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평소에는 뭐 하고 보내요?”
“보통 야근하고 있습니다. 가끔 철야도 하고….”
생각 없이 대답하다가 그녀는 움찔했다. 그가 갸름한 손에 턱을 괴고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취미생활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른 덧붙였다.
“취미? 뭐 하는데요?”
“주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도 잘못된 대답이었지만, 다행히 다른 화제가 이어졌다.
“또 다른 건 좋아하는 거 없어요?”
하마터면 피스티스라고 대답할뻔했지만, 과자를 입에 밀어 넣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얼버무릴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천천히 맥주 캔을 비우는 동안 둘은 소소한 이야기들을 했다. 그는 천천히 마셨고, 에라블도 그 속도에 맞췄다.
* * *
“하아, 하아….”
고작 맥주 한 캔 마시고 취하기라도 한 건지. 정신 차리고 보니 침대에 누워 아연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숨을 헐떡대고 있었다.
조명을 등진 그는 무릎으로 체중을 지탱한 채 셔츠를 벗고 바지 버클을 푸르고 있었다.
작은 침대가 부서질 듯 삐그덕거렸다.
에라블은 도저히 싫어하는 척도 할 수가 없었다. 그야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잠시였다.
도저히 그의 체력을 버텨낼 수가 없었고, 에라블은 결국 또 잘못했다고 빌어대기 시작했다.
데제는 지그시 몸을 붙은 채 조금 웃어댔다.
“이상한 말버릇이 있네요?”
“…자, 잘못….”
그는 또 천천히 움직이며 시트를 움켜쥐느라 벌겋게 된 손에 입을 맞췄다.
“하긴 이건 당신 잘못이 맞긴 해요. 노이즈 엄청 쌓였다니까.”
“…예?”
이번에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던 그녀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슬금슬금 기어 도망치려고 들었다.
귀여울 정도로 하찮은 움직임에 데제는 살살 엉덩이를 토닥여주었다.
“전에 내가 경고한 적 없어요? 도망치면 안 된다고. 누르다 척추를 부러트려 놓게 될 수 있어요.”
물론 내가 다 데미지를 입겠지만,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실에 기분 나빠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아, 안 도망…, 저, 자, 잠깐 저기에 뭐가 있는 것 같….”
“응? 뭐가 있는데.”
“흑….”
키득거리며 엎드린 몸에 체중을 눌렀다. 에라블은 껌벅이지도 못하고 잇는 눈에서 뚝뚝 눈물을 떨어트렸다.
“…몸이 녹을 것 같아.”
그는 낮게 숨을 뱉어냈다.
“하-….”
등을 내보이며 엎드린 작은 몸을 내려다보는 동공은 세로로 수축하고, 숨에선 매캐한 연기가 흩어졌다.
그의 피부 속에서 검은 비늘 같은 것이 타고 오르며 색을 비췄다가 거짓말처럼 또 흩어졌다.
“흡, 흡….”
가만히 다시 몸을 돌려 저를 보게 했는데도, 에라블은 숨 쉬느라 여념이 없어 이 모습에 관심도 없는 듯했다.
자신이 누구 머리 위에 앉아있는지 알기는 할까. 그 누가 뭔지는 알고 있을까.
영영 몰랐으면 좋겠다.
그는 에라블의 순한 얼굴을 혀로 길게 핥았다.
“영애, 내 몸이 영애의 것이라면 어떨 것 같아요?”
그녀의 눈이 마침내 그를 향하며 초점이 잡혔다.
“…예?”
“내 몸이 영애의 것이라면, 영애가 내 주인이라면 어떨 것 같아.”
달아올랐던 얼굴이 순식간에 식었다. 덜덜 떨며 간신히 떼진 입에서 정신없이 흐린 말소리가 샜다.
“반품….”
“…응?”
유심히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데제가 확 인상을 썼다.
“바…, 반….”
“내가 잘못 산 물건이에요?”
놀란 에라블이 흐느끼며 말을 바꿨다.
“바… 방생….”
“아, 유기하겠다고?”
“포기! 양도! 잘못했습니다!”
“…….”
데제는 패닉에 빠진 듯 희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며 또 앞으로 기어 도망가려는 여자를 몸으로 꽉 눌렀다.
하지만 그녀는 그 상태로도 계속 기려고 들었다. 그러면서 권리 포기에 관한 온갖 단어들을 다 주워 삼키는 것이다.
“영애,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데제는 일단 살살 달랬다.
제일 예쁜 얼굴로, 예쁜 표정을 하고 살살 달랬다. 그걸 대체 무슨 뜻으로 알아들은 건지 더 하얗게 질린다. 달아올랐던 몸까지 순식간에 열이 빠졌다.
데제는 자꾸 기어 도망가려는 여자를 잡아 저를 보게 했다. 살려달라는 말과 잘못했다는 말을 고장 난 라디오처럼 되풀이 해대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온갖 곳에 입을 맞췄다.
“아니, 내가 영애를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응? 나 봐요. 영애가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다는 뜻이라니까?”
