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는 주인이 필요하다-83화 (83/132)

83.

“하나 드시겠습니까….”

“됐으니까 이리 와요.”

주섬주섬 몸을 돌리며, 에라블은 미로 안에 먹다 남은 핫도그를 소중하게 넣어놓았다.

“그건 또 왜, 나중에 다시 꺼내먹게?”

“예….”

“잠옷이나 꺼내요.”

데제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걸었다.

“방으로 먹을 것 좀 가지고 올라와.”

면 티셔츠에 머리를 집어넣으며 에라블은 슬쩍 그를 훔쳐봤다.

“그렇게 봐봤자 안 해줄 겁니다.”

데제가 자켓과 베스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침대에 늘어져 누우며 말했다. 더 했다간 허리가 진짜 작살날 것 같았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체력은 대체 언제 느는 건지.”

그는 착하게 제 옆으로 와서 눕는 에라블의 뺨을 붕어처럼 눌러댔다.

“진짜 80점 언제 맞을 거예요?”

“역시 기계가 고장 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리는 없다니까.”

그가 손등에 머리를 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불편해서 밥도 못 먹었어요?”

“예, 허리가 좀 조여서….”

“…….”

데제는 눈알을 굴리다가 왠지 또 웃어댔다. 대체 뭐가 웃기신 건지. 그는 보기보다 웃음 장벽이 아주 낮았다. 한참을 웃던 그가 제 팔에 엎드려 눈매를 다정하게 흐렸다.

“후작령은 어때요?”

“아,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에라블은 조금 당황해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다행히 주어가 불분명한 말을 그가 트집 잡진 않았다.

“다행이네.”

에라블은 아름다운 그의 미모에 너무 정신이 팔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잠시 말을 골랐다.

“저, 어제.”

“응?”

“어젠 감사했습니다. 백작님 구해주셔서.”

조심히 꺼낸 말에 그가 눈썹을 치켜떴다.

“경황이 없어서 말씀드린다는 게 늦었….”

에라블은 말끝을 흐렸다. 데제가 왠지 안쓰럽다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간 익숙해진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딱….

“제가 또 제 무덤 파고 있습니까?”

“이젠 아주 습관이 된 것 같은데?”

그가 작은 어깨를 잡아 밀어트리며 다물린 입술을 빨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에라블은 숨을 삼켰다. 위에 엎드린 그가 혀를 내어 부푼 입술을 길게 핥았다.

“…벌려 봐.”

할짝거리다가 다물어진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곧 착하게 열리는 여린 입술 안쪽을 훑다가, 고개를 틀어 귓바퀴와 목덜미를 씹어댔다.

“데, 데제 저, 저 79점…!”

낑낑거리며 외치는 소리에 그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그는 신음하며 축 늘어졌다.

무거운 그의 체중에 에라블은 다시 끙끙거렸다.

“…진짜 언제 80점 맞을 거야.”

데제는 다시 신음하며 몸을 돌려 누웠다.

그리고 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에라블을 불만스럽게 쳐다보다가, 할 거 아니면 관광 코스나 짜자고 말했다.

“과, 관광 코스 말이십니까?”

갑자기?

“내일 하루 종일 침대에 있고 싶으면 말고.”

“패드 꺼내겠습니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데제가 다시 투덜거리다가 말했다.

“함선 수리되려면 며칠은 걸릴 거예요. 잔여 스모그 제거하는 것도 꽤 일이라. 기다리는 동안 백작님 모시고 관광이나 하죠. 곧 가족 될 사이에 점수도 딸 겸.”

그는 패드 스크린에 행성계 정보를 띄워 여기저기 예비 후보지를 짚었다.

“여긴 어때요? NE44. 아직 어린 별이라 원시 생태계를 볼 수 있다는데. 아니면 SW1120도 괜찮겠네요. 초신성 투어는 기간이 맞아야 볼 수 있으니까.”

행성 세 개가 전부인 백작가와는 영지 규모가 달라서 관광 규모도 딴 세상이었다.

“저는 여기도 괜찮은.”

“아무렇게나 가까운데 고르지 말아요.”

그러다 데제가 시킨 음식이 오기도 전에 에라블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열심히 버티고는 있었지만, 역시 이 저질 체력에 어제오늘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에라블은 데제의 옆구리에 달라붙어, 그가 등허리를 쓸어주는 것을 느끼며 슬금슬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의 곁이 너무 익숙해서 사실 이제 와선 불편해하는 척도 하기 힘들었다.

* * *

“…N…, N29, E31….”

신년제 축제 기간이다.

초를 세가며 황궁의 연회홀을 빠져나온 에라블은 사용인의 방으로 숨어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남의 방 안에서 몸부림치며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몸은 밑단이 짧은 체육복에, 발은 학생용 운동화에 껴 넣었다.

그리고 성급하게 창문을 넘다가 발목을 접질릴 뻔했는데….

“……?”

엎어진 바닥이 푹신했다.

“…쿠션?”

크고 작은 흰색 토끼 쿠션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버둥대며 쿠션 더미를 빠져나온 에라블은 잠시 갈등했다.

