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그게 아브가니스 가와 관련된 건 아니었다. 후작부처는 그에 관한 태도를 아주 분명히 했었다.
그는 그들의 아이가 아니었고, 그들은 그의 가족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에 끝낸 합의였다.
수십 년을, 수백 수천 번 되풀이 하기 전에 끝낸 합의다.
들춰보는 것조차 그의 입장에선 새삼스러웠다.
그는 잃어버린 아이였으며, 버려진 아이였다.
사실을 알면 버밀리언 영애가 좀 불쌍히 여겨주려나.
드는 생각이라곤 고작해야 그런 것뿐이었다.
“…….”
후작의 동공이 느슨하게 풀렸다.
데제는 적당히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별로 보고 싶은 환상은 아닐 것이다. 부처가 사이좋게 가축의 일부분이 되어있는 환상을 보고 싶어 할 리는 없을 테니까.
정신 착란을 일으키기 전 데제는 적당한 선에서 끊어 주었다.
“피해 보상금이나 잘 지불하세요. 날 두 번 보고 싶지 않으면.”
이건 좀 별로네, 서류를 책상에 툭 던져 놓고 그는 몸을 돌렸다.
아마 두 번 볼 일은 없을 것이다.
* * *
같은 시각, 에라블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플랫폼을 완성했기 때문에 자기 일은 아니었고 남의 일을 대신 열심히 해주고 있었다.
못 하게 하면 빗자루 들고 복도라도 쓸고 다닐 기세였기 때문에 개들은 마지못해 일을 넘겨주었다.
“…저, 어.”
그렇게 남의 일을 내 일처럼 하고 있는 중에, 데제가 부관실로 찾아왔다.
6시 정각이었다.
같은 사무실을 사용 중이던 개들은 얼어붙었고, 데제는 슬렉스에 셔츠를 걸친 가벼운 차림으로 문가에 서서 빙글거리고 있었다.
귀에도 긴 드롭 이어링 대신 비슷한 문양의 넓은 타투가 검게 자리하고 있었다. 더는 옛 신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위압감에 목이 움츠러드는 건 똑같았다.
“어….”
얼어 있던 개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리곤 바닥에 머리를 붙이고 바짝 엎드렸다.
눈치를 살핀 에라블도 슬쩍 무릎을 구부리는데, 데제가 와서 가볍게 말을 걸었다.
“6시 퇴근 맞죠?”
“예, 맞습니다.”
“먹을 거나 사러 가죠. 숙소 냉장고 텅 비어 있던데.”
데제는 굉장히 밝은 얼굴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척수반사처럼 대답한 에라블은 그와 함께, 그가 끄는 평범한 suv를 타고 부대를 나섰다. 이건 또 언제….
아니, 41사단장이 왔단 사실이 알려지면 난리가 날 텐데. 아마, 자연재해를 맞닥뜨린 개미굴처럼 되겠지 싶지만. 아직 아무도 모르는 듯 부대는 평화로웠다.
이른 저녁, 주변은 아직 밝았다. 해 있을 때 밖에 나온 건 처음이어서 에라블은 조금 어색했다.
밤만 되면 소돔과 고모라가 되는 다운타운도 아직까진 멀쩡한 거리처럼 보였다.
그가 운전대에 손목을 걸치고 곁눈질로 가볍게 거리를 훑었다.
마트는 술집이 몰린 거리와는 다르게 벌써부터 조금씩 사람이 몰리고 있었다. 이 부대에 꽤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에라블은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부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 모양이었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부류와 퇴폐 문화에 빠져 사는 부류.
물론 그녀는 둘 다 아니었다. 그녀는 그냥 야근과 철야에 절여 사는 극소수에 속해 있었다.
“신체 2레벨이면 음식도 좀 가려 먹어야겠네요? 뭐, 좋아하는 거….”
캔맥주, 초콜릿이 듬뿍 섞인 시리얼, 인스턴트 박스를 주섬주섬 안아 들고 있던 에라블은 그와 눈이 마주치고 흠칫 굳었다.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그가 빤히 보다가 손을 뻗어 절반은 덜어냈다.
에라블은 조금 슬퍼졌다.
“단것 너무 먹으면 혈관에 안 좋습니다. 시력도 나빠지고. 술도 신체 해독 기능을 떨어트려서 안 좋고.”
대신 그는 조리가 필요한 식재료들을 잔뜩 샀다. 에라블은 카트에 든 깍지 콩, 스테이크용 소고기, 통마늘, 올리브유 등의 식재료를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
그리고 계산대에서 슬쩍 비켜서는 그 대신 지갑을 열었다.
“돈 없어요, 나.”
우주 제일 거부가 뻔뻔하게 말했다. 에라블은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계산을 하고 대봉투를 드는 그를 말려보았다.
“제가 미로에….”
“미로? 아, 그 대정령.”
되묻더니 그는 그대로 들고 차로 가버렸다.
사실 다행이었다.
미로를 열지 않아도 되어서.
숙소로 돌아온 그는 빠르게 물건을 정리했다. 그 모습이 너무 낯익어서 에라블은 또 입을 꾹 다물었다.
“식사해야죠?”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일하고 온 사람 부려 먹을 순 없지. 이런 건 집에서 놀고 있던 내가 할게요. 오늘 계산도 영애가 다 했는데.”
