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는 주인이 필요하다-125화 (125/132)

125.

벌써 한두 잔 걸친 듯한 백작은 드물게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너 이제 마음 잡았다고 아버지 입이 귀에 걸리셨어. 속 좀 그만 썩여.”

자신 때문에 백작이 속 끓인 건 사실이어서, 에라블은 이 또한 할 말이 없었다.

“이제 진짜 마음 잡은 거지?”

에라블은 아닌 척하지만 긴장해 힘이 들어가는 데제의 곧은 등허리를 힐긋 보며 조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놀릴 거리에 과하게 텐션이 올라간 산체만 제외하면 연회는 원만했다. 계속 그러다 산체가 백작에게 혼난 뒤론 더욱 원만해졌다.

“누나가, 생각보다 마음이 여려요.”

에라블이 잠깐 백작에게 가 술을 뺏어 먹는 동안, 산체르타는 아브가니스 가의 차기 후작에게 조심스럽게 그런 말을 꺼냈다.

그는 호텔 로비에서 처음 봤을 때처럼 여전히 너무 드물게 아름다웠고, 두 손에 권력까지 쥐고 있는 이 아름다운 남자가 산체르타 버밀리언은 가족의 상대로 아주 안심이 되진 않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보단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 더 약하고요.”

“그건 다행이네.”

“…….”

무슨 뜻으로 하는 얘긴진 모르겠지만, 그는 어쨌든 진심으로 보였다.

“누나 좀, 잘 부탁드릴게요.”

조심스러운 말에 데제브 아브가니스는 눈을 곱게 흐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렇게 부탁하는 것 외엔 그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산체는 더욱 조심스러웠다.

“저, 그리고 별 건 아니지만 누나의 상속 권리 다시 회복시켰습니다. 원로원 인가도 다 받았고요.”

“음, 그래요.”

그는 정말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듣고 넘겼다.

“제 재산 중에 일부를 누나 지참금으로 돌려놓으려는데….”

“음.”

그리고 그 말엔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내가 동생이 챙겨줘야 할 정도는 아닌데.”

“…예?”

“누나 이제 부자야. 내가 많이 줬거든. 버밀리언 일족이 대대로 업혀 살아도 될 정도로 줬어.”

“…그걸 누나가 순순히 받았어요?”

액수가 얼마가 됐든 산체는 왠지 울컥했다. 우리는 선물이라도 좀 괜찮은 거 주려고 해도 별 난리를 다 겪어야 했는데.

“안 받으면 내가 운다고 해서.”

“…….”

산체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는 그 표정이 누나하고 똑같다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걸 본 산체는 더는 이 부부 일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 * *

반년 뒤, 신역 내부.

짙푸른 바다 수평선 위로 훌쩍 떠 오른 아침 해를 보며, 에라블은 타박타박 포탈이 고정된 오벨리스크를 향해 걷고 있었다.

느리게 흐르고 있는 새하얀 뭉게구름, 반짝이는 물비늘, 그 하늘과 바다 사이를 유영하는 거대한 고래 떼….

신역의 풍경은 익숙해지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그게 꼭 지구인 출신이라서는 아닐 것이다. 바다 위로 크게 떠 올랐다가 포말을 일으키며 다시 푹 가라앉는 고래 떼를 보며 에라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대정령들은 이 상황을 두려워했지만, 곧 거짓말처럼 개들이 제공해주는 편의에 물들어 버렸다.

뭐, 아름다운 곳이긴 했다.

검은 금속 재질의 신전이 약간은 불길해 보이기도 했지만. 이 불협화음이 왠지 또 미묘하게 평화롭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신전은 건축물인 동시에 여러 행성계와 위계를 잇고 있는 거미줄이기도 했다. 상위계 물질이라 컬러 변경이 어렵다.

그래서 데제는 목가적이고 따뜻한 나무 재질로 증축을 계획하고 있었다. 거대한 규모와 더불어 컬러 역시 에라블을 좀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고한 신전 위에 자행될 만행에 간부 몇몇이 앓아누웠다.

제 개들에 별 관심 없는 그는 여러 개의 카탈로그를 보여줬고, 에라블은 그중 개들이 가장 싫어할 만한 것을 고르느라 고민하고 있었고, 당장은 신전 일부를 떼어내 바다 위에 그냥 올려놓고 생활하고 있었다.

물론 결혼식 다음 날…, 정확하게 말하자면 열흘 뒤 눈을 떴던 최상층 역시 함께 사용 중이긴 했다.

‘8시 4분.’

에라블은 시계를 확인하며 재게 발을 움직였다.

두 달 전, 그녀는 간신히 재취업에 성공했다.

눈물과 역경의 길이었다. 스트레스 지수가 크게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데제는 그냥 계속 여행이나 다니며 살고 싶어 했다.

그렇다고 그가 벌려 놓은 사업체를 정리한 건 아니었다. 몇 가지 부분에서 업종 변경을 한 모양이었지만, 대체로 유지하거나 혹은 확장 시켰다.

그는 여전히 차기 후작이면서 41사단의 사단장이고 거대 그룹의 실소유주였다.

