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워낙 현실감이 없어 아직은 기쁘지도 않았다. 단 얼마라도 받아야 기쁠 것 같았다.
“…….”
케이가 입만 떡 벌렸다. 그 사이로 필터가 씹힌 새 담배가 툭 떨어진다.
“그리고 한가지 여쭤볼 말도 있습니다.”
“…뭐, 뭐….”
아무래도 중대장은 약간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좀 넋이 나가 있다.
“그 실험, 아나나사 황자가 주도한 거 맞습니까?”
쉬운 문제였다. 무려 제후가 아들을 납치할만한 권력자, 아무리 생츄어리와 합작했다 해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황자는 그를 후작가에 입적시킨 것도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가 그 아이란 사실은 아무래도 몰랐던 것 같지만.
무엇보다 황자의 귀에 걸려있던 그, 귀걸이.
원작에서 데제는 황자를 놓지 못하면서도 아주 집착적으로 망가트렸다. 이유를 몰랐는데 황자가 1,500여 차례에 이르는 실험을 주도한 존재라면 이해가 된다.
에라블은 확신하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사실을 듣고 싶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냐.”
그야 아무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니까. 데제는 그녀가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게 싫은 듯했다.
“대답해주시면 내깃돈 좀 깎아드리겠-.”
“맞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던져지는 케이의 대답에 에라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 왜 표정이, 설마 아니지?”
“뭐가 말이십니까.”
“그 새끼가 불쌍해서 그런 표정인 건 아니지? 설마, 그럴 리는 없지?”
“좀 전에 그러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와 미쳤네. 너 제정신이냐?”
케이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것들이 진짜 쌍으로….”
“돈은 최대한 빨리 계좌로 부탁드리겠습니다.”
“…….”
케이는 다시 말이 없었다. 이번엔 당황해서라기보단, 에라블은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져서 움찔 굳었다.
케이의 얼굴이 귀신이라도 본 듯해 더 불안해졌다.
“잠깐 자리 비우자마자 또 바람이네.”
낮은 목소리가 솜털을 긁는다.
“자기, 그렇게 돈이 필요해요?”
에라블은 반사적으로 바르르 떨며 등 뒤에 서 있는 그를 돌아보았다.
* * *
“그 잠깐을 못 참고.”
사납게 내려다보는 시선에 에라블은 목을 움츠렸다.
“그, 그게 아니라….”
“자기 진짜로 위자료 감당돼요?”
“절대 아닙니다. 그냥….”
“대체 황자가 왜 궁금한 거야?”
“데제께….”
에라블의 손이 바짓단을 꾹 움켜쥐었다.
“중요한 사람이었어서.”
“아, 그 얘기.”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 얘길 잊고 있었네?”
“받아야 할 것도 있었습니다.”
“아, 돈. 돈 필요하면 나랑 내기해요.”
에라블은 불안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탁자 위에 툭 던지고, 이어 셔츠의 손목 단추를 풀고 있었다.
“저, 무슨 내기를….”
“당신은 내가 얼마나 당신을 원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
그가 눈짓으로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서 벗어요.”
“…예?”
에라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늘은 진짜 너무 충분히 했는데….
“다치게 안 할 테니까, 걱정 말고. 가서 벗어보라고.”
“예….”
에라블은 침대에 제일 끄트머리에 앉아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보며 티셔츠에서 손을 뺐다. 손은 떨리고 심장은 터질 것처럼 쿵쿵거렸다.
“저, 데제.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내기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에라블의 메인 시그눔을 돌렸다.
티셔츠에서 팔을 빼내고 있던 에라블은 계약자의 동의도 없이 또 나타난 미로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미로는 왜 갑자기 부르신 거지….
그가 대정령의 입구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림자가 타르와 함께 늘어지면서 내부를 샅샅이 뒤지더니, 작은 키트를 꺼내 왔다.
“이거 뭔지 알죠?”
은색 케이스, 시리얼 넘버가 미표시된 41사단 내부 보급용으로 주로 작전팀에서 소모하고 있었다.
“가, 감각 제어 세트 E 개량형입니다….”
신체 감각을 전투에 유용한 쪽으로 최대한 초점을 맞춰주는 통제형 약물이었다. 사용하면 전투엔 전혀 쓸모가 없는 쾌락 신경계는 거의 마비가 된다.
“내가 당신한테 어디까지 반응하나 한 번 해봐요.”
그러니 지금 그의 말은 불가능에 도전하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통제형 약물의 경우 고레벨일수록 효율이 좋았다. 제어할 감각도 없는 저 레벨과는 차원이 다르게 기능한다.
보통 이 동네 군수품은 똑같은 물건을 써도 저레벨과 고레벨의 출력이 중세와 근현대 화력 차이만큼 벌어지는데, 통제형 약물은 정도가 가장 심한 편이었다.
그는 말릴 새도, 아니 말릴 능력도 없긴 하지만. 어쨌든 주사제를 자기 혈관에 찔러 넣고는 셔츠와 바지 버클을 푼 채 침대에 늘어져 누웠다.
