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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97화 (97/132)

97.

에라블은 셔틀에서 내리며 오랜만에 느끼는 분쟁지역 특유의 추운 날씨에 몸을 웅크리고 걸었다.

“으, 추워….”

춥다, 춥지만…. 그래도 전보단 아주 덜 했다. 잘 쳐줘야 쌀쌀한 초겨울 날씨 정도다.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망자 군체가 싹 사라지고 하얗게 해가 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도 못지않게 깨끗한 하늘이다.

여전히 네 개의 항성이 존재 의미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칼바람이 휘몰아쳐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아주 환해졌다.

지원도 아주 좋아진 듯했다. 대부분의 인근 부대가 다 이쪽에 집결 중이라 실드 내에 환경 조정까지 되어 있었다.

“…너.”

웅크리고 집무실로 들어가니, 안에 있던 중대장이 에라블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너!!”

아씨, 깜짝이야.

보자마자 또 큰 소리다. 그간 울증이 악화 일로를 걸은 모양이었다.

“너 왜.”

사람한테 손가락질을 해대며 덜덜 떨었다.

“너 왜!! 왜 또 여기있-!”

그러다가 또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주, 중대장님!”

그의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질질 새고 있었다. 에라블은 놀라 잽싸게 근처에 있던 수건을 집어 내밀었지만, 중대장이 몸을 피했다. 수건이 아니라 걸레였나…?

“이건 또, 무슨….”

그가 입을 틀어막은 채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저 혼자 중얼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역시 상태가 많이 안 좋은 듯했다.

“의무실에 연락하겠습니다.”

“…됐으니까, 떨어져.”

뭐, 전에도 들어본 말이긴 한데.

머리 감은지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고, 또 이번에 입에서 뭘 쏟아내고 있는 건 내가 아니다.

피 보단 구역질이 낫지. 병원비도 구역질 쪽이 덜 든다. 그동안 무슨 지병이라도 생긴 건지.

“미친 새끼, 배슬로도 모자라서 금제까지 걸어놔?”

또 혼자 떠든다. 상태가 얼마나 안 좋아진 건지 걱정하고 있는데, 중대장이 불쑥 물었다.

“너, 지금 네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나 있냐?”

사람을 별안간 또 죽어라 노려보면서.

“알고는 있냐는….”

그러다가 과다출혈로 쓰러지기 전에 다행히 의무관이 왔다. 다소 삐딱한 태도의 의무관이었다.

“어머나, 소위님. 되게 오랜만이시네요?”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온 반가운 의무관을 에라블은 멋쩍게 마주 보았다.

“예, 중위님도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누가 전화를 줄기차게 씹어댄 것만 빼면 아주 잘 지냈죠.”

“제가 다 설명드리겠습니다.”

“됐고요, 여긴 어떻게 오셨는지?”

“파견 나왔습니다. 그리고 중위님, 제가 진짜 사정이 있었습니다. 진짜 그럴만한 사정이었습니다. 그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제발.”

붙잡고 매달리자 카밀이 질색했다.

몰린시에서 웨이브가 터진 이후 분쟁지역으로 온 41사단 중 일부는 여전히 이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괴수와 잦은 교전 상황이 벌어지는 최전방에서 그들은 인간에 비해 당연히 도드라진 성과를 보이고 있었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부대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카밀도 그렇게 분쟁지역에 남은 인원 중 한 명이었다.

“알았으니까 떨어져!”

그녀는 빨갛고 예쁜 머리칼을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너 진짜 왜 여기 있는 거야?”

“복귀했습니다.”

봐줄 것 같은 기색에 에라블은 헤죽 웃으며 중대장을 가리켰다.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아니라지만 저래도 괜찮나 싶었다. 저러다 죽을 거 같은데…, 피를 줄줄 쏟고 있는 중대장에게 군의관은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저딴 건 신경 쓰지 말고, 너 왜 여깄냐니까?”

이 부대, 정말 괜찮은 건가.

그렇게 자꾸 신경을 에라블의 모습에 쯧, 혀를 찬 카밀이 중대장을 중대장실에서 쫓아 보내버렸다.

“내버려 두면 아무리 1신위라고 해도 최소 3년은 동면에 드셔야 할 겁니다. 가서 치료부터 하시죠?”

“…….”

중대장은 순순히 쫓겨 나갔다.

부대 꼴 잘 돌아간다 싶었다. 아픈 중대장을 쫓아버린 군의관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관리부인 듯했다.

“카밀리아입니다. 예, 소위님 도착하셨습니다. 근데 이거 진짜 괜찮은 겁니까? 이렇게 관리하셔도 돼요?”

카밀 입에서 관리 얘기 나오니까 어쩐지 마음이 착잡해졌다.

속상하니 이따 술이나 마셔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카밀이 전화기를 들이밀었다.

“받아, 받으라고.”

