문을 보며 웃었다.

짧은 만남이었다.

에라블이 어떤 이야기를 읽게 된 바로 그날이었다.

「헬 하운드.」

그건 개들과 개들의 주인인 어떤 한 남자가 거대한 제국을 온통 폐허로 만드는 이야기였다.

* * *

생각해 보면 왜 개지? 뱀에 더 가깝지 않나. 그것도 전부 설명할 순 없지만.

구더기, 지네, 뱀, 어쨌든 땅을 기는 것의 총체.

“내면을 봐야지.”

그건 더 문제다…, 에라블은 흔들리며 생각했다.

“충직하잖아요. 주인만 보면 꼬리를 흔드는 것도 그렇고.”

흔들리는 건 나였다. 영 설득되질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약간은 더 신빙성 있는 얘길 꺼냈다.

“가장 인간 친화적인 동물이니까.”

인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인간이 아닌 것.

“친근하게 다가가자는 거죠.”

다소 뻔뻔한 대답에 에라블은 울음을 삼켰다.

‘개는 무슨 죄….’

약간 사채업자와 비슷한 전략인 모양이었다. 귀여운 이미지로 경계심을 누그러트리는 것이다.

역시 이유 없이 친절한 건 사기꾼뿐이다.

냉혹한 현실에 파르르 떤 에라블은 앞으로 조금 기었다.

“읏…!”

소용은 없었다.

“후-”

그가 일부러 신음을 흘렸다. 앓고 싶은 건 난데 왜 자기가…, 에라블은 억울했다.

재차 파닥거리며 조금만, 아주 조금만 벗어나 보려고 다시 시도했다. 그러자 바로 누르는 데제의 손등에 힘줄이 선다.

“자기야, 도망치면 온종일 침대에 있겠다고 나하고 약속했잖아.”

그런 약속 한 적 없다, 이 사기꾼…. 에라블은 억울해서 또 눈물이 핑 돌았다.

“오, 오느을….”

약속은 진짜 오늘 다른 약속을 하지 않았느냐고 에라블은 말했다. 발음에 약간 문제가 있었지만 의사소통엔 큰 문제가 없었다.

“응, 갈 거야.”

하지만 여전히 한쪽 팔로 어깨 위를 짚어 진로를 차단한 채였다.

에라블은 그의 손목을 붙든 채 그를 받아내며 버텨야 했다.

애써 초점을 맞추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흐릿한 시야에도 그의 눈이 살짝 돌아간 게 보였다.

안될 모양이었다…. 기어이 오늘이 내 최후의 날인 거지.

에라블은 시트에 다시 얼굴을 처박고 바들바들 떨었다. 의식 소실이 가까워질 즘 몸이 바로 돌려졌다. 아니, 잠깐 의식이 끊겼다 돌아온 것 같다.

“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그가 다시 낮게 신음했다.

그렇게 한참을 시달리다가 마침내 조금이나마 그의 품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며 침대 밖을 향해 기었다.

심장이 쿵쿵거렸지만, 괜찮다. 왜냐하면 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간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없진 않았다. 그래도 에라블은 커플링을 사수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그 망할 반지를 방어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쿵쿵 뛰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척 할 수 있었다. 인간의 심장은 원래 쿵쿵 뛴다!

에라블은 어떻게든 앞으로 기었다.

“…….”

그는 입에 담배를 물며 팔다리가 퇴화 중인 도마뱀처럼 기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가볍게 일어나 이번엔 곱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진짜 나가고 싶어?”

“야, 약속….”

약간 단말마처럼 말하고 에라블은 그의 어깨에 기대 축 늘어졌다. 그가 어깨에 쪽쪽 입을 맞추다가 슬쩍슬쩍 깨물어댔다. 내구성이 형편없는 어깨가 좀 걱정됐다. 다치면 데미지를 그가 입기 때문이다.

에라블은 이제 거기까지 알아채고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자신이 다치면 그가 충격을 받는다. A급 센터 수료증을 따게 해준 건 초능력 따위가 아니었다.

다 때늦은 걱정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데미지는 전이되지 않는다. 고통도 삶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인 듯싶었다.

아무런 고통도 없다면 그 역시 살아있는 것 같진 않을 테니까…. 그녀가 삶을 느끼게 하는 방식은 아주 섬세했다.

알지만, 아깐 정신이 없었고 지금은 있었다. 정신이 드니 걱정도 같이 드는 것이다.

역시 어떻게든 수를 내야….

“자기야.”

위험에 머리만 숨기는 타조처럼 에라블은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데제가 어쩐지 목을 긁는 소릴 냈고, 섬뜩함에 굳은 등허리를 그가 살살 쓰다듬는다.

다행히 눈치 빠른 그는 딴소릴 했다.

“그 꿈도 다 실제의 파편이야. 우리가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는 뜻이지. 내가 망친 세상을 자기가 본 적이 있단 뜻이고. 이 와중에 그깟 시사회가 중요해?”

당연히 중요하다.

이 세계가 멸망을 되풀이했단 끔찍한 사실보단 당첨된 시사회 티켓이 당연히 더 중요했다. 정신 건강에도 훨씬 더 좋았다.

“약속….”

그래서 발성에 좀 더 신경을 써보았다.

“알았다고.”

데제는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욕실로 그녀를 옮겨주었다. 잠시 위험한 순간이 있었지만, 빈 뱃속이 꼬르륵대는 소리에 그는 연달아 담배를 물며 충동을 참아주었다.

아니, 참아주다니? 사람이 진짜 양심이 있으면…, 아 참, 그는 사람도 아니고 양심도 없지.

에라블은 그의 신체 일부를 애써 못 본 체했다.

그냥 모른 체하는 얄팍한 모습에 데제가 코웃음을 쳤지만, 어쨌거나 에라블은 기어이 시간에 맞춰 신역을 빠져나가 극장으로 향했다.

한 손엔 먹을 것을 들고, 다른 한 손은 그에게 붙잡힌 채였다.

“이건 대체 언제까지 나오는 거야?”

데제는 껄렁한 자세로 앉아 지긋지긋하게 나오는 후속편에 대해 불평했다.

로맨틱 12.

제작사가 어딘지 알아봐야겠다는 불길한 말도 에라블은 애써 못 들은 체했다.

바빠서 다행이었다. 한 손으로 팝콘과 음료를 상대로 싸우느라 너무 바빠서 에라블은 그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하는 데 성공했다.

어쩌면 이건 다 음모일 수도 있다. 최대한 덜 먹게 하고 이따가 밥을 먹이려는 것이지.

에라블은 자신이 죽었다 살아난 가레드 하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건강한 식생활에 집착했다.

인식은 사회적 통념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며, 그는 에라블이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어본 날 심하게 구토를 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더는 묻지 않기로 결심했다.

지금 중요한 건 내가 극장 안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진짜 다행이다. 당첨된 시사회 티켓을 가지고도 못 왔다면 꿈에 나왔을 것이다. 그럼 그가 더 열 받아 했겠지.

“67번! 67번 나오세요!”

하지만 이쯤 되니 에라블은 차라리 꿈에서나 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어졌다. 그럼 그냥 적당히 열 받아 하셨을 텐데….

“67번!”

에라블은 진심으로 최애의 실물을 육안으로 영접하고 내적 비명을 지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포옹 이벤트에 당첨되는 것까진 정말 바라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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