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나는 당신이 몰랐으면 하는 일이 아주 많거든.”
“…….”
“근데 또 여기까지 왔는데 아주 말을 안 하는 것도 웃기고, 당신도 어설프게 알고 있는 것보단 내가 직접 말해주는 게 낫겠다 싶기도 하고. 우린 곧 가족이 될 사이니까.”
그 말에 약간 넋이 나가 있던 에라블이 움찔했다.
“뭐야, 그 반응은?”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왜, 먹고 버리게? 위자료 때문에 힘들 텐데?”
“아닙니다.”
“뭐, 하긴. 가족이라고 서로 다 받아 주는 건 아니지.”
그는 눈치 빠르게 반쯤 열린 서랍 안에서 에라블이 보던 것을 꺼내 손에 내려놔 주었다.
은제 팬던트였다.
후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아귀가 조금 어긋나 있었지만 팬던트는 놀랄 정도로 쉽게 열렸다. 그리고 혹시나 하고 예상했던 것이 있었다.
“…….”
12세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금발의 후작 부인, 그 곁에 인자한 얼굴로 서 있는 소년과 꼭 닮은 검은 머리칼의 후작.
후작가 현관에 걸린 채, 방문객에게 관람이 강제되던 바로 그 초상화였다.
“…데제, 정말 자연미인이셨네요.”
에라블은 팬던트 속 아이보다 훌쩍 자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응? 무슨 그런 말을 울면서 해요.”
데제는 자기가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엉켜 드는 생각에 에라블은 꾹 눈을 감았다 떴다.
“후작 부부는….”
“날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죠.”
그건 인정하지 않았다기보단, 부정에 더 가까워 보였다.
“친자 확인도 불일치로 나왔고. 하지만 그들도 나도 알고 있었어요. 내가 그들의 친아들이라는 것.”
그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에라블 버밀리언의 표정을 허기진 듯 샅샅이 살폈다.
“한동안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부모 탓만 할 나이는 아니니까.”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최상위 신격에서 신성을 분리해 내려는 그 실험은 아주 성공적으로, 물질화된 신성과 신도 인간도 아닌 그만을 남겨 놓았다.
그가 늘어놓은 말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거짓말은 그것에 상처받았단 헛소리뿐이다. 에라블의 작게 흔들리는 눈을 보니 잘했다 싶어졌다.
귀여워라…. 괴수로 태어나 쭉 가해자로 살아왔단 쪽을 더 편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애인 때문에 데제는 불쌍한 척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기는 날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팬던트를 쥐고 있는 손을 돌려 따뜻한 손목에 입술을 눌렀다.
에라블이 숙인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었다.
“…또 울어?”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수습해보겠습니다.”
말소리만 들어선 전혀 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데제는 에라블의 가는 등허리를 품에 당겨 안았다.
“…….”
에라블이 두 팔로 그를 꽉 끌어안았다.
“자기야.”
“…예.”
“이럼 나 흥분하는데.”
“…….”
에라블은 슬그머니 떨어졌다. 그는 불만스럽게 동그란 어깨를 깨물고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어젯밤에 소원 들어준다고 했던 거나 얘기해봐요.”
“예?”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소원 들어주겠다고 했었잖아요.”
전혀 기억도 안 나는 얼굴이었다.
“그럼 나 좋아한다고, 다른 사람 쳐다보면 죽여버리겠다고 매달렸던 것도 다 기억 안 나요?”
“제, 제가 말이십니까?”
“나만 진심인 줄 알고 좋아했네? 진짜 다 거짓말이었어요?”
“아, 아니….”
데제는 키득거리며 작게 경련까지 하는 눈가에 또 입술을 눌렀다.
“얼른 소원이나 말해봐요.”
그의 장난에 한숨을 내쉬는 얼굴에 연신 입술을 맞추며, 그는 직접 예시를 골라줬다. 대체로 금품, 혹은 자기 몸과 관련된 예시였다.
“내 목에 스트랩 걸고 산책 같은 거 해보고 싶지 않아요?”
“제게 시간을 300년만 주시면, 그런 취향에 최대한 맞출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는 히죽 웃었다.
300년 금방일 텐데, 그는 별로 그런 취향은 아니었지만 에라블이 그를 갖고 놀며 안절부절못하는 건 꼭 보고 싶었다.
어쨌든 이런저런 예시를 들면서도 그는 에라블이 안전 퇴직을 말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내내 그렇게 하고 싶어 했으니까. 그리고 역시 해고보단 사직이 나을 테고.
“말해봐요, 뭐든 들어줄게요.”
“그럼 제가 하그 대위님한테 받아야 할 돈이 있….”
“응?”
살살 목덜미에 입술을 누르며 지분거리던 데제가, 눈을 굴려 에라블과 시선을 맞췄다.
“여기서 다른 남자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예? 다른 남자가 아니라 돈….”
