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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115화 (115/132)

115.

28억…, 핏기가 싹 가시는 숫자에 에라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얼굴을 보며 그가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곤 몸을 돌려 자신이 위로 올라가며 달래듯 안고 가만가만 입을 맞췄다. 당연히 전혀 달래 지지가 않았다.

“에라블.”

“…예?”

물기가 어리는 눈을 가만히 쳐다보며 그가 물었다.

“내깃돈 깎고 싶지 않아요?”

에라블은 눈을 껌벅였다.

“내가 자기하고 왜 이러고 있는지 한번 말해봐요.”

턱이 그의 잇새에 잘근잘근 깨물리며 에라블은 열심히 그의 말을 들었다.

“내가 왜 기억도 없이 분쟁지역까지 자기를 쫓아왔는지, 며칠씩 일 나간 자기 집에서 왜 아무것도 안 하고 자길 기다리고 자길 위해 요리를 했는지 말해봐요.”

“그….”

“자기가 연기 시켜버린 우리 계약서에는 왜 유독 간통에 대한 조항이 철저했는지 말해봐.”

“저, 그게 간통까지는….”

“정신적인 것도 바람이라니까.”

에라블은 코웃음을 치는 그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봤다.

얼른 말해보라니까, 그가 작게 속닥거렸다.

“말하면 내기는 다 없던 걸로 해줄게.”

에라블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당신은 알고 있어.”

물론 알고 있다.

그가 자신을 보게 됐다는 것, 그게 어느 정도 인지까지도… 대체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오리무중이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걸 입 밖으로 말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

에라블은 대답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데제는 그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다가 길게 입술을 누르고는, 벌벌 떨리는 눈가에 다시 자잘하게 입을 맞췄다.

“2억 더 늘었네요?”

약물을 쓴 건 그뿐이었다. 에라블의 흉곽이 크게 부풀며 호흡은 짧게 끊어졌다.

초점이 사라진 눈에서 차오른 눈물이 뺨과 콧잔등을 타고 떨어졌다. 그는 곱게 눈매를 흐리고 웃으며 다시 잘게 입을 맞췄다.

* * *

“황자 전하께서 빠른 시일 내에….”

“무리가 되더라도 실험 횟수를 늘려야….”

“…조금만 더 하면 마침내 신성을.”

그것은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떠들고 있는 인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의 수많은 눈이 그것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해체되고, 다시 곁붙이고, 다시 해체되고… 그 모든 순간을 눈들은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그것은 이를 딱딱거렸다.

이제 몸에 남은 유일한 인간의 것, 인간의 치아가 서로 부딪히며 딱딱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신성이 몸을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콰르르르-…, 낯선 짐승이 우는 듯한 소리를 유리창 너머의 인간들은 다들 들었다고 착각했다.

딱딱 치아가 부딪히는 몹시 거슬리는 소리 사이로 낯선 짐승이 우는 듯한 그 소리를… 다들 들었다고 착각했다.

온전한 착각이었다. 그즈음 그들에겐 소리를 들을만한 머리가 남아있지 않았음으로.

그렇게 첫 번째 멸망이 밀어닥쳤다.

잠시였다.

그것은 다시 축이 무너지던 그 순간으로 돌아왔단 사실을 깨달았다.

딱딱, 콰르르르-, 치아 부딪히는 소리와 짐승이 우는 소리, 그리고 유리창 너머의 눈들. 몇 차례 같은 일이 반복됐다.

판테온의 수장이 찾아왔다.

죄에서 벗어나 그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 판테온의 수장은 여러 차례 그것을 말렸다. 말리는 것을 집어삼키고 그것은 다시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자기들이 불러들인 멸망에 그들은 아우성을 쳤다.

여러 번 잡아먹힌 판테온의 수장이 생츄어리의 힘을 끌어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약간의 유예를 얻었다.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균형은 한 번에 스러지는 대신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그것은 허물을 벗게 됐다.

탈피하고, 또 탈피할 때마다 그는 점점 더한 것이 되어갔다.

악화된 상황을 깨달은 판테온의 수장이 유예를 멈췄을 땐, 그 스스로 균영의 기울기를 늦추고 탈피를 반복하고 시간 축을 되돌리는 지경이 되었다.

그는 그렇게 탈피를 반복하며 제 수족들과 함께 서서히 무너져가는 세상을 즐겼다.

황자를 다시 만난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의 신성을 가지고 그 연구소에서 혼자 살아 도망친 황자는 제 발로 그를 찾아왔다.

“네가 개들의 수장이냐.”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는 황자에게서 그는 정욕의 냄새를 맡았다. 찐득찐득한 정욕의 냄새였다.

그게 아주 웃겼다.

그의 신성을 귀에 걸고… 그의 살을 가르고, 그의 피를 쏟게 하고, 어린 그의 삶을 조각조각 내어 얻어낸 것을 귀에 걸고, 황자는 그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그는 이번에도 이 인간이 원하는 것을 다 주기로 했다. 그 인간과 그의 혈족이 원하는 것 모두.

