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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119화 (119/132)

119.

버밀리언들은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는 사촌을 역병이라도 된 양 피했다.

그중 한둘은 어른을 부르러 갔다. 사고 치기 전에 격리시켜야 한다고 눈빛만으로 의견이 일치됐다.

“…후작은 무슨.”

사촌은 혼자만 얼굴을 우그러트린 채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지.”

안타깝게도 개들이 그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사실 아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보다 더 노골적이 되었다.

에라블은 한숨을 삼켰다. 더 사고 치기 전에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다. 하지만 사촌의 말대로 지금 이게 말 같지도 않은 상황인 건 맞다. 특히 지금 내 꼴이 말 같지 않았다.

성장 가속을 돌린 머리는 지금 구불진 웨이브를 따라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고, 데제가 끼워놓은 탐색형 아티팩트… 어쨌든 이 반지와 맞춘 검은색 미니드레스에 앙증맞은 보석으로 장식된 12cm짜리 힐까지 신고 있었다.

꿀릴 수 없다고 도끼눈을 뜬 산체의 작품이었다.

그 꿀릴 수 없는 대상이 데제라면 산체 녀석이 드디어 제정신을 잃은 게 틀림없었다.

데제가 이 모습을 보고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이었다. 물론 갑자기 외모에 자신감 같은 게 생긴 건 아니었다.

하지만 빚이 이만큼 쌓였으면 자신감과는 별개로 학습 효과라는 게 생기는 것이다.

“…….”

에라블은 멀리서 오는 데제의 모습에 입을 꾹 다물었다.

백작과 집무실에서 뭔가 얘기를 나누러 갔던 그는 약간 시간을 지체한 뒤 연회홀로 들어왔다.

두 사람이 무슨 얘길 한 건지 백작의 표정이 약간 굳어있었지만, 당장 백작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정말 눈이 부셨다.

바듯하게 상체를 죄는 베스트에 자켓이 늘씬한 몸을 유독 도드라지게 했다. 대단히 화려하게 차려입은 건 아니었다.

인간 자체가 화려하다는 게 항상 문제였다. 늘씬한 다리로 그가 가까이 걸어왔다.

반사적으로 몸이 긴장했다.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에라블은 몸에 남아있는 버릇 그대로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아름답네요, 영애.”

간이 오그라드는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그가 손에, 정확히는 검은 빛이 들어와 있는 반지에 입을 맞췄다.

“내가 마음에 드나 봐요?”

속닥대는 소릴 들으며 에라블은 질끈 눈을 감았다.

이놈의 아티팩트.

“…….”

에라블은 기회를 살폈다. 그러다가 그가 백작가 사람들과 잠시 어울리는 틈을 타 일단 발코니로 튀었다. 문제는 그 발코니에 시비 걸기로 작정한 사촌도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인간 피해서 튄 건데, 쫓아오면 어쩌냐고.

어른들 눈은 어떻게 피한 건지. 오늘 아주 결심을 했나 보다. 차라리 어른들 근처로 갈걸. 그쪽도 서로 어색해서 그냥 발코니로 튀었더니 이 모양이다.

“야, 오랜만이다?”

이러는 이유는 사실 별것 아니었다. 다 양아빠 때문이다. 가주한테 총애를 받지 못하니, 받는 나를 싫어하는 것뿐이었다.

다 놓고 나가서 더 싫어했다. 유산 포기 각서를 썼을 때 사촌의 미움은 아주 정점을 찍었었다.

“한 몫 제대로 잡았나 봐.”

자기가 꿈에도 원하는 것을 걷어차는 인간이 아주 싫은 것도 이해는 간다.

“대답 안 해?”

“무슨 일이십니까.”

“건방지긴. 야,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좀 부탁할 게 있는데. 뭐, 별 건 아니고. 너 혹시 수도에 아는 병원….”

에라블은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서 있었다. 상황을 눈치챈 누군가가 곧 쫓아 나와서 이 인간을 말려 줄…, 데제가 나왔다.

“여기서 뭐 해요, 남자랑 단둘이.”

에라블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뭐하나 내버려 뒀더니, 하여간 바람이 습관이라니까.”

그가 발코니 안으로 들어오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얼어 있는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빚도 많은 사람이 위자료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는 정말 무고합니다.”

“처리하면 화낼 거야?”

“아닙니다.”

하지만 말리고 싶다.

우악스럽게 떼를 쓰고 발을 구르는 것 말곤 할 줄 아는 게 없는 인간이다. 아직 어려서 그렇지 진짜 나쁜 인간은 못 된다.

주둥이로 사고 치는 것도 물론 나쁘지만. 요령이 없어서 자기 인망만 깎아 먹는 애새끼에 불과했다.

지금도 차기 후작 앞에서 입 내밀고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데제가 이런 류의 인간을 봐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억이 없다고 뭐 달라진 게 없을 정도로 아주 일관적이었다.

굳는 그녀의 등허리를 힐긋 보며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이만 밖에 나가요.”

