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그저 앞으로 타박타박 걸으며, 에라블은 아주 이를 악다물었다.
“무,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예? 뭐라고 하세요? 그, 너무 담아 듣지 마세요. 지금 기억이 없으셔서 그런… 우, 울지 마십시요!”
에라블은 소리도 없이 이만 더 악물었다.
나 때문이다.
올은 돌아올 거라고 했다. 그도 그렇게 말했다. 잠깐이면 될 거라고. 별일 아니라고….
근데 이게 어떻게 별일이 아닐 수가 있어.
원작에서 그는 다친 적이 없다.
물론 다친 게 뭐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가 다치게 한 사람들은? 그 사람 중엔 나도 있다.
난 인식표를 거의 4년 동안 맞았다. 조금만 삐끗했어도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반박의 여지도 없다. 내게 수 차례 걸린 내기의 생존 기간은 고작 한 달이었다.
그는 며칠에 걸었을까.
한 달보다 더 짧았을 거라 확신한다. 그리고 실제로….
마침내 신전을 다 빠져나온 에라블은 신역 한복판에 서서 제 팔을 들여다보았다. 안쪽에 검붉은 문자가 빼곡할 제 팔을.
검붉은 그의 피로 새겨진 문자, 유지를 위해 지금도 먹고 있는 그의 피로 만든 알약, 잃어버렸던 내 팔다리와 그동안 목탄처럼 새카맣던 그의 팔다리…, 모를 수가 없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젠 기억까지….
그는 돌아올 거라고 했다. 잠깐이면 될 거라고 했다. 내가 그 말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그 말이 진짜 사실일지 아닐지를 떠나서.
그에게 내가 좋은 선택일지 확신할 수 없다.
그는 또 나 때문에 다쳤다.
* * *
에라블을 내보내고 신전 최상층에 혼자 남은 데제는 깊히 숨을 빨아 당겼다.
“…….”
축축하게 젖은 혀가 공기 중에 남은 감정을 핥고 있었다.
두려움, 공포, 끈끈히 고이던 채액까지-. 그것을 핥다가 그는 다시 길게 숨을 뱉어냈다.
“…하.”
그는 영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내가 안 먹히는 얼굴인가?”
사람 잡아먹을 듯 아름다운 얼굴로 내뱉는 말에 올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괴수인 거 알아서 그런 거 아니야?”
“알아도 1형 껍데기면 안 넘어갈 인간은 없습니다.”
“있잖아, 저기.”
그 인간은 지금 소리도 없이 울고 있었다. 어디서 저렇게 쏟아지는 건지, 눈물범벅에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는데 나오는 소리라곤 고작 호흡 소리뿐이다.
“대체 왜 우는 거야.”
그는 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중간에 좀 빡쳐서 그렇지, 무섭게 굴지도 않았는데. 게다가….
“…뭐, 게이?”
올은 슬그머니 딴 곳을 쳐다보았다. 괜히 그와 눈 마주쳐서 화풀이 상대가 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최소한 양성애자라고 해야 맞지 않아? 우리가 되게 플라토닉한 관계는 아니었을 거잖아.”
몸 상태로 보아 절대 그럴 순 없었다.
회수식에서도 그랬었다.
그가 신성을 회수하고 처음 맡은 것은 그 냄새였다. 함께 밤을 보내고 몸에 남은 저 여자의 냄새.
개들이 근처에서 호흡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가 여자의 몸에 짜놓은 주술 체계만큼 다른 것에도 꽤 지랄맞게 굴었단 사실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두 달간 제 몸이 일으키는 반응에 그는 약간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만나며 좀 나아질까 했더니. 더 초조하다.
그는 쯧, 혀를 차며 잇새로 필터를 씹었다.
그 모습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올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데제, 아시다시피 스펠 체계가 심상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눈동자만 돌려 올을 빤히 쳐다보았다. 올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여자를 위해 나서고 있었다.
왜지,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관심 있어?”
“…전혀 없습니다.”
올은 왠지 익숙한 반응이었다.
“모시고 올까요?”
“우는 여자 데리고 와서 뭐 하라고?”
그리고 올은 주인의 심사가 꼬였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내버려 둬.”
* * *
“소, 소위님 진짜 하나도 담아두실 필요 없으십니다. 진짭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정말 진심이 아니실….”
직원은 이번에도 굳이 집 앞까지 데려다주며 안절부절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셨습니다.”
“예…?”
“그냥 질문 몇 가지 한 게 전부셨습니다.”
근데 왜 그러냐는 표정이었다. 에라블은 대답해줄 말이 별로 없었다. 건강한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됐단 말을 대체 어떻게 하냐고.
“저 그건 그렇고, A급 센터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린데 어떻게 조정 안 되겠습니까?”
“예? 절대 안 됩니다.”
저 표정…, 예전에 인식표 갱신 좀 대시 물어봐달라고 부탁했다가 담당의가 지었던 표정과 아주 비슷해 보였다.
