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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120화 (120/132)

120.

사실 지금 백작가에 와 있는 손님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이렇게 나와 있으면 안 되지만, 이 우주엔 데제가 하면 안 되는 일이란 없다. 아마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덮어놓고 외면만 하는 게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은데.”

“외면은 아닙니다.”

외면이 아니라, 그냥 부끄러운 것에 더 가까웠다. 얼굴이 터질 것 같고 심장은 튀어나올 것 같은….

“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요.”

“…….”

“내가 자길 사랑한단 것보다 빚이 더 무서워지면 인정할 테지.”

못 들은 척하며 에라블은 기분 좋은 미소가 달린 남자의 얼굴에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먼 바다를 바라보며 슬그머니 반지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이미 봤는데.”

그가 짓궂게 웃었다.

에라블도 애써 웃었다. 그렇구나, 이미 보셨구나…. 이놈의 것 진짜, 빼보려 했지만 계속 실패한 게 지금이라고 될 리가 없었다.

“왜, 내가 준 반지가 마음에 안 들어요?”

“괴,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자기가 좋아했으면 했는데, 슬프네.”

“진짜 좋아합니다.”

“웨딩링은 더 예쁜 걸로 준비해볼게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버튼 누른 것처럼 튀어나오는 대답에 그가 결국 끅끅 웃어댔다.

그러다가 눈을 흘기면서 쳐다보았다. 눈알을 타고 실뱀이 느릿느릿 기고 있었다.

“이미 여러 번 세운 거 알고나 있어요.”

지금 침대에 데리고 들어가면 오늘은 꼼짝없이 못 나올 것 같아서, 그가 눈알을 타고 다니는 새끼 뱀만큼이나 느릿하게 말했다.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었는데 그냥 들어가면 자기가 아쉬울 거 아니야.”

“제가 말이십니까?”

어리둥절한 반응에 데제는 담배를 빼 물다가 멈칫했다.

“아니야?”

“맞습니다.”

습관적으로 긍정하다가 데제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봐요, 솔직히. 내가 자길 괴롭히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자기 어쩌고 싶은데.”

“솔직히… 그냥 추리닝 입고 소파에 누워 과자에 맥주나 까면서 TV나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진짜 생각만 했습니다.”

이 와중에 변명도 잊지 않았다.

“내 취향 무슨 일이야.”

데제가 한탄했다.

“혹시 착각하신 게 아니실…, 취향에 무슨 일이 생기셨습니다.”

가늘어지는 눈초리에 냉큼 말을 바꾸는 에라블을 보며 데제는 작게 신음했다.

“착각이면 어쩔 건데?”

“울 것 같습니다.”

구슬리는 듯한 말투에 속진 않았지만 에라블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가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웃음기마저 가신 얼굴에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응시하는 그가 에라블은 조금 걱정되었다.

“데제, 운전 중이십니다.”

“깜박했네.”

그가 핸들을 돌리며 다시 담배를 물었다.

“나 안심시켜봤자 당신 도망 못가요.”

“안 갑니다. 저 근데 지금 어디 가시는 겁니까?”

“가고 싶은 데가 있어서요.”

그게 어딘지는 곧 알게 됐다.

톰 아저씨의 술집이었다.

인근 주차장에 차를 대어놓고, 데제는 그 옆에 캠핑카까지 꺼내 놓게 했다. 그 낡은 캠핑카는 폭우에도 아주 멀쩡했다.

“산체가 한 이틀 뒤에나 오라던데?”

멍청한 동생의 말을 전해주며, 그는 느슨히 그녀의 손을 쥐고 아저씨의 술집으로 온 것이었다.

“저….”

에라블은 익숙한 간판을 보며 머뭇거렸다.

여길 미니드레스에 힐에 액세서리까지 풀 장착을 하고 들어가면 참 재밌을 것 같긴 했다.

만약 아저씨가 살아 있었다면 꼴이 그게 뭐냐고 칭찬해줬을 것이다. 그럼 난 귀엽냐고 되묻고, 아저씬 요새도 정신머리가 많이 안 좋으냐고 또 걱정해줬겠지.

하지만 아저씨는 없다.

재미와는 별개로 들어가기 망설여졌다. 아저씨가 죽고 나서 한 번도 이곳에 와본 적이 없었다.

“나 와보고 싶었어.”

조심스럽게 그를 올려다봤다.

“자기가 몇 년이나 살던 곳이잖아.”

그렇게 미니드레스와 수트를 입고 그들은 따지자면 약간 국밥집이나 선술집에 가까운 곳에 결국 들어갔다.

낡은 술집은 한산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게 아닌데 아무도 이 꼴을 개의치 않았다. 인식 장애가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피스티스요.”

그녀는 최애 맥주를 시켰다.

“그러고 보면 이 맥주를 참 좋아하나 봐요? 난 잘 모르겠던데, 이게 더 맛있어요?”

“예, 좀 남다른 면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최애의 최애 맥주이기 때문이지.

사실 순서를 놓고 보면 반대이긴 하다. 제임스가 피스티스를 좋아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게 덕질의 시초였기 때문이다. 태초에 피스티스가 있었던 것이다.

