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다 마시고 오늘은 트레킹이나 가죠?”
트레킹이라니, 그런 걸 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어보기만 했다.
“예….”
“되게 건강해질 것 같죠?”
“미끄러지면 건강과 아주 작별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내가 업고 살게요.”
“제가 조심히 걸어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는 허리를 구부리고 잠시간 웃다가 한숨을 내쉬며 에라블이 다 마신 주스 컵을 치웠다.
트레킹 코스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입구에 작은 다운 타운이 있는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였다.
“나중에 우리도 이런 데서 살까요?”
“예.”
좋다고 대답했는데 눈치 빠른 데제가 되물었다.
“싫어? 왜?”
“제가 보니까 여기 TV 채널이 안 잡힙니다. 지역방송 딱 세 개뿐입니다.”
“더 좋은데?”
“약국도 작고, 심지어 시그눔 디스크 파는 상점은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에라블, SD는 군수품이에요. 그거 파는 게 불법이야.”
아, 그랬지. 근데 적대국에 그거 팔아넘기는 사장 입에서 불법이란 말이 나오니 듣는 부하 직원 입장에선 굉장히 어색해졌다.
뭐, 사장이나 사단장이나 이것도 어차피 한 단어 차이지, 에라블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식당도 두 개뿐입니다. 이런 데 살다 간 영양실조 걸릴 겁니다.”
“해 먹으면 되지.”
“출근은….”
“게이트 열면 되고, 사표 쓰든가.”
둘 다 너무 극단적이었다. 게이트 하루 유지 비용을 대려면 내 월급으로 100년은 일해야 할 것이다.
“저런 산 같은 데다가 집 한 채 지어 놓고. 아니면 바닷가 같은데 살아도 좋겠네요. 에라블은 산 보단 바다를 더 좋아하니까.”
순간 저도 모르게 암매장과 시신 유기가 떠올랐지만,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둘이서 한동안 그렇게 지내요, 나중에.”
에라블은 느리게 눈을 껌뻑였다.
고오오오….
고오오오오오-….
“여기까지네.”
데제가 길 한복판에서 입을 맞추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은 순식간에 어둑해졌다. 마치 하늘에 장막이라도 쳐지는 것처럼. 손끝은 차가워지고 숨에선 하얀 입김이 맺혔다. 한기가 찾아들고 있었다.
“트레킹 하고 싶었는데.”
그가 속삭이며 웃었다.
“이것도 나중에 해요.”
고작 눈 한번 감았다 떴는데, 주변에 개들이 서 있었다. 마치 주변에서 대기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이 근처엔 할 일도 없을 텐데. 이상했다.
에라블은 어둑한 스모그를 뚫고 대류권으로 들어오는 안타레스를 보며 다시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 * *
제국의 사단장급 전함이 노버 연방 영토에 무단 침입했다. 제국 수도에도 자주 그러니 놀랄 일은 아니었다.
놀랄 일은 올이 꺼내 놓은 말이었다. 놀랐다기보단…, 그냥 머리가 하얬다.
“기억을…, 말이십니까?”
안타레스에 탑승한 에라블은 개들에게 따로 인도됐다.
개들 중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사람이 직속상관인 올이었고, 그런 만큼 서로 쓸데없이 허튼소리를 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예, 그렇게 됐습니다.”
“…….”
에라블이 말이 없자, 올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는 평소보다 더 조심스러워하고 있었다.
“별일 아닙니다.”
이게 어떻게 별일이 아니지….
“그저 몇 달간 외근 가신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곧 돌아오실 거고요.”
“돌아오신다는 건….”
“기억을 되찾지는 못하십니다. 어쩌면, 예, 아주 희박한 확률로 데제의 육신이 파편화된 기억을 끌어당길 수도 있긴 하지만… 어렵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깍지 낀 두 손에 꽉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오실 겁니다.”
올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와 함께하던 시간으로 돌아올 거라고. 그러니까 그가 현재와 같은 상태로 돌아올 것이라 올은 확신하고 있었다.
“대체 기억을 왜….”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에라블은 곤란해하는 올을 올려다보았다.
“생츄어리에서 제가 들은 말이 조금 있습니다.”
“그쪽에서 들은 얘기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정말 하나도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걔넨 말 얹을 자격도 없고, 아는 것도 별로 없습니다.”
올은 친절하기 짝이 없게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면서도 제대로 된 대답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기밀이라고 딱 잘라버리면 될 텐데, 그는 그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정말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오히려 더 좋아지려는 거니까요. 소위님께선 그냥 잘 지내고 계시면 됩니다.”
“…그렇습니까.”
넘어가려는 듯하자 올은 안도하는 기색을 비쳤다. 그리고 급한 일이 있을 때 연락을 돌릴 개인 회선을 알려주었다.
