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자기야, 우리 그러지 말고….”
카밀이 말을 하다 말고 희게 질려 입을 다물었다. 에라블도 입을 다물었다. 등 뒤에서부터 어둑한 그림자가 우글거리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주변 기온이 뚝 떨어진 듯 싸늘했다.
에라블은 마른침을 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
그가 문가에 삐딱하게 기대서서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자기?”
* * *
“여기 왜 왔어요? 진짜 바람 피려고?”
나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왜인지 또 데리러 나온 그가 삐딱하게 물었다.
“아니라더니, 툭하면 울고 나 불편해하던 이유가 진짜 바람이었어?”
에라블은 뒷짐 자세로 그의 시선과 시비를 견뎠다.
주말이라 그런지 부대 의무실을 찾는 사람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니, 다행이 아닌가. 조용히 살해당하기 딱 좋은….
“소위님! 오늘도 같이 달리셔야죠? 오늘 클럽 물 좋다고…!”
벌컥, 문이 열리고 해맑게 소리치던 소대원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진짜 왜 꼭… 엎치면 덮치는 건지 모르겠다.
“여, 여기 계시다고….”
누구랑 같이 계신지는 못 들었나 보다. 그렇지, 엿은 나눠 먹는 게 제맛이고 혼자는 못 죽는 게 국룰이지.
그렇다고 다 같이 죽을 필욘 없을 텐데…. 슬프게 눈꼬릴 늘어트리고 피해자를 바라보던 에라블은 파르르 떨었다.
“클럽?”
그가 웃음기 어린 싸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자기, 위자료 감당돼?”
* * *
당연히 데제가 설정해 놓은 위자료는 감당이 안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도 감당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룸도 아니고 클럽 홀에서, 에라블은 데제의 옆구리에 붙어 앉아있어야 했다.
그렇게 앉아있다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마지아랑 눈도 마주쳤다.
마지아는 여자들 사이에서 헐벗고 앉아 이쪽을 노려보며 씩씩대고 있었다. 애가 완전히 엇나가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
“쟤도? 대체 몇 명이랑 바람을 핀 거야?”
그가 안은 어깨를 당기며 물었다.
“사단장님, 저는 결코 바람을 피지 않았습….”
“계약서 안 읽어봤어요?”
“…읽어봤습니다.”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계약서를 확대 해석하면 바람일 수도 있었다…. 슬픈 얼굴로 그의 옆구리에 붙여진 채 에라블은 벌써 두 병째 술을 마시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뒤로 넘긴 데제의 머리칼이 이마 위로 몇 가닥 떨어졌다. 웃느라 꼬리가 올라간 입술에 병 입구가 붙었다가 떨어졌다.
“한 병 줄까요, 되게 야해지는 기분인데.”
이 시끄러운 와중에도 속닥이는 소리가 뇌를 핥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제, 제대로 된 술이 아닙니다. 홀에서 파는 건 보통 안에 뭘 타서….”
“잘 아네요?”
“…….”
에라블은 슬그머니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려 그가 보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폴 타는 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지난번 마지아가 말한 그 쇼인 듯했다.
늘씬한 미녀는 입은 옷을 하나씩 벗더니 폴을 잡을 때쯤 거의 전라가 되어 있었다.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속옷 끈에 끼워진 지폐가 음란하게 피부에 스쳤다.
한동안 그러다가 고액의 지폐를 흔드는 남자와 몇 마디 속닥거리곤 폴에서 내려와 남자에게 안겼다. 직업인이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유심히 보던 데제가 술병을 들고 일어섰다는 것이다. 에라블은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눈웃음을 흘리며 느릿하게 폴을 잡았다.
에라블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술병을 내려놓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벨트가 풀린다.
에라블은 그게 침대 위에서의 움직임과 비슷하단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행히 그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사람들은 제 옆 사람과 엉키기 시작했다. 다들 정신이 터진 것처럼 옆 사람과 엉겨 붙기 시작했다.
더 이상 홀 안엔 술을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춤을 추거나 음악을 체크 하는 사람도, 서빙을 하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서로 뒤엉켜 들었다. 마지아 역시 붙어있던 언니들과 동시에 얽혀들었다.
웅웅, 몽롱한 정신에 귀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바지 단추를 풀고 폴에 기대 다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눈을 뗄 수가 없다.
그의 시선이 거미줄처럼 엉겨 붙어서…, 에라블은 제게 손을 뻗던 옆 사람의 팔이 잘려 나간 것만 느리게 인지했다.
새빨간 핏방울이 허공 중에 튀어 올랐다.
눈을 돌릴 새도 없이 다가온 그가 나른하게 내려다보며 팁을 요구했다.