피스티스를 좋아하는 탑 배우, 못 참는다.

근데 또 애가 예쁘고, 귀엽고, 착하다? 이건 운명인 것이다. 제임스는 내 최애가 될 운명이었던 것이지.

“딱 딴생각을 할 때 표정인데.”

데제가 모로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에라블은 위기감을 느꼈다. 잘 모면하지 않으면 밤새 얼마나 시달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저 진짜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진짭니다.”

“그러시겠지.”

오늘 밤도 고단할 것 같은 운명을 느꼈다.

“여기선 정확히 얼마나 지냈어요?”

데제가 긴 손가락으로 맥주잔을 기울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한 3년 지냈습니다.”

“어떻게 지냈는데?”

“일도 배우고, 도와주는 수준이긴 했지만. 나름 급료도 받으면서 지냈습니다. 여기 2층에 작은 방이 하나 있는데 거기가 제 방이었습니다.”

그랬었지. 그때가 아득히 먼 옛날 일 같으면서 또 어제 일 같기도 했다.

“혹시 구박받았어요?”

“우리 아저씨 특기였습니다.”

방 좀 치워라, 음식 좀 골고루 먹어라, 말수도 적은 사람이 어찌나 잔소리가 많았는지.

“자기가 구박받을 짓을 했겠지.”

아니, 어떻게 아셨지…? 그러는 동안 주문했던 다른 음식들도 나왔다.

술집보단 사실 밥집에 더 가까운 가게여서 음식 종류가 다양했다.

달짝지근한 소스를 발라 구운 닭 날개에 바삭한 감자튀김, 토마토에 두껍게 올린 흰 치즈.

인류가 전통적인 주거지로 삼는 행성의 식생은 비슷했다.

유기 생명체가 번식하는 환경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물론 요리 스킬에 따라 하위 먹이사슬에 있는 유기 생명체들은 음식이 되기도 하고 음식물 쓰레기가 되기도 한다.

다행히 나온 음식은 대체로 맛있었다.

톰 아저씨가 만들던 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레시피를 잘 지키고 계신 모양이었다.

“가게는 왜 넘긴 거예요? 여기 자기가 받았잖아, 유산으로.”

“여기 메뉴가 너무 많습니다.”

“아…, 요리를 못해서?”

“예, 감당 가능한 메뉴는 사실상 육포 굽는 것뿐….”

나름 진지하게 이실직고하던 에라블은 배를 잡고 터진 데제를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취향만 문제인게 아니었다. 웃음 장벽은 더 심각하다. 육포 굽는 게 도대체 뭐가 웃긴 건지 모르겠다.

뭐, 하여간 에라블은 그런 이유로 가게를 넘겼다.

톰의 지병은 몇 년간 계속 악화 되었고, 용병 시절 재수 없게 일이 꼬여 행성신의 저주를 받은 거였기 때문에 초현실적인 이세계 의학도 별 소용 없었다.

백작가 양녀로 들어간 것은, 백작이 입적하라며 드러누운 것도 있지만 사실 톰의 유산을 잘 처리해주겠다는 점이 컸다.

에라블과 마찬가지로 가족 하나 없이 혼자였던 톰은 비록 유서까지 써가며 가게를 그녀에게 남겨주려고 했지만, 일단 에라블은 무국적자였다.

작은 술집으로 벌어 먹고살던 한물간 3류 용병 출신인 톰이 거대한 제국의 행정 시스템을 파고들 능력 같은 게 있었을 리는 없다.

톰은 그저 열심히 뒷돈 찔러줘 가며 단속을 피하게 해줬고, 에라블은 그렇게 마음고생시킨 것 때문에 톰의 병이 더 빨리 악화된 건 아닌지 항상 의심했다.

하여간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유산을 비롯한 모든 행정 처리는 다 백작이 해줬다.

그렇게 백작의 도움으로 에라블은 마침내 무국적자에 불법체류자 신세에서 벗어났고, 가게는 착한 부부에게 레시피를 지켜주겠단 약속을 받고 넘겼다.

그리고 한 번도 와보지 않았지만….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술집에서 잘 먹고 잘 놀았다.

“어느 날은 아저씨가 토마토 씨앗을 사 온 거예요. 심겠다고요. 근데 그게 첫 먹이 토마토였던 거죠. 아시죠, 처음 주는 먹이에 따라 성질이 변하는 토마토.”

“아, 그거.”

“예, 아저씨는 평범하게 키울 생각이었거든요? 근데 손님 한 분이 걔한테 술을 부어버린 거죠.”

그랬다, 다 술 때문이었다. 간만에 제한 없이 풀린 술 때문에. 어쩌면 옆에 앉아 살살 맞장구를 쳐주는 남자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때부터 애가 술만 보면 환장을 해서, 아주 병나발을… 한때 이 동네에서 꽤 유명했었어요. 주정뱅이 토마토라고.”

“골치 아팠겠네?”

“아니요, 좋았어요. 가끔 제가 맥주를 훔쳤는데 아저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 걔가 먹은 줄 알았거든요.”

처음엔 좋았다. 첫 먹이에 필수 영양분이 부족할 경우 한 해를 못 넘긴단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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