그는 무슨 약간 얹혀사는 기둥서방 얘기하듯 말하곤, 소스 병 라벨에 쓰인 간단한 레시피를 참고해 저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도 너무 익숙해서 더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 그럼 저는 잠깐 씻고 나오겠습니다.”
한계였다. 욕실로 들어온 에라블은 문을 꾹 닫고 기대섰다. 아른아른 맺히기 시작한 눈물이 기어이 콧잔등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 두 손에 꽉 얼굴을 파묻었다.
“어….”
그러다가 덜컥 열리는 문에 당황해 허둥거렸다. 그가 못 들어오게 말린다는 선택지가 없어서 급히 문에서 비켜서고 눈물을 닦아내며 아주 허둥거렸다.
그 꼴을 지켜보던 그가 한 손에 턱을 쥐고 물었다.
“왜 울어요.”
그의 손에까지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왜, 뭐가 그렇게 싫어서?”
“저, 저는….”
“응?”
에라블은 아주 흐려진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정신 차릴 새도 없이 턱이 쥐이고 입술이 눌렸다.
“그렇게 싫어?”
에라블은 입을 꾹 다물고 나오지 않는 말 대신 고개를 내저었다.
싫지 않다.
그게 문제였다.
“근데 왜 자꾸 울어.”
“모, 모르겠….”
사실은 알고 싶지 않다. 사실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
데제는 한참을 덜덜 떠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삼켰다.
이번엔 조금 가볍게 입술이 닿아왔다. 한 번, 두 번…, 그러던 입맞춤도 조금씩 깊어져 갔다.
에라블의 숨도 조금씩 뜨겁게 달뜨기 시작했다. 제 입술을 깨무는 그의 입술을 조금 물고,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동시에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을 느꼈다. 도저히 마주 보기가 어려워 두 눈은 질끈 감고 말았다.
입맞춤이 깊어지며 그가 지그시 몸을 눌러왔다.
“에라블.”
이름 부르는 건 진짜 너무 직격타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그를 안은 두 팔에 더 꼭 힘을 주었다.
“흑-….”
곧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좁은 욕실 안, 신음이 벽에 부딪혀 울렸다.
몸이 뜨겁다, 너무 뜨거웠다…. 마음까지 다 델 것 같이.
“…밥 해놨는데.”
에라블은 그의 말에 조금 웃고 말았다. 사실은 조금 더 울고 싶어졌다.
쫓아 들어온 사람이 잘못이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쫓아온 사람이 다 잘못이었다.
그게 싫지 않은 것도…, 잘못이었다.
* * *
갑작스런 감정 기복과 감각의 기복을 겪은 후, 욕실에서 나온 에라블은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식어가는 저녁 식사가 놓인 식탁 앞에 앉았다.
“데워 줄까요?”
“괘, 괜찮습니다.”
에라블은 민망한 표정으로 더듬대며 말하고는 서둘러 고기 조각을 입속에 밀어 넣었다. 별로 많이 식지는 않았다.
그는 에라블이 식사를 하는 동안 옆에 앉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사, 사단장님께선 안 드십니까?”
“그 사단장이란 말은 언제까지 할 거예요? 난 출근도 안 하는데.”
“그…, 퇴직 안 하지 않으셨습니까?”
“취임한 기억도 없어요.”
“…….”
데제는 또 눈시울이 붉어지는 그녀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진짜 잘 우네.”
“갑자기 슬픈 생각이 났습니다.”
“아, 그래요?”
빤히 쳐다보던 그가 갑자기 입술을 눌러왔다. 식사 중이던 에라블은 움찔 굳었다.
“저….”
소스가 묻은 입술을 할짝이다가 다시 누르듯 입술을 깨물었다.
“데, 데제, 저…”
그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고기 맛 나네요.”
그야 고기를 먹던 중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런 당연한 소릴 하고는 그가 식탁에 반쯤 엎드려 입을 아-, 하고 벌려댔다.
이번에도 움찔 놀랐지만, 대처가 어렵지는 않았다.
에라블은 제 입에 한 번, 그의 입에 한 번, 번갈아 가며 고기를 넣었다.
그가 잠깐 사이에 꽤 많이 구운 탓에 고기가 모자라는 일은 없었다.
“더 구워줄까요?”
“저 이제 배부릅….”
“아니면 맥주 한 캔 할래요?”
“예, 하겠습니다.”
바로 나오는 대답에 그가 좀 웃어댔다.
“맥주 정말 좋아하나 봐요?”
“그렇게 좋아하진 않습니다.”
에라블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지나치게 대답이 빠른데.”
그가 웃으며 냉장고에서 차게 식힌 맥주와 조각 치즈를 들고 왔다. 에라블 역시 과자를 몇 봉지 꺼내 들고 왔다.
저녁을 다 먹어 치워서인지 그가 과자 봉지를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스테이크 접시가 늘어진 식탁 위에 캔맥주와 조각 치즈, 과자 봉지가 놓였다.
술과 안주를 집어 먹으며, 그들은 치즈 맛과 과자 맛에 대한 것부터 그냥 되는 대로 이런저런 얘기를 해댔다.
마치 늘 예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