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반품과 방생을 외치던 며칠 전 꿈이 떠올라서 더 짜증이 났다. 삐딱해지려는 심사를 누르며, 그는 대정령 안으로 들어갔다.
“…뭐가 많네?”
안에는 뭐라고 쉽게 말을 떼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요새 바빠서 정리를 못 했습니다.”
에라블도 뒤따라 들어오며 태연한 얼굴로 말했지만, 말하는 와중에도 손은 급하게 이것저것 치워대고 있었다.
이것저것…, 대정령의 뱃속은 정말 이것저것 쌓여 있는 물건들로 번잡했다.
더러운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구획이 정리되어 있긴 하지만… 왠지 무단 투기된 것처럼 보이는 쓰레기봉투들, 방치된 채 쌓여 있는 오래된 물건들, 거기에 웬 낡은 캠핑카까지.
데제는 그 이것저것을 다 손으로 건드려봤다.
“내가 전에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어요?”
“없으십니다.”
“그땐 이 정도는 아니었나 봐요?”
“예, 그렇습니다.”
얼굴은 희게 굳어선 대답은 잘한다.
“근데 지금은 왜?”
“여기 또 들어오실 거라고 제가 미처 생각을 못 해서….”
“왜, 이제 아무 사이 아니니까?”
다 트집을 잡고 싶어졌다.
애초에 내부 이미지화부터 문제였다.
보통 대정령들이 구획형 창고로 내부가 이미지화되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물어보니 역시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 보통 정령계 소속은 자연적인 환경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그럼 영애는?”
“저는 선호하지 않고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덧붙이는 설명이 더 어이가 없다.
“흙바닥보단 이쪽이 더 관리하기도 쉽고 청소도 편합니다.”
“정령계 라이센스는 어떻게 발급받았어요?”
다 들춰보던 그는 이번엔 캠핑카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에라블이 이번에도 뒤를 쫓으며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지, 지원자가 없었습니다.”
“아.”
안에 뭘 숨기기라도 한 건지, 데제는 당황한 얼굴을 보며 즐거워했다. 몰래 자기 뒤통수칠 것들을 숨겨놨으면 좋겠단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뒤통수를 바란 건 아니었다.
“…제임스?”
그 외도 뭐가 많지만, 3분의 1은 제임스 크라운이었다. 곱슬 진 블론드에 새파란 눈, 성당 벽화에 아기 천사쯤으로 박제돼 있으면 딱 어울릴만한 선량한 얼굴이다. 인공적인 시술의 흔적만 다 지운다면.
“뭐에요?”
얼어 있는 여자를 보며 물으니 버튼을 누른 것처럼 대답이 튀어나왔다.
“취미생활입니다.”
“아, 취미. 주로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고 하지 않았어요?”
“예, 그렇습니다.”
바로 그거라는 듯 에라블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주로 제임스를 보는 거 아닌가?”
“연기를 잘합니다.”
“아, 그래요?”
그는 박스에 DVD 케이스를 다시 던져 넣으며 픽 웃었다.
“되게 잘하나 보네. 똑같은 타이틀을 세 개씩이나 가지고 있는 걸 보니. 왜 세 개에요? 막 보관용, 감상용, 비상용 뭐 이런 건 아니지?”
“그…, 그런 게 맞습니다.”
멍하니 대답하는 에라블을 보며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에라블도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고 있었다. 살짝 어떻게 아냐는 듯 의문 어린 얼굴에 그는 또 실소했다.
“영애, 사람이 되게 뻔한 구석이 있네요?”
벨트를 풀며 다가가던 그가 멈춰 섰다. 에라블 뱃속에서 꼬르륵대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뭐, 일단 밥부터 먹죠.”
그리고 안심한 에라블의 귓가에 대고 속닥거렸다.
“먹고, 오늘은 하루 종일 집 밖에 못 나갈 줄 알아.”
* * *
손바닥만 한 캠핑카 안에도 그 자신의 흔적이 빼곡했다.
촉수가 얽어 쥐고 지나간 흔적, 발작적인 감정이 마치 눈에 보이는 듯했다. 지금 여자의 몸이 그런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를 두 손으로 모조리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
그는 이제 그게 부족하게 느껴졌다.
“취미생활은 무슨.”
짜증 나네. 하루 종일 둘이 침대에 있으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하필 에라블의 주에 한 번 있는 검진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냉큼 도망치듯 의무실에 갔고, 혼자 남은 데제는 식탁에 기대서서 담배를 문 채 TV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주인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올은 조금 고통스러웠다.