지금 같아선 계속 아니어도 뭐든 다 해줄 것 같지만.
“그, 그렇다면 포기…!”
“빼고.”
다시 눈에 억울함이 번진다. 그리곤 숨도 제대로 못 쉬더니 말은 빠르게 쏟아냈다.
“그럼 모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싶습니다…!”
“응? 똑똑하네요.”
웃으며 다시 여기저기 입을 맞췄다. 축축한 입술엔 조금 더 길게. 꾹 다물린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사, 살려주세요….”
숨을 세게 헐떡이며 오열할 기세라 데제는 말을 붙였다.
“진정해요. 그냥 해본 소리였어.”
에라블이 눈을 느리게 껌벅였다. 진짜냐고 써 붙인 듯한 얼굴에 데제는 웃으며 다시 대답했다.
“진짜예요.”
에라블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약간 넋이 나간 얼굴로 에라블은 조잘거렸다.
“저, 저는 정말 그런 무서운 상황은 겪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그런 무서운 상황은… 절대, 절대 안 겪고 싶습니다…. 진짜 절대로요….”
“…응, 이건 이것대로 왠지 열받네요.”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간절한 에라블의 얼굴을 보며 몸을 지그시 눌렀다.
* * *
“포기!”
“방생….”
사슬은 여자의 손목에서부터 이어져 그의 온몸을 칭칭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한동안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사슬을 벗겨내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꿈은 무의식의 영역이었다.
의식은 잠들어 있고, 욕망은 그 본인도 마주보기 싫을 정도로 적나라해진다. 그런데….
“바, 방생-!”
“포기!!”
문장으로 말하는 법도 잊었는지 또 비슷한 온갖 단어만 던져대고 있었다.
당기다가 상처가 날 기세라 데제는 얼른 에라블을 안아 들었다.
“반품!!”
“반품!”
그는 버둥거리며 그 와중에도 사슬을 당겨대는 꼴에 미간을 구겼다.
“한 번 샀으면 끝이지 반품이 어딨어요, 손님.”
“바, 반품은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
그 말을 하는데 뭔가 캥기는 게 있는지 찔리는 얼굴이다. 어디서 장사라도 하고 다닌 건지.
“단순 변심은 1주일 이내 시죠. 구입한 지 2년은 다 되어 가는 물건을 반품해 달라고 하시면 어떡해요.”
“방생-!!”
“유기겠지. 책임감 무슨 일이야. 영애, 버려진 동물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어, 어떻….”
에라블이 겁먹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뭘 어떻게야. 다 죽는 거지.”
* * *
“으….”
에라블은 끙끙거리며, 띠띠-, 손을 더듬어 울리는 알람을 찾는데 커다란 손이 대신 탁 알람을 껐다.
동시에 끌어안고 귓가를 진득하게 핥는다. 바들거리는 귓불도 깨물렸다.
“주말이에요.”
그가 긴장한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꼭 끌어안았다.
“흐윽….”
두꺼운 팔로 휘감아 말랑한 몸통을 끌어당기면서.
“더 자요.”
더 자라는 말은 문제가 있다. 애초에 잠을 잔 건지 말은 건지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으흑-”
그리고 지금도, 계속, 계속….
몸이 뜨거웠다. 벌써 며칠째 그는 이 숙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며칠 전 무슨 꿈을 꿨는지 짜증이 난 그가 유기 동물과 책임감에 대해 한바탕 설교하곤 자기 짐을 숙소에 다 들여놓았다.
“흑-….”
자라고 하시더니…. 그가 슬쩍 몸을 굴려 엎드린 몸을 눌러댔다. 에라블이 힘없이 흐느꼈다.
그는 토닥토닥 달래고 둥근 어깨에 입을 맞췄다. 움직임을 멈췄단 뜻은 아니었다.
“괜찮아….”
한쪽 팔에 체중을 지탱한 채 남은 손으로 살살 엉덩이를 토닥이며, 그의 입에서도 곧 낮게 신음이 샜다.
그러다 마침내 기절하듯 잠든 에라블을 몇 시간 더 재우고 그는 그녀를 욕실로 안고 가 깨끗이 씻겨 놓았다.
점심에 가까운 늦은 아침이었다.
새 옷을 입히고 새 이불에 돌돌 말아 에라블을 좀 더 재우는 동안, 그도 욕실에서 몸을 씻고 나왔다.
나와보니 에라블이 자는 대신 침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제 대정령을 불러 젖은 시트를 꾸역꾸역 쑤셔 넣고 있는 모습을, 욕실 문가에 서서 빤히 쳐다보았다.
“…….”
눈이 마주친 에라블도 뭔가 이상하단 건 아는지 넣다 말고 움찔 굳었다.
“뭐 하고 있어요?”
“정리하고 있습….”
“잠깐 비켜봐요.”
말하기 무섭게 에라블은 그가 다가서는 반대 방향으로 냉큼 물러났다. 며칠을 함께 지내고도 정말이지 그녀의 태도는 달라진 게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