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제대로 말할 때까지 끝도 없이 되풀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도 데제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시켰다.
“잘 했어요.”
그리고 엎드려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곤 기진맥진한 에라블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어댔다.
“그렇게 잘 지내고 있어요.”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속을 핥는 듯했다. 에라블은 흐릿한 눈으로 그를 보기 위해 초점을 맞추려 애썼다.
“잠깐이면 될…, 왜 울어.”
“모, 모르겠….”
에라블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모르겠는데 자꾸만…. 데제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자꾸 물었다.
“갑자기 왜, 응? 왜 울어요.”
“저, 저도, 잘….”
“…설마, 너 잊는다니까 좋아서 우는 건 아니지?”
그 말에 눈앞이 확 뿌옇게 흐려졌다. 그가 손끝으로 넘치는 눈물을 쓸어주며 약간 당황한 얼굴을 했다.
“왜 우냐니까.”
모르겠다.
“아무 일 없을 거야, 괜찮아. 별일 아니에요. 걱정할 거 없어. 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괜찮다고, 그가 두 팔로 휘감듯 작은 몸을 끌어안으며 끊임없이 되풀이해 말했다.
다 괜찮을 거라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틈 없이 안은 몸을 끝도 없이 토닥이면서….
* * *
고오오오오-.
어쩐지 더 커진 듯한 소리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계속 깨어있다가 새벽녘, 연락을 받은 데제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른하게 누워 그녀가 옷을 차려입는 것을 다 지켜본 뒤였다.
평소완 달리 오만군데가 다 깨물려 여기저기 아릿하고 욱신거리고 조금 쓰라려서 손놀림이 굼뜬 것을, 그는 지루하지도 않은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마지막 단추를 채웠을 때, 그는 일어나 로브만 걸친 차림으로 침실에서 빠져나갔다.
“조금 있다가 일 끝나면 개들이 수도 집으로 데려다줄 거예요.”
에라블도 그의 뒤를 따라 침실에서 빠져나왔다. 침실 문이 닫히자, 선실의 구성 요소가 마치 다른 색으로 맞춰지는 큐브처럼 뒤집히며 고속정으로 변형되었다.
출입구 쪽엔 개들이 이미 대기 중이었다.
그들 중 아리에스가 들고 있는 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황궁에서 봤던 그 브리프 케이스였다.
“아, 바람 피지 말고.”
고속정이 함선을 빠져나가 정박해 있던 무인 행성에 내리자, 그가 잠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주며 말했다.
“바람 피면 위자료로 백작령 다 파산시켜버릴 거예요. 내가 법적 약혼자란 사실을 잊지 말아요. 내 기억이 사라져도 혼전 계약서는 안 사라져.”
가벼운 입맞춤이 눈꺼풀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난 정신적인 것도 바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유교국 저리 가라 할 소릴 하며, 그가 뺨을 잘근 깨물어 또 잇자국을 내놨다. 그리고 다시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
“데제.”
개들이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에라블은 그 자리에 서서 그가 가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직 뺨은 욱신거리는데 그는 벌써 한참이나 멀어져 있다.
그러다가 문득 멀리서 그가 다시 돌아보았다.
“…….”
그 시선을 마주하며 에라블은 입을 꾹 다물었다. 코끝이 달아올랐다. 눈앞은 또 뿌옇게 흐려지고…, 그저 호흡을 크게 들이마셨다.
한참을 바라보던 데제가 다시 등을 돌렸을 때, 에라블은 마셨던 숨을 가늘게 뱉어내며 손바닥으로 달아오른 눈두덩을 꽉 눌렀다.
그는 오늘 기억을 잃는다.
별일 아니라고 했다.
* * *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주세요.”
관리부 소속 직원은 그녀를 수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수도 적당한 곳에 떨어트려 놔주면 그만인데 굳이 집 앞까지.
“아무 때나, 언제든 편하게 연락주시면 됩니다.”
“예….”
그를 붙잡고 이런저런 질문을 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올도 대답해주지 못한 일들을 일개 직원을 붙들고 물을 수는 없었다.
에라블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올라왔다.
빌라는 여전했다.
조용하고 깨끗하고.
집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달칵, 현관문을 닫고 그대로 문에 기대 미끄러지듯 주저 앉았다.
“…….”
안타레스가 정박해 있던 그 무인 행성에서, 에라블은 도열한 수백만의 개들을 보았다.
다리가 얼어붙는 광경이었다.
41사단은 물론이고 리페이사, ETAP 에너지, 크로노스 오퍼레이션의 모든 인원이 그곳에 모여있었다. 그 정도의 대규모 도열이 준비되고 있단 낌새도 몰랐다.
