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제발 인간답게 좀 살자. 형은 무슨 죄냐? 진짜 무슨 짐승도 아니고. 거기서 형 단추는 왜 풀러? 정말 미친 거야?]
결국 또 툭 전화를 끊어 버리고 머리를 감싸 쥐고 웅크렸다.
기억에 없는 걸 보면 진짜 그를 덮쳤었던 때와 똑같은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물론 실제로 하고 기억에 없는 걸 수도 있지만…. 생각해 보니 제단을 오르는 내내 그의 셔츠는 멀쩡했었다.
“제가… 왜, 왜 그랬을까요?”
“글쎄요?”
습기 찬 눈으로 그를 보자, 그는 또 시침을 뗐다.
“홀로그램 송출 문제였나 보네요. 근데 그게 문제가 돼요? 응?”
그가 삐딱하게 기대앉아 되물었다.
“다 이해해 주기로 했잖아.”
에라블은 식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 이해의 범위가… 정말 광범위했다.
“문제가 되냐니까?”
“아, 안 됩니다.”
“그렇죠?”
그가 생긋 웃었다.
“서운할 뻔했네. 연결식까지 다 한 마당에 자기가 먼저 손 좀 댔다고 머리 쥐어뜯는 줄 알고. 내가 오해한 거 맞죠?”
“예, 그렇습니다. 저 머리 안 뜯었습니다.”
그가 코웃음을 치곤, 손에 끼고 있던 담배를 잇새로 옮겨 물고 에라블을 일으켰다.
“그럼 일어나요. 백작님 기다리신다는데 가 봐야죠.”
에라블은 파들대는 몸을 돌덩이 같은 그의 몸에 기댔다.
“저…, 그런데 진짜 식이 다 끝난 게….”
“맞아요.”
“그, 그럼 제가 진짜 사단장님의 페어가 된 게….”
또 사단장님이네, 중얼거린 그가 되물었다.
“해고당했으면서 언제까지 사단장이야?”
그런 슬픈 얘긴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다.
“하여간 맞아, 왜? 무르고 싶어요?”
에라블은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무거운 머리가 그의 어깨에 얹혀 있는 상태라 왠지 아양 떠는 꼴이 되었지만.
그에게서 슬금슬금 흐르던 섬뜩한 느낌이 사라져 서른에 가까운 나이에 이게 무슨 짓이냐는 수치심보단 안도감이 더 크게 들었다.
‘페어….’
그에게 들려 옮겨지며, 에라블은 그의 품에 푹 몸을 맡긴 채… 자의라기보단 몸에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쨌든 그 단어에 대해 생각했다.
‘…….’
뭔가 좀 이상하긴 하다. 연결식에 대해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이렇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사슬도 그렇고…. 사실 연결식을 빌미로 진탕 하기만 한 느낌이었다.
‘…뭐, 상관없겠지.’
그가 서로의 몸에 무슨 짓을 해놓은 건 확실했다. 궁금하긴 했지만, 그가 알리려 하지 않는 것을 캐고 싶을 정도로 궁금하진 않았다.
에라블은 바들거리며 그냥 그의 품에 몸을 묻었고, 그는 그런 그녀를 꼭 한번 끌어안곤 등허리를 토닥거렸다.
‘그나저나….’
그렇게 들려 옮겨지면서 에라블은 주변을 살폈다.
‘진짜 여긴 어디지.’
현실인지 환상인지 오락가락하던 열흘간에도 뭐가 엄청 넓다는 건 어렴풋이 인지는 하고 있었다.
그의 비늘에 갇혀서 밤낮 모르게 껌껌했던 그때완 다르게 지금은 사방이 환했다. 사방이 개방형 아치문이었기 때문이다.
새파란 하늘에 느리게 흐리고 있는 새하얀 뭉게구름….
훤한 스카이뷰가 아름답긴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대기권에서나 볼 법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가 전 우주에서 손꼽는 재벌이 아니었다면 홀로그램을 의심했을 것이다.
당연히 현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단 재벌 쪽이 편했다. 그가 물리계에서 돈을 벌어들이는 방식은 끔찍했지만, 그의 밑에서 몇 년이나 일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아, 출근하고 싶다.’
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거라곤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슬슬 현실 비슷한 곳으로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바람에 떠밀리기라도 하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이런 비현실적인 곳 말고…. 뭐, 다행히 거기까지 떠밀려 가는 게 쉬워 보이진 않는 규모긴 했다.
침대가 있는 곳에서 아래에 단차를 두고 몇 개의 샹들리에와 긴 의자, 욕실, 복도, 다시 응접실과 몇 개의 방, 그리고 외부로 나가는 문이 있었다.
에라블은 옷을 다 차려입고 나와서야 여기가 어딘지 완전히 확신했다.
신역이었다.
외부로 나가는 아치문이 눈에 익다. 그쪽으로 나가면 예전 신역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를 만났던 그 접견실이 나오는 구조인 모양이다.
“다녀오는 길에 옷이나 사러 갈까요?”
그는 디자이너를 고용하거나 카탈로그를 보는 것만큼 매대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내가 싫어해서 더 좋아하시는 것 같기도 했다.