아리에스 시더와 비르고 하그의 회선이 포함된 목록이었다. 우주가 멸망해도 쳐다도 안 볼 듯한 목록이었다.
* * *
“…….”
에라블은 올에게서 받은 메모지를 쥐고 터벅터벅 전함 복도를 걸었다.
생각에 잠긴 채 데제가 있는 곳을 향해 걷다가 잠시 바깥을 내다보았다.
안타레스 호는 무인계의 빈 행성 내에 정박해 있었다. 균열이 가까워 밖은 매우 어두웠다. 전함의 표시등이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고오오오오오-.
이래저래 익숙한 풍경이다.
고오오오오-….
괴수 균열이 벌어지며 발생하는 이 섬뜩한 괴음도, 그저 어둠뿐인 듯한 세상도….
가만히 밖을 보던 그녀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뗐다.
출입 통제 구역의 내실로 들어가니 그가 다이닝 테이블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왔어요?”
에라블은 얼른 들어오라며 웃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우뚝 멈춰 섰다.
“커피 줄까요?”
그의 기억이 사라진다.
“얘기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네.”
다 사라져 버린다….
“별 얘기도 아닌데.”
정말 어떻게 이게 별일이 아닐까.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에게 다가온 그가 고개를 기울여 가볍게 입을 맞춰왔다. 부드러운 입술에 커피 향이 맡아졌다.
“커피, 아니면 맥주?”
“맥주로 하겠습니다.”
“괜히 물었네?”
데제는 인상을 쓰며 냉장고에서 차가운 병맥주를 꺼내 주었다.
“오랜만에 TV나 볼까요? 냉동식품도 다 꺼내 봐요.”
“전부 다…, 말씀이십니까?”
“아, 잊을 뻔했네. 기다려봐요.”
함선은 보통 통로가 2개였다.
하나는 이동용, 하나는 운송용이다. 데제는 갑자기 운송용 도어를 열었다.
에라블은 그 모습을 우울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불길한 예감은 쓸데없이 적중률이 높다. 미로에 적재 중이던 트럭 한 대분의 냉동식품을 다 털렸다.
“…….”
영혼을 털린 기분이었다.
“약도 다 꺼내요.”
“다…, 말씀이십니까?”
“응, 전부 다.”
그렇게 멀쩡한 약까지 전부 다 폐기용 카트에 실어 보낸 뒤, 에라블은 초점 없는 얼굴로 그가 몇 개 남겨준 냉동식품을 가져다가 렌지에 돌렸다.
“영화는 뭐 볼까요?”
“로맨틱 5….”
“전에 우리 영상 녹화해 둔 거 있죠? 꺼내 봐요. 아니면 새로 하나 찍을까?”
“개그물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이러고 있으니 꼭 데제의 집에서 보내던 저녁 같았다. 냉동식품 몇 개 꺼내 놓고, TV를 보면서 조금 밍기적 대다가, 꼭 그날들의 저녁처럼 밤을 보냈다.
“흑…!”
파들파들 떨며 우는 에라블의 몸 위에 엎드린 채 그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좋아요?”
“…바, 밥을 너무 많….”
“왜, 소화가 안 돼?”
그는 툭 묻고는 가늘게 떨었다.
“하여간.”
몸을 일으키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할 때 웃기지 말라니까, 진짜. 일부러 이래?”
조금 투덜거리면서, 그는 손을 뻗어 눈물이 맺힌 에라블의 뺨을 쓸었다.
“당신은 이렇게 한결같아서 앞으로도 쭉 인생 조질 거예요.”
“…예?”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 하지만 생각을 길게 이을 겨를이 없었다.
에라블의 고개가 뒤로 꺾이며 눈을 홉뜨고 꺽꺽거렸다. 그는 다시 잔소리를 해댔다.
“몇 개나 되는 걸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먹더니, 당연히 소화가 안 되지. 아예 못 먹게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기회 날 때마다 닥치는 대로 다 쓸어 넣는 거야?”
“흐, 으-….”
잔소리를 하든 이것만 하든, 둘 중 하나만 해주셨으면 좋겠다.
“적당히 좀 조절해야지. 이미 몇 번이나 말했지만 하루에 한 끼 정도는 해 먹어요. 냉동식품 좀 줄이고. 사서 쌓아 놓지 말라는 거예요. 약은 아예 손도 대지 말고.”
바둥거리는 몸을 따라붙어 꽉 누르며 그가 물었다.
“내가 지금 뭐랬어요?”
“아흐, 흐….”
뭐라고 하셨지….
“뭐라고 했냐니까?”
에라블은 발로 시트를 밀어대며 중얼중얼 대답했다.
“…흐, 하, 하루 한 끼… 냉동, 약, 약….”
“응?”
“하, 하루 한 끼 내, 냉동식품을, 닥치는 대로 다, 다 먹….”
“아주 자기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