그들은 고요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게 중앙을 향해 있었다.
중앙엔 그가 홀로 서 있었다.
그의 발밑으로 늘어진 그림자에서부터 땅 아래로 두근, 두근두근 두근-, 거대한 생물의 혈관 같은 것이 뒤엉켜 올라왔다가 가라앉길 되풀이했다.
아리에스 시더가 서 있는 그에게 브리프 케이스를 가져갔다.
황궁에서 봤던 그 브리프 케이스를….
끼기기기기긱-…, 케이스를 열자 끊어질 듯 쇠 당겨지는 소리가 섬뜩했다.
그 안엔 긴 이어링 하나뿐이었다. 자신이 직접 케이스에 넣었었던 그 이어링 하나뿐.
그는 그것을 꺼내냈다.
그것을….
에라블은 그것을 만졌을 때의 느낌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서늘하고 차가웠던 그 느낌을. 고작 한 달밖에 지나지 않은 일이니 당연했다.
“…어떻게 몰라….”
그가 그것을 쥐자 곧 밀도를 가진 것처럼 무거운 어둠이 몸을 내리눌렀다.
어둠이 가셨을 즘엔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개들은 모두 땅에 이마를 붙이고 엎드렸고, 에라블 역시 모두와 마찬가지로 땅에 엎드린 채.
무심히 앞을 스쳐 지나가는 그에게서 금속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드롭 이어링이 부딪히는 그 소리를….
“…어떻게 모르냐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도무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나 때문이다.
에라블은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작게 웅크렸다.
* * *
물론 다 나 때문일 리는 없다.
생츄어리 사제가 말했던 망자와 관련된 그 순환인지 뭔지가 이 일과 연관된 것은 확실해 보였다.
“…….”
에라블은 빌라 창밖으로 새파랗게 맑은 수도의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어둡게 하늘을 덮던 망자 군체는 온데간데 없이 깨끗하다.
따뜻한 공기, 바삭바삭한 햇볕 냄새가 나는 수도의 공기는 오늘도 아주 따스했다.
그때 수도의 하늘을 찢던 균열이나 망자 군체 따윈 다 거짓말인 것처럼.
그러니 이 대단한 순환에 나 같은 우주 미생물나 다름없는 일개 인간이 무슨 큰 관련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세계가 망테크를 타게 된 데에는 분명 내가 모르는 그런 일들이 있겠지.
에라블은 생각을 애써 접었다.
하필 황자 몸에서 눈을 떴던 그 타이밍, 하필 그 타이밍에 개들이 회수해간 황자의 이어링 따위에 관한 생각은 애써 피했다.
데제가 하필 그 타이밍에 그것을 삼키고 기억을 잃은 것도….
전부 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언제까지고 웅크리고 앉아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나 때문이라고 한들 그게 내 잘못은 아니다.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사는 미력한 우주 미생물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띠, 띠-, 에라블은 시끄럽게 구는 알람을 끄기 위해 창에서 몸을 돌렸다.
그녀는 요즘 아주 규칙적인 일과를 소화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대충 밥을 해 먹고, 미수료자 허용 시간인 10시에 맞춰 센터에 나갔다가 6시에 퇴근, 맥주로 저녁을 때우면서 TV를 보다 잠이 들고, 그리고 다시 반복.
에라블은 벌써 두 달째 같은 사이클을 반복 중이었다.
가끔 냉장고를 채워 넣기 위해 마트에 들리는 것을 제외하면 특기할만한 이벤트라곤 아무것도 없는 생활이었다.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포된 새로운 신역에 미디어는 압사 지경이었지만, 제대로 된 정보라곤 거의 없었다.
정보랄 것도 없는 사소한 것에 추측이나 다름없는 온갖 해설과 사설을 덧붙인 채 하루 종일 떠들어댈 뿐이었다.
“…….”
퇴근 후, 오랜만에 마트에 들려 식료품을 사 온 에라블은 거실 바닥에 앉아 새로울 것도 없는 뉴스를 우두커니 지켜보다가 들고 있던 캔맥주를 다 마셔버렸단 사실을 깨닫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차게 식힌 새 맥주를 꺼냈다. 벌써 네 캔째였다.
술이 는 건지. 예전엔 맥주만으로도 적당히 알딸딸하게 기분 좋아졌는데, 가성비가 연일 떨어지고 있었다.
조금 고민하다가 데제 몰래 갖고 있던 40도가 넘는 몰트위스키를 맥주에 섞어버렸다. 먹고 죽진 않겠지. 한 모금만 마셔보자 하고 입에 댔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아침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