“…재미 봤으면 팁을 줘야지.”
무릎 사이에 그녀를 가두고 소파에 기대선 채, 긴 손가락으로 여린 목덜미와 턱을 감싼다.
“얼마나 줄 거예요?”
낮은 웃음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그냥 나랑 할래요?”
에라블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내가 싸게 해줄게요.”
“…예?”
최근 할인 제안을 자주 받는다. 에라블은 혹시 그가 뭘 알고 이러는 것인지 불안해졌다.
“왜, 나 마음에 안 들어요? 내가 별로야?”
“아, 아니….”
“1cp 어때요. 거저 주는 거나 다름없지. 사주면 위자료도 깎아 줄 수 있고.”
“사, 사겠습니다!”
그가 웃으며 위층에 모텔 있다고 속닥거렸다.
에라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깨에 그의 팔이 얹혀진 채 클럽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알면 신경 쓰실 겁니다.》
데제는 에라블의 머리에 코를 묻으며 눈을 흘렸다.
《왜, 무시할 수도 있지.》
《알고 지낸 지 벌써 몇 년 된 인간입니다. 동생처럼 여기고 있고요.》
그는 마지아 올로르의 정신을 옆에 앉아있던 아무하고나 붙여 버렸다.
《서로 좋아진 걸 수도 있지.》
데제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위층을 눌렀다.
《데제, 알아채실 겁니다.》
《…알아채도 무시한단 가능성은 전혀 없어?》
아, 물론 없겠지. 그는 따뜻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앓듯 신음했다.
《데려가서 다 치료해.》
누구 다쳐서 신경 쓸 일 없게, 그는 결국 퍼트렸던 그림자를 다시 다 끌어들이며 닫힘 버튼을 눌렀다.
* * *
케이는 우울했다.
행성 홀로그램을 띄워놓고 시커먼 그림자가 우글거리는 부분을 쳐다보며 무겁게 우울한 얼굴을 했다.
“피해 보상액은 바로 지급해드리겠습니다.”
올의 말에 케이는 헛웃음을 흘렸다.
“혹시 여기도 신역에 편입시킬 생각이야?”
“행성신이 계신데 그럴 순 없죠.”
“그거 거슬리니까 치워버리겠단 뜻은 아니지?”
“아직까진 아닙니다.”
“…씨X.”
올은 다른 개들과는 달리 농담을 잘 받아주지 않았다. 애초에 이것들과 농담을 하고 있단 사실 자체가 어이없지만….
뭐, 부딪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셀 수 없이 똑같은 삶을 함께 되풀이하면서 그와 개들은 묘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최근엔 적개심을 품는 것조차 지쳐 버렸다.
“…왜 하필 여기서.”
두통이 이는 이마를 누르다가, 아직도 회복이 덜 돼 덜덜 떨리는 팔을 보곤 다시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금제는 왜 걸어 놓은 거야?”
“생츄어리 때문에 잠깐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
험악하게 인상을 쓰던 케이는 쯧, 혀를 찼다.
“박살 내놓은 것 보고 대충 예상은 했는…, 아, 그랬는데도 생츄어리가 멸종을 피했단 말이지?”
사실 여러모로 낯선 상황들이었다. 낯설다는 감정 자체가 낯설어서 케이의 인상은 펴지질 않았다.
“균형이 잡혔습니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요. 1신위께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습니까.”
“…다시 모든 게 반복될 수도 있지.”
“그럴까요?”
케이는 올의 되물음에서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읽었다. 믿기 어렵다기보단 믿기 무서운 쪽에 더 가까워서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뭐, 그렇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건 없고요.”
그건 그렇지, 욕설을 짓씹으며 케이는 퉤, 침을 뱉었다. 그 꼴을 올이 빤히 쳐다보았다.
“1신위께서도 많이 변하셨습니다. 전엔 꽤나 고아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씨X, 언제적 얘기를. 변하지 않는 니들이 이상한 거지.”
싸구려 담배를 빼물며 그는 우거지상을 썼다. 돗대였다. 팔 다쳐서 사러 나가기도 힘든데.
“저희도 많이 지쳐있습니다.”
“그래봐야 주인이 가리키면 또 그 방향으로 짖어대겠지.”
“본성입니다.”
“그놈의 본성은…, 수만 년쯤 지났으면 진화를 해도 열두 번은 더 했겠구만.”
“수십 년이기도 하니까요.”
케이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버밀리언은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던데. 라이프 베슬은 대체 어디다 만들어 놓은 거야? 누굴 희생양 삼은 거냐고. 설마 2황자는 아니지?”
흑마법이 저어되는 이유가 있었다. 반드시 제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