하여간 맨날 말만 번지르르하지 뭐 되는 게 없다.
“절대, 절대 안 되니까 얼른 집에 들어가세요.”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 있으면 생각이 너무 많아지니까. 그래, 그러고 보니 왜 꼬박꼬박 들어갔지? 학생 때도 안 하던 짓인데.
“예,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에라블은 대충 인사말로 관리부 직원을 보내버리고, 몸을 돌려 센터 쪽으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 * *
79점.
에라블은 한자리도 안 틀리는 스코어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별 반응 없이 다시 재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그녀는 최근 트레이닝 룸에서 거의 나가지 않고 있었다.
제한 시간이 있었지만, 나가서 수도의 다른 센터를 돌아다니자 결국 관리부 직원이 조정해주었다. 전화하고 찾아오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고작 말로 에라블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에라블은 외부와 차단된 채 거의 트레이닝 룸에 박혀 살았다.
먹고 자는 것도 다 그 안에서 해결해서 점점 나오는 텀이 길어지기까지 했다. 그것도 요령이 붙었기 때문이다.
그것만큼 훈련에도 요령이 붙었으면 싶지만….
‘…아.’
딴생각하다가 실드 게이지를 확인하지 못해 탄이 안쪽으로 뚫고 들어와 버렸다. 비록 1차는 시뮬레이션에 불과하지만, A급 센터였다. 그것도 개들이 주 함선에서 운용하는.
완전히 현실 기반이란 뜻이었다.
그녀는 인상을 쓰며 구멍 뚫린 옆구리를 보다가 멈칫했다.
‘이게…?’
상처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뭐야.”
상황이 이해가 안 돼 정신을 놓고 있다가 이번엔 손등이 긁혔다. 반쯤은 의도한 상황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 들었다.
“뭔…?”
혹시나 싶어서 아예 실드를 꺼봤다. 탄이 어깨 반을 아작내며 뚫고 지나간다. 하지만 역시 순식간에 회복됐다.
살과 살이 맞물리고, 조각난 뼈들이 원래 자리에 들러붙으면서.
“이거 혹시….”
데제의 피 때문인가.
그의 피를 대량으로 주입 받고, 지금도 농축 알약을 매일 먹고 있으니, 약간 초능력 같은 게 생긴 건지도?
정확한 건 담당의와 얘기해보면 알 것이다. 그럼 관리팀에도 자연히 보고가 들어가겠지.
하여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건가 싶었다.
79점을 벗어날 방법.
“…….”
에라블은 신체 2레벨의 효율 떨어지는 SPD 용량을 머리나 심장 등 치명적인 부위에 집중한 채 무작정 들이받으면서 트레이닝을 클리어하기 시작했다.
1차 시뮬레이션 테스트뿐만 아니라, 2차 실전 테스트까지도.
* * *
“데제….”
올은 어두운 얼굴로 주인을 지켜보았다.
옆구리에 작게 구멍이 뚫린 것으로 시작해, 어깨, 엉치뼈, 허벅지… 끝도 없이 몸이 터졌다. 당연히 주인이 다친 것보단 그의 반응이 걱정되었다.
“자제시키겠습니다.”
그가 늘어져 누워있는 의자 밑으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떨어진 혈액은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 최종적인 손실은 없었지만, 그들의 몸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몸을 쓰면 노이즈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내버려 둬.”
하지만 그는 또 내버려 두라고 했다.
“어디까지 하나 보게.”
궁금하기도 했다. 구역질 나는 이 육신이 터질 때마다 제 머리 위에 여자가 앉아있단 사실이 끝도 없이 상기됐다. 계속 이러다가 자기가 어떻게 굴지 그는 아주 궁금해졌다.
몸이 터져 발생하는 노이즈에 성욕에 충동질까지 뒤섞여 약에 취한 듯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차라리 몸이 찢어지는 게 반가웠다. 혼자 해대는 것도 지겹고.
그는 삐딱하게 유독성 담배를 물고, 뒤틀린 심사를 질질 흘려놓았다.
“헛짓거리나 했으면 좋겠네.”
내 뒤통수를 쳐도 좋고, 내 게이 연인이라는 황자를 찾아가 둘이 사이좋게 공모를 해도 좋았다. 아, 그건 이미 실험체로 사용 중이니 안 되나.
“…뭐?”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에라블 버밀리언이 뭘 했는지 알게 되었다.
“분쟁지역?”
“예, A급 센터 수료 후 바로 분쟁지역으로 복귀를 신청했습니다. 2년 전 구축한 플랫폼을 완성하려는 목적으로 보입니다.”
“…분쟁지역이라고.”
어이가 없었다.
“예전에 균열 몰아뒀던 거기 말하는 거지?”
“예, 그렇습니다.”
뒤통수는 모르겠고, 빡치게 만드는 덴 확실히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보내.”
그는 사납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가고 싶으시다는데, 보내 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