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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116화 (116/132)

116.

진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또 얇은 드레스 셔츠와 슬랙스 차림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체감 추위가 2배다.

담요를 칭칭 두르고 뜨끈한 커피를 손에 쥔 채 먼 설산과 빙하 사이를 유영하는 고래 떼들을 보며, 에라블은 애써 자작나무 숲 사이로 중형차만 한 갈색곰을 못 본 척했다.

벌써 세 번째였다.

아무래도 여기가 서식지인 모양이다.

“구울까?”

“숯하고 화로 꺼내겠습니다.”

빙어는 역시 숯불구이지. 소금 살살 뿌려서 구워 먹으면 아주 별미였다.

“시그눔 안 쓰기로 했잖아.”

이번에도 시그눔 사용은 금지되었다. 시그눔 쓰면 그게 무슨 여행이냐고.

“현실과 작은 타협….”

“원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잖아. 자기, 그렇게 안 봤는데 무서운 사람이었네.”

가끔 데제가 기억이 정말 없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하는 짓이 똑같을 수 있지….

“죄송합니다.”

재빨리 사과하곤 말을 이었다.

“제가 식욕에 잠시 눈이 멀어서 그랬습니다만, 사실은 제가 굉장히 원리 원칙을 잘 지키는 성실한 노동자로, 고용만 해주신다면….”

“잡았다.”

파닥거리는 빙어가 햇빛에 반짝였다. 말이 씹힌 에라블은 떨떠름하게 빛나는 빙어를 바라보았다. 구직활동은 오늘도 실패로 돌아가는 듯했다.

“…어제 또 4억 cp가 늘어났는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응? 12억이지.”

왜 4억이냐는 그의 얼굴에 간이 졸아붙었다.

“예? 하지만 그건 꿈 아니었습니까?”

뒤엉키던 뱀 떼, 팔다리가 타르에 파묻힌 채 그를 받아내고, 수백 마리 뱀의 혀가….

“진짜 꿈이라고 생각해요?”

날름 갈라진 혀로 발간 입술을 핥으며 그가 되물었다.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이 생긴 혓바닥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흐릿했다.

하룻밤 만에 12억 cp라니…, 진짜 잘못 본 거였으면.

“아, 또 잡았다.”

넋이 빠진 에라블의 귀로 데제의 다소 신난 목소리가 흩어졌다.

양동이에 벌써 식량이 착착 쌓이고 있었다. 그녀의 빚만큼이나, 착착….

“숯불 꺼내 봐요.”

흐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 번만 쓰죠, 한 번만 쓰고 이따 내려가서 숯이고 화로고 다 사자고.”

“…꺼낸 김에 그냥 가지고 다니면 되지 않겠습니까?”

“자기 똑똑하네요?”

똑똑한 사람은 빚이 없지….

우울하게 생각하며 에라블은 숯과 화로를 꺼내, 그가 손질해서 올려준 빙어를 앞뒤로 노릇하게 뒤집었다.

지글지글 읽어가고 있는 빙어를 보고 있으니 맥주가 당긴다.

“데제, 시그눔 한 번만 더 열어서 시원하게 맥주 한 캔….”

“춥다며.”

“원래 추운 지역에서 술을 더 많이 마십니다.”

“똑똑해서 아주 좋겠네요.”

“똑똑한 사람은 빚이 없….”

기어이 입 밖으로 말을 뱉고만 에라블은 끅끅거리고 웃는 그를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딱 한 캔만이에요.”

그게 또 신나서 맥주를 꺼내 마셨다.

그가 그걸 보며 웃고 있단 건 알지만, 세상엔 알아도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산더미처럼 많다.

데제는 언제나 그런 종류의 문제였다.

“…트레킹 말씀이십니까?”

그는 지난번에 했던 것만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 못했던 것도 하고 싶어 했다.

* * *

‘결국 이걸 하게 되네….’

깎아지른 듯한 산맥을 암담하게 올려다보며, 에라블은 얼마나 개고생을 하게 될까 입구부터 걱정했다.

정 대자연을 만끽하고 싶으면 셔틀이나 드론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자연 보호 구역에는 접근하지 못하겠지만, 이 정도 트레킹 코스에 우주법이 적용돼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일단 시도를 해보고 걸리면 벌금을 내고 싶다….

‘아, 난 돈이 없지….’

빚만 있지. 빚만….

암담해진 에라블은 그래도 이게 장미꽃 이벤트보단 낫다고 애써 위안했다. 그가 장미 농장 체험 때 산더미처럼 사다가 침대에 뿌려놨던 장미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했다.

그날 밤도 그랬지만 다음 날 치우는 것도 아주 곤욕이었다.

아주 구석구석 처박힌 꽃잎을 빼내며 그는 대체 뭐가 재밌는지 한참을 웃어댔지만….

에라블은 청소가 별로 재미있지 않았다.

‘진짜 왜 사서 고생이냐고.’

데제는 장미 물이 든 시트를 인근 상점가 코인 세탁소에서 대충 세탁한 다음 우편으로 부쳐버렸다.

