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띠띠띠띠-, 탁자 위에 그대로 고꾸라졌던 에라블은 느적느적 알람을 찾아 손을 뻗었다.
“…아.”
더듬대며 알람을 끄고, 기다시피 욕실로 가 찬물로 얼굴을 적셨다.
“으어어….”
약간 인간이 아닌 소릴 내며 기어 다니면서 나갈 준비를 하고 간신히 제시간에 센터로 출근했다.
“괜찮으세요?”
“에에….”
“와, 술 냄새.”
센터 휴게실 소파에 드러누워 에라블은 앓는 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데제의 센터 방문 이후, 주위에 무슨 보이지 않는 사차원의 벽 같은 게 쳐진 듯 대화는커녕 아무도 근처에 접근조차 하지 않았지만. 회수식 이후 개들은 뭐라도 해주고 싶어 야단이었다.
“뭘 얼마나 드신 거예요?”
“…얼마 안 먹었슴다.”
“많이 힘드세요? 아니, 제발 그러지 마세요.”
에라블은 조용히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는 백스텝을 하며 작게 고개를 내저어댔다. 표정이 너무 심각해 보여 어떻게 잘 눌러 참아보았다.
“그냥 화장실 가서 토 하시, 아.”
아니, 토한단 말만 안 했어도 괜찮았지.
우웨에엑-, 휴게실 휴지통에 뱃속에 든 걸 쏟아내며 에라블은 남 탓을 했다.
이제 다시 아무도 말 걸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휴게실에 더 누워있어도 괜찮겠지.
“…….”
에라블은 도로 드러누워 멍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차라리 할 일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망할 A급 센터 수료증을 발급받는 것 외엔 할 것도 없었다.
개들은 심부름은 커녕 공짜로 수리해주겠단 것도 설설 피했다.
말만 꺼내도 몇백 cp 씩 주머니에 든 걸 모조리 다 놓고 도망쳐 버리니, 무슨 일진 깡패가 된 것만 같다.
짜증 나서 본격적으로 돈을 털까 하다가 말았다.
“후-….”
그녀는 휴지통을 치우고 다시 트레이닝 룸으로 들어갔다. 다 토했으니 이제 좀 흔들려도 괜찮겠지.
다행히 그런 섣부른 생각이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노란 위액까지 다 토해내기 직전, 관리부 직원이 센터로 찾아왔다. 그러니까 또 왔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세요.”
“소위님.”
왠일로 밝은 얼굴이던 관리부 직원은 술 냄새에 기겁했다.
“어, 얼마나 드신 겁니까.”
“얼마 안 먹었습니다.”
아까보단 발음이 되게 괜찮았다. 그래도 토하고 났더니 술이 좀 깬 모양이다.
“왜, 또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별별 이유로 다 찾아왔다. 꼭 건강검진 뒤에 달기 짝이 없는 간식이나 덕질 중인 연예인 DVD 등을 박스째 들고 오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내 우울증을 걱정하고 있는 듯싶었다.
근데 건강검진은 엊그제였었고 그는 어제 왔었다.
“데제께서 찾으십니다.”
그는 이렇게 답하게 되어 기쁘다는 듯 아주 밝게 말했다.
* * *
관리부 직원의 안내를 받아 간 곳은 최근 연일 뉴스에서 난리를 피우고 있는 신역의 한복판이었다.
익명성만 보장된다면 사진을 찍어다가 몇 장 팔아먹고 싶다.
그러니까 개들이 차고 다니는 작은 돌맹이나 그 위에 앉은 작은 멀지 알갱이라도 몇 장 찍어간다면 거액에 사겠다는 언론사들이 줄을 이을 것이다.
에라블은 규모를 짐작할 수 없는 거대한 신전 최상위 층에서 대기하며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해대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팔자로 빙빙 돌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면 주저앉아 웅크리고 있거나.
사방이 트인 신전의 최상층.
아치문 바깥으로 신역의 어둑한 하늘과 뒤엉킨 폭풍의 잔해 같은 먹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손바닥이 식은땀에 축축해졌을 즘이었다.
“기다리게 했네요, 영애.”
귓가의 솜털을 건드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라블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요.”
그는 아치문에서 계단으로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다행히 좋아 보였다. 옷차림이 옛 신을 생각나게 했지만. 명치를 드러내며 발끝 아래까지 끌려있는 긴 로브는 꽤 괜찮아 보였다.
사실 언제나 그렇듯 괜찮은 것 이상이긴 했지만….
에라블은 이를 꽉 깨물었다.
잃은…, 기억에 힘들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보는 것만으론 다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겉 보기엔 괜찮아 보였다.