버린 물건 같은데 주워다가 팔면 한 이틀 생활비 정도는 뽑을 수 있을….

아니, 이럴 때가 아니다.

무려 8년 만에 지구로 이어진 균열이었다. 에라블은 정신을 차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5, 512….”

숨이 목까지 치올랐다.

비공개 제한 구역인 황궁 정원.

핸드 스크린으로 좌표를 확인하며 달리다가 움찔했다. 달빛에 반사돼 반짝이고 있는 저기, 저….

“로맨틱 1 초회 한정판!!”

구성품엔 포토 카드 12종 세트와 엽서가 무려 3장! 심지어 일반판과는 포즈가 다르다! 일반판은 제임스가 서 있지만 한정판은 무려 누워있다! 누워있는 건 못 참지!

얼른 달려가 주웠다.

그랬더니 그 앞엔… 친필 사인본이!

그리고 또 그 앞엔 시사회 때 둘렀던 스카프가, 또 사인회 때 착용했던 선글라스가 있었다! 정신없이 주우며 달린 끝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빡치네요, 에라블.”

아름다운 남자였다.

“언젠가 내가 싹 다 팔아버릴 거야. 아니면 다 불 싸지르던가.”

“왜, 왜 여기에….”

데제브 아브가니스.

이 소설 세계의 주인공.

아무렇게나 사람을 죽여대는 사이코패스.

저 토끼 머리띠를 쓴 남자는 분명히…, 토끼 머리띠?

못 본 체하기엔 너무나 깜찍한 털 뭉치였다.

“앉아요.”

그가 힐끗 식탁을 가리켰다.

달빛이 비치는 숲 한가운데, 하얀 테이블보를 씌운 식탁이 놓여있었다. 그 위엔 음식이 가득했다. 훈제 소시지와 닭튀김, 냉동 피자와 라자냐, 맥주가 세트째 있다.

“…….”

왠지 이때가 아니면 먹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상한 강박증이 밀려들었다.

“앉으라니까.”

명령어가 입력된 것처럼, 에라블은 앉아서 주섬주섬 먹기 시작했다.

“웬 토낀지 모르겠네.”

내 말이.

맞은 편에 긴 다리를 우아하게 꼬고 앉아있는 남자가 불평했다.

“저항감 없는 쪽을 고르는 건 좋은데. 손님까지만 하면 안 되겠어요?”

그가 회중시계를 손가락에 걸고 흔들어 대며 말했다.

그래서인지 정신이 혼미해졌다.

“저, 그, 그런데 누구신지 여쭤도….”

모른 척 물어보니, 거짓말도 참 드럽게 못한단 얼굴로 그가 대답했다.

“리서치 직원입니다.”

차기 후작이?

“설문지나 작성하세요.”

이제 보니 훈제 소시지 사이에 두툼한 종이 뭉치가 있었다.

“…저, 이걸 다…?”

“네, 천천히 전부 다 해요.”

그가 느긋하게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지만, 그렇게 느긋하게 말할 문항이 아니었다.

“관계는 주당 몇 번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가? 회당 적절한 시간은 몇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단위가 잘못돼 있는 것 같다. 시간이 아니라 분이라고 해야 맞지 않나…?

에라블은 멍하니 설문지 문항을 읽어보다가, 휘어지는 남자의 눈길을 받고 고개를 푹 숙였다.

뭔가 야시시한 시선이었다. 마주친 것만으로 덜컥 기분이 이상해져서 겁이 났다.

하지만 그럴만한 미모였다.

이세계 천연 미인들이란 죄다 살인 기계들 뿐이지만, 어쨌든 그는 그중에서도 정점에 서 있는 남자였다. 그러니까 정상 시력을 가진 이상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집중할 게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에라블은 성실하게 설문지를 작성했다.

남자가 설문지를 가져다가 채점했다.

“79점입니다.”

왜지.

“1점만 더 주시면….”

“노력하세요. 고작 1시간이라니, 누굴 말려 죽이려고.”

답이 정해져 있었군! 이럴 거면 설문 조사는 뭐하러….

“남은 것도 마저 하세요. 그건 사인만 하면 됩니다.”

다한 줄 알았는데, 그의 말대로 한 장이 남았었다. 화들짝 놀라 시키는 대로 사인을 하고 보니 혼전 계약서였다.

“가계약서입니다. 물론 법적 효력은 있고. 이제 법적으로 내가 당신 약혼자란 뜻이지.”

물리면….

“될 것 같아요?”

내가 혹시 소리 내서 말을 했나.

“정식 계약서는 가주님들끼리 정리 끝나면 검토해보도록 해요. 백작님이 걱정되시는지 안 받겠다고 거절하시는 게 좀 많네.”

왠지 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강바람이 부드럽게 나뭇잎을 흔들었다. 따라서 느리게 흐르는 식탁보, 아래로는 풀잎 스치는 소리. 맞은 편에 앉아 느긋하게 종이 설문지를 넘겨보고 있는 아름다운 남자….

역시 주 4회는 너무 적다고 불평하고 있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남자가 앉아있었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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