그리고 이어 비밀 얘기하듯 속닥였다.

“자기 분쟁지역에 갔다고 내가 백작님한테 다 일렀거든.”

“…예?”

설마 하는 눈으로 쳐다보니 그가 곱게 웃는다.

“내가 회수 전에 미리 말씀을 드려놨더라고.”

그가 웃으며 귀걸이를 건드렸다.

“당분간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우게 될 텐데 그동안 당신 좀 잘 부탁드린다고. 근데 당신은 그동안 전화도 잘 안 받았다며?”

“그….”

“밑에 차 대놨으니까 얼른 먼저 가 숨어있어요.”

에라블은 곧바로 걸음을 뗐다.

그리고 돌아 나가는 그녀의 사각에서, 그는 사촌의 얼굴을 움켜쥐고 벽에 천천히 짓눌렀다. 주변을 순식간에 잠식한 그림자가 기척마저 완벽하게 삼켜버렸다.

연회홀에선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명이나 신음 같은 잡음은 아주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뚝 잘라낸 완전히 다른 그림처럼.

데제는 멀리서 걱정스럽게 저를 돌아보는 에라블에게 작게 손을 흔들었다.

동시에 사각의 다른 손은 사촌의 콧대와 광대를 우그러트리고 두개골을 파고들고 있었다.

틀어막힌 코와 입 밖으로 시커먼 실뱀과 지네와 뒤엉킨 구더기들이 쏟아지듯 새어 나오는 것을 보며, 그는 실소했다.

“…여기에 퍼피가 있었네.”

에라블은 정말 영지를 잘 골랐다.

어떤 시간선에서도 신경 쓴 적 없어 시골에 방치된 어린 개를 이제 와 한 마리 발견한 것이다.

그는 손을 놔주곤 사촌의 포켓치프로 그 손을 닦아내며 바닥에 주저앉은 버밀리언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촌은 여전히 코와 눈구멍에서 기어 다니는 것들을 흘리며 넋을 놓고 있었다.

“일어나야지?”

개들은 그의 질투가 심하다고 떠들어대곤 하지만. 데제는 사실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 평범한 수준이다.

“일어나서 평소 하던 데로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예, 예….”

자기 여자한테 다른 사람이 치근덕거리는 걸 누가 좋아할까.

“형, 누나 어디로 튀었는지 아세….”

데제는 마침 발코니로 바쁘게 걸어오던 산체를 돌아보았다. 산체는 뚱한 표정의 사촌을 보며 하던 말마저 멈추고 인상을 썼다.

“말 못 해주지. 나도 같이 나갈 거라서.”

“와….”

산체는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저 귀빈들을 그냥 두시고요?”

“그래도 돼서.”

약간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감정이 산체의 얼굴 위로 짧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곤 물었다.

“참, 아버지 완전 빡치셨던데. 무슨 일인지 아세요?”

“말해주면 너도 빡칠 걸.”

“그 인간 또 사고 쳤죠?”

“글쎄.”

말 못 해준단 데제의 표정에 산체는 알만하다는 듯 어깨를 늘어트리며, 뭉그적대는 사촌에게 기어이 우거지상을 썼다.

“넌 왜 거기서 계속 뭉개고 있어?”

“무슨 상관이야. 애초에 내가 먼저 와있었거든!”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라고.”

대 놓고 주는 면박에 사촌이 씩씩대며 산체의 어깨를 치고 나갔다. 일부러 안 피하고 마주 올려 친 산체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건 언제 철들지.”

그리곤 그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쟤가 뭐 실수한 거 있으면 그냥 때리셔도 돼요. 최대한 인적 드문 곳에서.”

“폭력은 아주 나쁜 거야. 누나한테 일러야겠네.”

데제의 너스레에 산체가 웃어댔다.

“한 이틀 뒤면 아버지도 다 풀리셨을 거예요.”

혹시나 해서 연회 내내 딸과 눈도 안 마주치고 있던 백작은 눈치 빠른 에라블이 결국 튀었다고 뒷목을 잡았지만,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 * *

백작가 저택을 나와 그와 함께 해안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에라블은 아주 조금 우울했다. 이번에 말로 백작님 손에 등짝을 얻어맞을지도…. 하지만 계속 그러고 있기엔 옆에 있는 남자가 너무 미인이었다.

“나중에 들키는 것보단 낫지.”

“그냥 모르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분쟁지역에 갔던 일을 백작이 굳이 알 필요는 없지 싶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예…, 에라블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대답했다.

과감하게 뚜껑을 연 오픈카 너머로 서늘한 바람이 머리칼을 흩트렸다.

산체가 심혈을 기울인 머리는 점점 미친X 꽃다발이 되어가는 듯했지만, 얼굴이 화끈거려 서늘한 바람이 반가웠다.

도로 사이드엔 가로등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고, 노란빛 너머로 유영하는 고래 떼가 바다 가까이에서 계약자 속도 모르고 좋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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