하지만 그는 여행 중에도 그 모든 일을 손쉽게 처리했다. 어쨌든 주신 격의 존재이다.

본인 일은 그렇게 다 하시면서 불쌍한 취준생에겐 맹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나 책임지기로 했잖아.”

“이제 와 마음이 변했어?”

“일할 기운 있으면 침대에서나….”

여린 취준생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긴 백수 생활은 스트레스를 유발했고, 스트레스는 주술 체계에 치명적이었다.

다행이었다.

에라블은 포탈이 열리길 기다리며 밝은 태양 빛에 제 팔을 비춰 봤다.

검붉은 혈관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흠.”

팔은 그냥 평범한 팔이었다. 이리저리 돌려보던 그녀는 작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역시 잘 샀어.”

손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가 햇빛에 번쩍거린다.

재취업 후 첫 월급 받자마자 그녀는 커플링을 샀다. 월급만 가지곤 당연히 턱도 없었지만.

주당 100만 cp나 되는 그의 돈을 처리하면서 남은 차액과 중대장에게서 다달이 들어오는 수익이 있어 괜찮은 것을 살 수 있었다.

중대장은 내깃돈을 할부로 갚고 있었다. 이 속도면 공룡이 닭으로 진화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어쩌려는 건지 모르겠다. 다 갚을 때까지 내가 살아있기나 하겠냐고.

뭐, 어쨌든 중요한 건 반지가 100% 그녀의 수고가 들어간 수입으로 산 물건이란 사실이었다. 데제는 그 사실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여 주었다.

그리고 에라블은 마침내 ‘그 반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를 볼 때마다 시커메지던 성욕 표시기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은 것이다.

지잉-.

작은 소음을 내며 포탈이 검게 입을 벌렸다.

에라블은 들여다보던 손을 주머니에 꽂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적응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지만, 사는 건 그냥 사는 거였다. 사실 그녀는 썩 잘 지내는 중이었다.

재취업에도 성공했고, 받은 월급으론 슬쩍슬쩍 취미생활도 하면서.

포탈을 넘은 에라블은 부 함선 통제 구역의 승강기를 타고 사무실로 이동했다.

41사단의 부 함선 중 하나인 사사는 현재 수도 행성의 중력장 안에서 공전하고 있었다.

근무지가 수도라는 뜻이었다.

별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사무실이 외진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건 아주 좋았다. 할 일이 별로 없다는 것도.

“안녕하십니까.”

사무실로 들어간 그녀는 빈둥대고 있는 소대원들에게 인사를 하곤 곧장 빈둥거림에 합류했다.

“근데 진짜 우리 이렇게 살아도 될까요?”

“저도 그게 좀 의문입니다.”

모두가 직장생활에 몇 가지 큰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없었다.

현재 수도 내 보급은 지원 1팀이 맡고 있었고, 현재 지원 2팀은 보조라는 명목하에 거의 하는 일 없이 놀고 있었다.

처음엔 불안에 안절부절못하던 소대원들도 한두 주 지나자 살찐 곰처럼 빈둥거리는 데 적응했다. 이제 와 양심을 찾아 분연히 일어났다간 같은 소대원한테 뒤통수가 터질 판이었다.

그래도 흔적 기관처럼 남은 양심에 일하는 척은 하며 에라블은 오늘도 열심히 팬 포럼을 뒤졌다.

‘내 새끼-, 오늘도 귀엽구나…!’

얘는 대체 왜 이렇게 귀여운 걸까. 왜, 왜냐하면 귀엽게 태어났기 때문이지.

“소, 소위님….”

케이크 오물거리는 것 좀 봐, 세상에 애기다, 애기.

“소위님…!”

에라블은 포럼에 올라온 최근 새롭게 입덕한 최애의 간식 먹는 짤을 보며 주접을 떠느라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얜 또 누구야.”

“…….”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는 척 진지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누나 죽어, 우주 뿌셔 등의 댓글을 달고 있던 에라블은 흠칫 굳었다.

“또 새로운 얼굴이네?”

“그, 그….”

“내가 자기 때문에 알게 된 연예인이 몇 명인데, 뉴페이스가 계속 나와. 제국 엔터 사업이 이렇게 활기찼어?”

에라블은 슬그머니 포럼을 닫으려다가 저지당했다. 데제는 에라블의 댓글 모음을 읽으며 코웃음을 쳤다.

“일찍 퇴근하죠?”

“저 아직 시간이….”

“왜, 설마 일하느라 바빠요?”

그가 눈을 가늘게 떴고, 에라블은 어색하게 웃는 얼굴을 했다.

“아, 안 바쁩니다….”

“그래요.”

그나마도 곧 침울하게 가라앉고 말았다. 그가 속닥거린 소리 때문이었다.

“내일 휴가 내요.”

“하,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되고.”

시야가 어둑해지며 곧바로 침실로 끌려들어 가는 감각에 에라블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항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니까.

“웃기고 있네.”

울며 고개를 끄덕이는 에라블을 보며 그는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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