“체액이고 체열이고 다 안 통하는데, 내가 당신한테 반응하는지 한번 해보라고.”
그가 베갯잇에 검은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며 나른하게 웃었다.
“반응할 때마다 당신이 지는 거야. 회당 4억 cp정도 어때요?”
“…예?”
입력되지 않는 숫자였다.
받는 것도 아니고 줘야 하는 거라면 입력부터 오류가 나는 숫자다.
“나 비싼 몸이에요. 이것도 싸게 후려쳐준 건데. 4억에 한번 해주겠다고 하면 줄 설 인간들이 한둘일 것 같아?”
그야 그렇겠지만…, 그래도 고작 엊그제 1cp에 강매를 당했던 입장에선 몹시 받아들이기 힘든 숫자였다.
“저, 어, 엊그젠….”
“그땐 내가 팔고 싶어서 판 거고. 지금은 내기잖아.”
그 내기, 절대 하고 싶지 않다.
“왜, 자신 없어요? 나 게이라며.”
“그런 얘긴 안 했….”
“했잖아, 전에.”
그가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체액도 체열도 안 통하는데 여자 상대로 게이가 반응하면 안 되지.”
“…저.”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보려던 에라블의 자기 손이 멋대로 움직이자 몹시 당황했다. 그는 턱을 치켜들고 한숨을 내쉬었고, 에라블은 더욱 당황했다.
“자, 잠깐… 데, 데제 저, 제가 이런 게….”
손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기, 내기 싫다더니 되게 적극적이네요?”
에라블은 눈을 돌려 그와 이어진 제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검은 타르가 늘어져 제 그림자에 닿아있었다. 마치 인형을 조종하는 실처럼.
“제, 제가 그런 게-!!”
“하-….”
남자의 미려한 턱이 넘어간 채 파들파들 떨렸다.
에라블은 목 뒤가 선득했다.
“너무 심하게 하진 말아요….”
그가 고개를 떨어트리며 물기 어린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렇게 보면 나 또…, 아-….”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눈가를 마주한 에라블의 몸이 덜덜 떨리는데, 데제는 붉어진 입술로 신음하며 도리어 에라블을 탓했다.
“아-!!”
에라블은 곧 몸을 뒤로 젖힌 채 바들바들 떨게 되었다. 눈은 커다랗게 확장되고 등줄기는 뻣뻣하게 굳었다.
그가 힘줄이 선 손아귀로 시트를 움켜쥐었다.
“자기야, 제발….”
에라블은 진짜 죽고 싶어졌다.
“응, 이래도 내가 게이에요?”
“그, 그런 말은 진짜 안 했….”
“응?”
그녀는 무릎으로 시트를 비벼대며 잘못했다고 빌었다.
“해, 했습니다, 했습니다-….”
하지만 억울했다.
파편은 언젠가 벌어진 것, 혹은 언젠가 반드시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황자가 중요했던 시간선도 반드시 존재한다는 뜻이다.
“자기 속 편하려고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하, 하지만….”
“만에 하나 내가 황자를 상대로 어떤 감정을 품는다고 해도, 그게 정말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맞을 거라고 생각해? 그게 가능해?”
“…….”
“날 이 꼴로 만든 인간에게 어떤 긍정적인 감정을 갖는다는 게?”
물론 그가 겪은 일과 비교가 안 되긴 하겠지만, 나쁜 기억이 있다고 좋은 감정이 생기지 말란 법은 없었다.
나만 해도 인식표 4년에 내기에 걸리고 미끼로 던져지고 아주 개판이었는데도 생겼다.
“그리고 게이라는 게 심리적인 문제는 아니잖아? 다분히 육체적인 거지.”
그가 몸을 이죽거리며 이죽거렸다.
“잘 쳐줘 봐야 양성애자인데, 당신은 선 긋고 도망쳐 버렸지.”
에라블은 숨도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타버린 재처럼 새카맣던 그의 두 팔, 매일 같이 먹고 있는 그의 피처럼 검붉은 알약, 다 잃어버린 그의 기억.
그때는 그게 낫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에 와서 말하지만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알아? 당신 앞에 두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데 당신은 나더러 게이라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데, 제. 대, 대화는 이것 좀….”
“응?”
괜히 말 걸었다가 에라블은 다시 입만 벌리고 침을 뚝뚝 떨어트리는 신세가 됐다.
그가 뒷머리를 감싸고 제게 내려 혀끝으로 떨어지는 타액을 핥으며 웃어댔다.
그러다 축 늘어진 에라블의 동그란 이마에 그가 쪽쪽, 입을 눌렀다.
그의 목덜미에 닿는 숨이 따끈했다.
그는 에라블의 머리를 손아귀에 쥐고 살살 여기저기 입을 맞춰대다가,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놀란 에라블이 움찔해서 데제는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가만히 있어.”
그리고 이어진 말에 에라블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이미 내기 빚 28억 cp나 쌓였는데, 더하고 싶으면 움직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