“영애.”
에라블은 뒷짐을 진 채로 고개를 숙였다.
“너무 그럴 것 없어요. 편히 앉아요.”
그가 만류하며 자리를 권했다. 자리라고 해봐야 이 넓은 공간에 의자는 딱 하나뿐이었다.
그가 방금 자리를 잡고 앉은 긴 의자의 옆자리뿐이다.
“…….”
에라블은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엉덩이를 놓고 앉았다.
그를 거절 한다는 선택지는 이 우주에 없다. 있어도 없어진다.
“에라블 버밀리언, 영애.”
그가 다시 낯선 호칭으로 불렀다.
“우리 구면이지요?”
“예, 회수식에서 한 번 뵜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주변 인간들을 다 체크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최종포식자가 취하기에는 사실 너무 잔인한 스탠스였다.
대답하는 그녀를 그가 모로 다리를 꼬며 바라보았다.
“많이 긴장한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사과하란 뜻은 아니었어요. 나야말로 미안하죠, 이렇게 불러내서.”
그의 태도는 마치 사람을 달래듯 다감했다. 꼭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같았다. 더 긴장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어요. 아무래도 본인한테 직접 묻는 게 제일 확실할 것 같아서.”
“예.”
“우리가 약혼을 했다던데?”
“예, 그렇습니다.”
에라블은 묻는 대로 대답하면서도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지금 그가 신경 쓸 문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혹시 우리 정략결혼 같은 거예요?”
그가 몸을 조금 더 가까이 기울이며, 마치 대단한 비밀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속삭이며 물었다. 에라블은 순간 움찔하며 뒤로 물러설 뻔했다.
그의 태도도 그랬다.
물론 원래 좀 이런 면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 하기엔 지나치게 친근한 태도였다. 덕분에 에라블은 조금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연애?”
에라블은 다시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왜 이런 걸 물어보시는 거지. 설마…. 에라블은 눈치를 보며 조금 고민했다.
“이게 고민이 필요한 질문인가?”
모르겠다.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눈썹을 치켜떴다. 아주 건강해 보이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에라블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내가 뭐라고?”
“게이십니다.”
“…….”
가만히 쳐다보던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 그래요?”
계속해보라는 듯 그가 더 빤히 쳐다봤다. 그래서 에라블은 더 길게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봤다?”
“예, 그렇습니다.”
에라블은 그 이야기를 봤다.
평민이었던 그를 13황자가 귀족으로 만든 것, 그랬는데도 그가 황자를 배신했던 것, 많은 사람들이 죽고 제국이 저물었던 것. 그리고 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데제께서 보고 계셨던 분은 황자님이십니다.”
“아, 내가?”
“예, 그렇습니다.”
그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에라블은 학교에서 발바 아라칸 후작의 다차원 우주 평행이론을 유일하게 진지하게 들었던 학생이었다.
타 차원을 넘을 수 있는 건 미래나 혹은 과거, 즉 확실한 실체의 파편뿐이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언젠가 벌어진 것, 혹는 언젠가 반드시 벌어질 것이었다.
괜한 걱정으로 인생을 갈아 벙커를 준비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게이다?”
그가 의자 등받이에 푹 머리를 뒤로 꺾으며 실소했다. 입매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린다.
그는 근처 탁자에서 담배를 빼 입에 물었다.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를 가운데 두고 두 팔로 의자 등받이를 짚었다.
“영애.”
그가 빤히 시선을 맞추며, 손을 내려 잔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에라블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담배를 문 잇새로 붉은 혀가 얼핏 거린다. 마치 외부의 뭔가를 감지해 맛이라도 보는 듯.
“우리 사이를 물었더니 영 딴 얘기뿐이네?”
“죄송합니다.”
“좋아, 내가 게이라고 치고, 우린 무슨 사인데?”
에라블은 바짓단을 꼭 움켜쥐었다.
“…모르겠습니다.”
한참을 빤히 보던 그가 한 차례 더 느리게 연기를 마셨다가 흘리며 말했다.
“그래요, 그만 나가봐요.”
* * *
에라블은 천천히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관리부 직원이 눈치를 살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별일 아니에요.”
타버린 재처럼 새카맣던 그의 두 팔, 매일 같이 먹고 있는 그의 피처럼 검붉은 알약, 다 잃어버린 기억….
“괜찮아, 별일 아니에요.”
그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며, 에라블은 아무렇지도 않게 신전 하층으로 걸어 내려왔다.
“소, 소위님!”
관리부 직원이 놀라 그녀를 불러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왜, 왜 우세요!”
“…안 웁니다.”
이를 꽉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