얼떨결에 떠밀리듯 전화를 받았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관리부가 아니라 감시팀었나 보다. 아리에스 시더가 흐느끼고 있…, 설마 진짜 또 우는 건가.

욕쟁이 시더는 최근 1~2년 새 눈물이 많아진 듯했다. 갱년기가 다 그렇지.

“괜찮으십, 예? 아닙니다.”

일부러 이러는 거냐며 아리에스 시더가 다시 흐느꼈다.

“저 정식으로 허가 받았습….”

점점 더 커지는 흐느끼는 소리에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 인간 왜 이러냐는 얼굴로 카밀을 쳐다보니, 카밀은 너야말로 왜 이러냐는 듯한 얼굴로 무섭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 * *

“너는 애가 진짜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니. 따뜻한 수도에서 편하게 지낼 것이지, 대체 여길 왜 와? 개고생이 취미야?”

카밀이 연신 야단했지만, 분쟁지역은 예전 같지 않았다.

괴수 균열은 다 닫혔고 남은 괴수들의 숫자는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다. 아직 위험이 남아있다곤 하지만 이제 사상자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 추세였다.

여기저기 균열이 뚫려 우주가 멸망할 듯 난리였던 것이 고작 몇 달 전인 게 다 거짓말처럼 안정기였다.

“고생이랄 게 뭐 있나요.”

에라블은 카밀에게 직접 새 숙소를 안내받았다.

숙소도 나쁘지 않았다. 원룸이긴 해도, 개인 욕실에 작게 부엌까지 딸려 있었고 심지어 온열 시스템까지 다 갖춰져 있었다. 열악했던 전과 비교하면 아주 훌륭했다.

“와, 숙소 왜 이렇게 좋아졌습니까? 중위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여기 전엔 석탄 때웠습니다. 그땐 진짜 밖보다 안이 더 추웠거든요.”

“응, 옛날 얘기하지 마.”

카밀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곤 잠시 빤히 에라블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내저어댔다.

“개고생이 취미야, 취미. 짐 풀고 쉬고 있어. 상부에서 곧 올 거….”

말을 하다 말고 카밀이 또 헛웃음을 흘렸다.

“왔네.”

“뭐가 말이십니까.”

에라블은 카밀 대신 바닥에서 검은 촉수 줄기가 뒤엉켜 올라오는 것으로 대답을 들었다.

검은 후드 밑으로 새하얀 피부, 카밀만큼이나 붉은 머리카락.

비르고였다.

뭐야, 왜 왔지? 아니, 어떻게 온 거지?

“소위님, 왜 여기 있으세요…?”

나야말로 묻고 싶다.

“저 일이 덜 끝나서 마무리하러….”

“예? 왜 여기 있냐고요.”

“그, 제 일이….”

“왜요, 왜?”

아무래도 귀가 닫힌 듯했다.

“여기서 난리 난 게 얼마나 됐다고 여길 또 왜…, 왜….”

혼자 뭐라고 중얼대면서 목을 더듬거렸다. 마치 잘 붙어있는지 확인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수도로 돌아가세요. 제가 바로 모실….”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린다. 무슨 렉이라도 걸린 듯 가만히 서 있다가, 그는 고개를 치켜들고 카밀을 보았다.

“중대장은?”

“신전에 있는 것으로 파악 중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번엔 또 둘이 동시에 말이 없다. 뭔가 내부에서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외부인 입장에선 알 길이 없었다.

“…….”

에라블은 가만히 기다리다가, 약간 주의가 산만해졌다.

가만히 눈만 굴리다가, 가만히 백팩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래도 둘이 말이 없자 조용히 백팩 지퍼를 열고 내용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랬는데도 둘이 계속 말이 없어서 좀 더 적극적이 되었다.

DVD는 책상 맨 아래 칸에 착착 순서대로 넣고, 옷가지는 야무지게 털어 옷걸이에 걸었다.

양말과 속옷도 줄 맞춰서 각각 서랍에 넣은 뒤 갖가지 세면도구를 꺼냈을 즈음, 대화를 끝낸 둘이 우거지상을 쓰고 그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위님, 진짜 여긴 왜 오셨어요.”

“말씀드렸다시피 못한 일 마무리하려고 왔습니다. 대위님이야 말로 여기 어떻게 계십니까? 수감 중이던 거 아니셨습니까?”

“…제가 갇힌 게 아니거든요?”

어디 교소도에 가서 반년은 못 나올 거라더니, 혼자 몰래 튀었나 보다. 일은 아랫사람들한테 다 떠맡기고.

“근데 못한 일이면, 설마 그 플랫폼에 인공정령 안착시킨다는 그거 말씀은 아니시죠?”

“그거 맞습니다.”

“…….”

비르고가 위를 쳐다보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두통약이라도 쥐여주어 상사의 점수를 따고 싶었지만, 가진 약이 없었다. 데제가 다 처분해버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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