“예…, 전 정말 좋습니다.”
“그렇게 싫으면 미뤄도 돼요. 천천히 채우지, 뭐. 다 벗고 있어도 좋고.”
혀를 내어 핥는 듯한 뒷말은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수도에 있는 집에도 옷이 매우 많습니다.”
어떻게든 쇼핑을 피해 보려는 노력과 동시에 살짝 향후 거취에 대한 운을 띄워보았다.
“거기가 편해요?”
“…예.”
혼자 지내던 시간은 사실 별로였지만. 에라블은 사람의 거주지에서 살고 싶었다. 이런 고대 신의 신전 같은 곳 말고…. TV도 나오고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와 한두 블록 걸으면 마트가 나오는 그런 사람 사는 곳에서….
“가끔 들리죠. 여기에도 적응해봐요. 이제 여기도 자기 집인데.”
“예….”
입력이 잘 안 된다.
“나중에 심심하면 자기가 서명한 계약서 좀 읽어보고. 내 재산의 5%-”
에라블은 이명을 들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원래 너무 충격적인 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앞으로는 계속 여기서 지내게 될 모양이다. 에라블은 어떻게든 TV와 간식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대중목욕탕에나 있을 법한 크기의 거대한 탕, 그것도 금세공이 들어간 대리석에 분수까지 딸린 탕에 몸을 담그면서 샤워 부스도 반드시 해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진정이 안 됩니다….”
“다 이해해 주기로 했잖아.”
에라블은 최대 아파트 크기 이상은 자기 영역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소시민이었다.
백작가에서도 사실 진정이 안 돼서 방 밖으로 잘 안 나온 것도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홀딱 벗고 앉아 있는 것처럼 초조했다.
“하, 하지만 그때 분명히 내일 일은 이해하라고 하셨습니다.”
“아, 기간 한정이었다?”
그가 고개를 틀며 처연한 표정을 해 보였다. 투명한 물방울이 기울어진 턱을 따라 톡, 떨어져 내렸다.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미인이 그러니 다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고 싶어졌다.
“기간 지났으니 이제 이해 못 해주겠단 거네…. 자기 이렇게 냉정한 사람이었어?”
“구두 계약도 계약입니다.”
“그럼 고소해요.”
그건 불가능하다. 그는 초법적인 존재니까. 데제가 못되게 웃으며 초조해하는 그녀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눌러댔다.
“정 불안하면 신전에 텐트라도 치던가.”
“그 정돈 아닙니다.”
말 나온 김에 슬그머니 덧붙여보았다.
“TV만 나와도 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신역에 설치 기사 부르면 웃기긴 하겠네. 대서특필 되는 거 아니야? 신역 처음 방문한 인간이 케이블 기사인 건 너무 웃기잖아.”
“언젠가 겪어야 할 일이라면 지금이 바로 그때….”
두런두런 떠들며 몸을 씻은 그들은 반듯하게 옷을 차려입고 계단을 내려왔다.
처음 여기 왔을 때 그가 혼자 내려왔던 그 계단을 둘이 같이 내려오려니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접견실엔 이미 부속 우주선이 개방형 문 안쪽으로 커넥팅 로드를 대고 있었다.
“…….”
우주선을 보니 갑자기 아까 그렇게 바랐던 현실감이 팍 치밀었다. 동시에 산체와의 통화가 다시 떠오르면서 굉장히 가기 싫어졌다.
“안아줄까요?”
“꼭 제 발로 걷고 싶습니다.”
에라블은 느슨히 손깍지를 끼고 있는 그보다 먼저 나서서 걸었다.
매는 나중에 맞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그녀였지만, 왜냐하면 때리는 사람도 갈수록 기운이 빠질 테니까.
어쨌거나 여기서 더 미뤘다간 이자가 복리처럼 불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도 많이 늦은 것 같단 불길한 예감과 함께….
그리고 늘 그렇듯 불안한 예감은 적중했다.
* * *
“시스터! 우리 시스터!”
산체가 박수로 맞이해주었다.
씨X…,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 버밀리언 일가가 다 모인 자리에서 박수갈채를 받은 에라블은 이를 갈았다.
“형, 저런 짐승이랑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에라블이 대꾸도 못 하는 희귀한 상황에 그간 당하고 산 게 많은 산체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한마디라도 더 놀려 먹겠다고 눈에 불을 켠 산체를 보며 에라블은 깊게 원한을 다졌다.
“잘 생각해라. 인생 길다.”
“그래서 오늘만 살고 죽으려고.”
깔끔하게 무시해 버리고 산체는 데제에게 연신 위로를 건넸다.
“많이 힘드셨죠. 대체 저 인간이 얼마나 괴롭혔으면 열흘씩이나…,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조금 힘들긴 했는데, 괜찮아.”
“너무 오냐오냐해주시다간 정말 큰일 나요.”
살짝 저승 문턱을 밟고 돌아온 에라블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데제는 아주 수줍은 얼굴로 새침을 떨고 있었다.
그녀는 이 참담한 상황에서 그냥 눈을 돌려버리기로 했다. 둘에게서 시선을 떼고, 백작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