주인의 감정 기복은 대부분 에라블 버밀리언이 문제였는데 기억을 잃은 최근엔 더욱 극단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후작이 피해 보상액으로 개인 소유 중이던 암석형 행성 두 개를 제안했습니다. 표면적의 98%가 귀금속으로 크기는 중소형이지만 개발 가치는 충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보관하고 하나는 팔던지 돈으로 받아오든지 해. 적당한 대양 위주의 행성도 하나 알아보고. 제도에서 떨어진 곳으로.”
데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정령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던데. 감정 교류 수준이 낮아서 잘 모르고 있는 모양이야. 난 왜 이런 여자한테 푹 빠진 거야.”
“알고도 무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입에 문 담배를 잘근잘근 씹으며,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 개를 쳐다보았다.
“왜?”
“아무래도 바쁘면 항상 그런 식으로 대충….”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고. 왜, 관심 있어?”
아, 그 왜가 또 그 왜였군, 올은 고개를 내저으며 예전 아리에스 흉내를 냈다.
“저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년 됐고, 서로 진지하게 만나고 있습니다.”
그랬는데도 의심스럽게 보던 데제가 TV를 꺼버리고 뺀 타이틀을 박스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연기를 잘하긴.”
발로 박스를 대정령에 밀어 넣고 같이 꺼냈던 다른 박스도 차례로 다 열어 보았다. 스토커 같은 짓이었지만 말릴 사람은 없었다.
박스는 다 비슷비슷했다. 연예인, 또 새로운 연예인, 또, 또 새로운 연예인.
데제의 미간에 선이 그어졌다. 그나마 맨 아래 있는 것만 조금 가볍다. 그래봤자 어차피 이것도 뻔하겠지 하고 뚜껑을 열었다가 멈칫했다.
“…….”
그 상자 안에는 온갖 팸플릿에 쓸모없어 보이는 자잘한 기념품, 엽서 묶음. 그리고 몇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들어 있었다.
얼음 호수, 목장, 대관람차, 사막, 숲….
함께 웃고, 뭔가를 먹고, 뭔가를 보고…, 아주 여러 가지였다.
“…….”
데제는 그것을 꺼내 천천히 넘겨보았다.
그는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다른 건 다 남기고 딱 에라블에 대한 기록만.
모든 게 다 있는데 에라블에 관한 기록만 없다.
단둘이 함께 했던 시간, 그것에 관한 그 어떤 것도 남겨 두지 않았다.
마치 그것만은 자기 것이라는 듯 다 가지고 가버렸다.
그게 못 견디게 짜증이 났는데, 여기 그녀의 손에 남은 게 있었다.
* * *
“어휴.”
추워, 에라블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어깨를 움츠리고 걸었다.
오늘이 검진 날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에라블은 다시 한숨을 뱉어냈다. 머릿속이 아주 복잡했다.
“…….”
그렇게 걷다 말고 아무 곳에나 주저앉아 또 한숨을 내뱉었다.
“연기를 잘합니다.”
“천제네. 스무 살 밖에 안 된 어린애가.”
아니, 진짜… 그녀는 웅크리고 무릎에 이마를 박았다.
좋지 않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는 건 진짜 좋지 않았다.
“스무 살은 너무 어리지 않아요?”
다행히 스무 살은 아니다. 제임스도 이제 나이를 먹어 정말 다행이었다.
흡-, 에라블은 코를 훌쩍였다.
“…후.”
진짜 팔자도 좋지, 옛날 생각 하면서 질질 짜기나 하고… 나 진짜 뭐하냐.
“정신 좀 차리자.”
중얼거리면서도 계속 무릎에 코를 박고 있던 에라블은 한참 만에야 일어나 의무실로 들어갔다.
중대는 몰라도 개들은 분명히 난리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난리가 나긴 했는데.
“자기야, 오늘도 갈 거지? 응? 애들이 같이 가자고 난리더라.”
클럽에 가자고 난리였다.
카밀은 그가 와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는 듯했다.
“전엔 왜 왔냐고 난리시더니….”
별일 없자 생각이 바뀐 모양이었다. 별일은 자기만 없었지, 난 있었는데.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한 번 마셔보자. 너 그때 술만 말아주다가 그냥 갔잖아. 이번엔 내가 제대로 해준다.”
검진받으러 왔더니 의사가 폭탄주를 권하고 있었다.
“저, 중위님.”
“내가 진짜 제대로….”
“저 노이즈 상태가 조금 이상합니다.”
“뭐?”
놀란 카밀이 차트를 다시 살폈다.
“왜? 정상인데?”
에라블은 그녀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다른 사람의 노이즈를 대신 가져가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묻고는 싶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검사 좀 다시 해보자.”
차트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는지 카밀이 초조해했다.
에라블은 불안했다.
그가 또 뭘 감당하고 있는 건지. 알아야 했지만 회수식 이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몰린시에서 터졌던 웨이브 이후 개들은 그녀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준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