이제 진짜로 시그눔을 안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깝다고 버리지도 않았다….

새 시트를 산다고 왠지 신난(솔직히 이제 에라블은 그가 쇼핑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와 함께 근처 백화점을 세 바퀴나 돌아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날 밤 또 쌓였던 빚에 비하면 아주 재밌는 일이었다….

에라블은 빚으로 신기원을 이룩하고 있었다.

단언컨대 인류 역사상 자신보다 많은 빚을 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낡은 캠핑카로 비 포장도로를 덜컹덜컹 네 시간쯤 달려 도착했더니, 트레킹 코스로 가는 풀이 성성한 계단을 타고 등에 짐을 멘 나귀 몇 마리가 익숙한 품으로 타박타박 내려왔다.

도무지 시대상을 짐작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

에라블은 고개를 들어 나귀의 머리 위로 지나가는 외향용 우주 셔틀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숨을 삼켰다.

웬 운송용 나귀람.

차라리 쟤들이 무장 로봇이어서 갑자기 변신해 샷건을 쏴대는 쪽이 덜 신기할 것 같았다.

뭐, 환경이고 나발이고 어쨌거나 중요한 건 쟤들은 다리가 네 갠데, 나는 지금 두 개로 쟤들과 똑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먹을 것 좀 살까요?”

“저 돈이 없습니다.”

“비스킷이나 초콜릿 같은 게 좋다는데.”

“저 돈이 없….”

“그만해.”

어떻게 그만 해요. 빚이 지금…! 머리는 생각하면서도 입은 잘만 대답하고 있었다.

“예….”

그녀의 재정 상태와는 상관없이 어쨌든 산길은 아름다웠다. 기후가 약간 오락가락했지만, 약한 부슬비 정도였다.

상점을 운영하는 현지인들은 여기서 비가 더 내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을 했고, 1차 목적지인 로지까진 길이 완만해 아주 평지나 다름없다고 확언을 했다. 거짓말인 게 틀림없었다.

완만하긴 개뿔….

물론 에라블은 처음엔 감탄했다. 그리고 나중엔 40분쯤 헉헉대며 세상을 원망하다가 1초 정도 감탄하길 반복했다.

그러다가 아주 정신 상태가 혼미해졌을 즘, 로지의 게스트 하우스가 나타났다.

그즈음엔 비도 아주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은 다 거짓말쟁이들이다.

완만한 길을 걷다가 숨이 넘어갈 뻔한 에라블은 애꿎은 사람들을 원망했다.

게다가 비는 또 얼마나 본격적으로 내리는지, 그들은 결국 로지에서 하루를 묶게 되었다.

원래도 하루 묶어갈 계획이긴 했지만, 내일 출발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해졌다.

어쨌든 에라블은 내일도 비가 내리길 기도했다. 더 가기 싫었으니까….

“…….”

그들은 2층에 방을 잡았고, 에라블은 창가에 앉아 잠시 비안개로 흐릿한 시야를 더듬었다. 뿌옇게만 보이는 능선 사이로 고래들이 느리게 유영했다.

다른 우주 행성계에서 ver. 067의 신호를 받으며 수송 임무를 진행 중인 대정령들의 잔상이었다.

쟤들 일은 똑바로 하고 있는 건지 걱정이다. 잘만 돌아가고 있는 플랫폼을 보며 에라블은 역시 재취업을 해서 직접 관리를 해야겠다고 괜한 걱정을 하다가, 짧게 신음을 삼켰다.

“…윽.”

갸름하고 곧은 그의 손가락이 퉁퉁 부은 발을 감쌌다.

“많이 아파요?”

그가 이어 젖은 수건으로 발을 감싸고 세심하게 닦아냈다.

젖은 그의 머리칼이 미끈한 눈썹뼈를 타고 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신중하게 발을 살펴보고 있었다.

“겨, 견딜 만합니다.”

그가 이러는 게 더 못 견디겠다.

발목과 종아리를 눌러 풀어주고는 그가 무릎에 입을 맞췄다.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고래 울음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가 입술을 무릎에 붙인 채로 불평했다.

“…나 좀 예뻐해 주지? 이렇게 예쁜 짓 하고 있는데.”

“그….”

그렇지만 혹시 또 이러다가, 또… 에라블은, 제 손이 그의 뺨을 감싸는 것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갑자기 이러지 말아요.”

그가 무릎 안쪽 살갗을 슬쩍슬쩍 깨물며 말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뺨을 지나 목덜미, 셔츠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그가 낮게 신음하며 말렸다.

“오늘 많이 피곤할 텐데…, 정말 이러지 마.”

“저도 굉장히 그러고 싶습니다….”

또다시 손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응, 가만있으라니까.”

그는 아주 못되게 웃고 있었다.

또 빚이….

“…흑.”

에라블은 눈물을 삼켰다.

창밖에는 굵은 비가 계속 쏟아져 내렸다….

비는 도통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묶는 기간이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데제는 아예 산장 하나를 따로 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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