공평하게 내주었다.

권력에 미친 인간들은 대체로 제게만 좋은 것을 달라고 입을 벌려댔고, 그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전부 사이좋게 나눠주었다.

멸망은 더 느리고 잔인한 방식으로 되풀이되기 시작했다. 멸망이 찾아오기도 전에 인간들은 서로를 죽여대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이 아주 즐거웠다.

그리고 자신이 영원히 이럴 것이라 생각했다.

“…….”

데제는 가만히 눈을 뜨고 제 곁에 잠든 작은 여자를 쳐다봤다. 에라블은 제 곁에서 무방비하게 여린 숨을 뱉으며 잠들어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부수고 싶지 않은 것이 생겼다. 부서질까 봐 두려운 것이 생겼다.

그를 보고 비명을 지르는 대신 징그럽다고 눈을 감겨주는…, 아, 캠프도 차리고.

작게 신음을 하다가, 그는 다시 눈도 깜박이지 않고 잠든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손가락을 얽고 그 여린 손바닥에 입술을 눌렀다. 검붉은 스펠 더미가 손가락 새로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잘해 줄게요.”

이미 부쉈는지도 모르지만…. 남은 건 이렇게 얼기설기 모아 놓은 부서진 조각뿐일지도 모르지만.

한 조각도 빠짐없이 다 긁어모아 온 힘을 다해 움켜쥐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입술을 더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내일 아침에야 말로 기절할지도 모르겠네.”

금액을 들으면 정말 그럴 수도 있었다. 에라블의 반응을 상상하며 그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배였다.

* * *

‘이건 아니지….’

다음 날 아침, 에라블은 눈 뜸과 동시에 생각했다.

이건 아니다.

‘…28억.’

28억, 빚을 생각하니 눈앞이 흐릿해졌다. 눈물이 번지는 눈가를 남자가 깨물었다. 에라블은 움찔하며 제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가에 더 뿌옇게 눈물이 번졌다.

“또 우네?”

이건 귀엽다며 그가 뺨을 감싼 채 키득거리고 가볍게 입 맞추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자기 퇴직 처리됐어요.”

“…예?”

에라블은 다시 움찔 얼었다.

“자기 이제 백수라고.”

“왜, 저, 왜….”

“이유가 중요하면 만들어 주고. 근데 자기가 원했던 거잖아.”

“그, 그….”

그건 빚이 28억 cp나 생기기 전의 얘기였다!

“이제 나랑 느긋하게 지내요.”

“아….”

눈물이 절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데제는 황당해하다가 웃어댔다.

“진짜 귀엽네.”

말도 안 되는 소릴 자꾸 하며 그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꼭 쥐고 연신 입을 맞춰댔다.

“그만 울고 짐이나 싸요, 방 빼게.”

정말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리고 방을 빼기 무섭게 에라블은 노버 연방으로 끌려갔다. 그러니까 또 여행이었다.

* * *

“자기야, 커피 그만 마셔요.”

눈 덮인 설산의 날이 선 능선, 흰빛을 뿌리는 태양과 시리게 빛을 받는 얼음덩어리들….

에라블은 담요를 두른 채, 벌써 세 잔째 인스턴트 커피를 들이마시다가 잔소리를 들었다. 꼭 붙들고 추위에 달달 떠니 데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그것까지만이야.”

“예….”

하지만 몸보단 마음이 더 추웠다.

“빈속에 밥을 먹어야지.”

그는 역시 잔소리가 심, 아니, 빙하를 보고 있자니 그랬다. 약간 들뜬 듯한 그의 얼굴을 보니 할 말도 사라진다.

“…….”

데제는 얼음에 구멍을 뚫고 있었다.

군용 나이프로 저 두께의 얼음이 저렇게 반듯하게 잘리는 게 신기했다. 물론 행성도 반파시킬 수 있는 괴수에게 저깟 얼음이 뭔 대수인가 싶긴 하지만….

시각에 인식을 좌우 당하는 인간종으로선 별수 없이 매번 신기하다.

어쨌든 또 낚싯대 하나로 자연에서 식료품을 조달 중인 데제 옆에 앉아 응원하게 됐다.

왜지.

이런 상황을 살면서 두 번이나 겪게 될 줄은 몰랐는데.

퇴직하자마자 데제는 여행을 다니고 싶어 했다. 그 상자를 본 게 화근이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었다. 덕질 상자를 들킨 그 날 일 것 같았다. 괜히 같이 뒀지.

열대, 온대, 툰트라 등 온갖 기후가 섞인 행성을 고른 이유 역시 그 때문인 듯했다. 그때와 최대한 비슷한 행성이 기준이었기 때문에.

행성을 고르는 데만 이틀이 소요됐다. 그냥 같은 곳을 재방문하면 해결될 문제 같았는데, 그건 또 데제가 싫어했다.

같은 건 싫다고 하시더니, 왠지 와선 똑같은 짓을 다시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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