“돈은 내가 준다고 했잖아. 왜, 내 돈은 싫어? 아, 싫어서 맨날 귀금속이나 사면서 땅에 파묻는 거였구나? 내가 그걸 몰랐네?”
“좋아합니다. 지, 진짜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가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좋아한다면서 왜 도망가요?”
“도망이 아니라 잠깐 저쪽에 볼 일이…, 헉!”
허리를 잡아 제 쪽으로 주르륵 당겼다. 삽시간에 어둑하게 주변을 삼키는 그림자에 에라블이 작게 신음했다.
“데제, 저 진짜 허리 아픕니다….”
“안 아프게 내가 잘해볼게요.”
그는 혀를 내어 느리게 제 입술을 핥으며 빈틈없이 그림자를 닫아 버렸다.
* * *
그날 오후 늦게서야 그녀는 허리를 두들기며 중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데제는 정리할 게 있다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아무래도 연구소를 정리하시는 것 같았다.
‘…….’
원작이 단편적인 건 알고 있었다. 다 맞춰졌을 때 그림이 썩 아름답진 않을 거란 사실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표정이 왜 그 모양이냐?”
그렇게 말하는 중대장 표정도 썩 편친 않아 보였다. 한 3일 골방에 넣어놓고 푹푹 썩힌 청국장 같다.
중대장에 묶은 감정이 남은 에라블은 그에 관해 매사 부정적이었지만, 오늘만은 조금 예외였다.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중대장의 호출을 받았고, 마침 할 얘기가 있었던 차에 기쁘게 달려왔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그래도 사람 된 도리로 안부부터 물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땐 피를 쏟고 난리였기 때문에 에라블은 중대장의 콧구멍을 집중적으로 살피며 물었다.
“뭐, 그럭저럭.”
“혹시 지병 같은 게 있으시면 제가 조금 떨어져 있겠습니다.”
“…….”
둘은 잠시 서로를 빤히 쳐다 보았다.
“너 이제 내가 편하지?”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혹시 내가 예전에 심부름 좀 시켰다고 마음에 뭐 쌓여 있고 그런 건 아니지?”
“그것도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아니.”
그는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담배 한 가치를 입에 물고는 라이터를 만지작대며 불도 붙이지 않고 필터만 잘근잘근 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약간 정서불안처럼 보였다.
“…나는 놈이 싫어.”
그렇게 몇 번 한숨 끝에 갑자기 고백이 시작됐다.
“그냥 숨 쉬고 살아있단 생각만 해도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거든.”
주어가 없는데, 있다.
“사단장님 직통 번호 있는데, 전화 걸어 드릴까요? 직접 말씀하십시요.”
“넌 그러지 말라고.”
에라블은 호떡 뒤집듯 말을 바꾸는 중대장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냥, 그러지 말아 달라고.”
그는 진심인 듯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넌…, 물론 어려운 건 알지만. 그래도 너만은 그 개자식을 좀 불쌍하게 여겨달라는 뜻이야.”
“중대장님.”
“놈은 널 위해 정말 많이…, 아니, 어쨌든 부탁한다.”
“저 고백했습니다.”
필터를 잘근잘근 씹으며 줄줄 말을 늘어놓던 그가 멈칫 굳었다.
“뭘 해?”
“고백요. 좋아한다고.”
“…너도 어지간히 머리가 돌아있구나.”
한참 입을 뻐끔대던 중대장은 사람 면전에 대고 잘도 말했다.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도 드릴 말씀이 좀 있습니다.”
“뭔데?”
“두 가진데, 일단 전에 말씀하셨던 돈부터 지급해주십시요.”
“돈? 무슨 돈?”
케이는 전혀 모른단 얼굴이었다.
“전에 그러셨잖습니까. 주제 파악하라고. 연구소 안에 들어가서 똑바로 서 있기만 해도 2만 cp 주시겠다고요. 초당 2만 cp. 저 녹음본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워낙 이벤트가 많은 인생을 살고 있어서 평소 대화 내용 대부분을 녹음해 두고 있었다.
“하, 내가 언제 그런 말을….”
[…주제 파악을 좀 해. 니가 그놈 적합자라고 진짜 뭐라도 된 것 같아? 거기 들어가서 뭘 찾아? 하, 똑바로 서 있기만 해도 내가 너한테 2만 cp를 주마. 초당 2만 cp, 어때? 어? 진짜 들어가….]
하는 수 없이 에라블은 중대장 호출을 받자마자 미리 찾아두었던 녹음본을 틀었다.
“제가 어제 15시 34분에 들어가서 오늘 13시 07분까지 있었으니까, 정확히 77,580초입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주셔야 할 돈이 15억….”
신은 입 밖에 내뱉은 약속을 어길 수 없는 존재였다. 특히 이런 식으로 정확하게 조건부 보상이 내걸린 약속은 어길 수가 없다.
그는 내게, 내 후손도 아닌 바로 내게 15억 cp를 줘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