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는 주인이 필요하다-80화 (80/132)

80.

에라블은 함선에서 잠시 이탈할 것을 요청했지만, 반려되었다.

“기다리고 있어요.”

통신실, 왜인지 개들까지 일부 소집된 자리에서 그녀의 이탈 요청을 반려시킨 데제가 다정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그런 뒤, 그는 힐끗 제 개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시선을 받은 감시팀이 푹 고개를 숙였다.

“어제 같은 일 또 안 생기게, 조심해. 생길 것 같으면 아예 몇 명 미리 차출해 놓고.”

“예, 죄송합니다.”

무슨 일인지, 개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가운데 데제만 혼자 가볍게 웃으며 에라블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금방 다녀올게요.”

그리고 정말로 금방이었다.

에라블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멀쩡한 얼굴로 나타난 백작을 만날 수 있었다.

“균열?”

백작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글쎄, 우리 그쪽으로 오질 않았단다. 못 들었느냐? 아브가니스 가에서 내준 함선으로 아주 돌아서 왔다.”

백작의 예비 가주 함선은 균열에 아주 반파가 되었다고 전해 들었다.

회수되어 수리가 끝날 즈음엔 ‘후작가가 내준 함선’은 빠지고 ‘돌아서 왔다’는 정보만 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아 때와 아주 비슷했다.

“하여간 그딴 허튼 소린 됐고, 너-!”

동거, 스캔들, 연락 두절 등등. 적립됐던 백작의 폭격을 맞으며 에라블은 몰래 힐끗 눈동자만 돌려 함선 창밖을 살폈다.

어둑한 공간에 점점이 박힌 별들은 멈춰 있었다. 함선이 대기 모드로 인근 행성의 중력에 의지한 채 정지 중이었기 때문이다.

버밀리언 백작과 수행원들을 실은 다인용 우주선이 무사히 선 내로 진입했는데도, 함선은 여전히 정지 중이었다.

에라블은 조금 불길한 예감을 했다.

* * *

확실히 무슨 일이 생긴 낌새였다.

자정까지도 함선은 정지를 풀지 않았고, 데제에게선 아무런 연락도 오질 않았다. 개들의 분위기도 뭔가 약간 가라앉아 있었다.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글쎄요, 저희도 잘….”

하지만 개들의 반응은 어색했다. 물으니 대답은 하지만 대답하는 게 나는 아니었으면 하는 기색으로 설설 피하는 게 역력했다.

“만약 필요한 일이 있다면 제가 꼭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진짜 별일 없으십니다.”

진짜 별일이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제대로 대답해주는 인간이 하나도 없었다.

“가볼래요?”

그러다 불쑥 묻는 목소리에 에라블은 뒤를 돌아보았다.

“데제 상태가 지금 많이 안 좋거든요. 많이 다치셔서, 회복도 늦고요.”

비르고였다.

그와는 정말 오랜만의 대면이었다. 80콜로니에서 그의 머리가 잘린 이후로 처음이었다.

회복은 잘 됐는지 얼굴과 목덜미는 미끈한데, 존댓말을 써대는 걸 보니 그 역시 정상은 아닌 듯했다.

“데제께서…, 말씀이십니까?”

생츄어리도 혼자 반파시키는 남자가 뭘 하다가 다쳤다는 건지 영 신빙성이 없었다.

“예, 굉장히 많이 다치셨습니다.”

“혹시 자해라도 하신 건…?”

“소위님 진짜 눈치 빠르시네요? 뭐, 반쯤은 비슷합니다. 근데 상태 안 좋으신 건 어쨌든 사실이고요.”

“그럼.”

“예, 가면 데제께 엄청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사실 지금 데제께 제일 필요한 게 바로 소위님이니까.”

“…제가 말이십니까?”

쓸모 있는 건 좋지만 뭘 또 그렇게까지….

“다녀오시면 1만 cp 드릴게요.”

“…….”

“정 싫으시면 어쩔 수 없고요. 근데 전 분명히 데제께 소위님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가겠습니다.”

즉답하는 에라블을 보며 비르고는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다른 개들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팀장님, 지금….》

“왜. 언제까지 이렇게 대기만 타고 있을 순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지금 소위님을 어디로 보내시는 겁니까! 제정신이세요?》

“새끼가 말 막하네. 그럼 뭐, 소위님이 가시겠다는데 니들이 한 번 막아 보던가.”

에라블이 보기에 비르고는 혼자 떠들고 있었다.

뭐지, 개꿀잼 원맨쇼인가. 어쨌든 분위기로 보아 다른 개들이 비르고에 반대하는 중인 듯했다.

그녀는 작게나마 작전팀의 하극상을 응원했지만, 그들은 그냥 소형 우주선을 준비해 줬다.

개들은 양심도 없고 근성도 없다.

“소위님,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시는 게 어떠십니까.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그럼 다리를 부러트려 주시거나, 뒤통수를 세게 한 대만 때려주시면….”

“5분 뒤에 출발하겠습니다.”

준비를 도와주던 개는 역병이라도 되는 양 황급히 에라블을 피했다. 너무하네, 진짜.

뭐, 어차피 가려고 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다 백작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니까. 그래도 너무 이러니 좀 떨떠름했다.

에라블은 쩝 입맛을 다셨고, 그리고 개들은 오랜만에 일치된 의식을 공유했다.

《…어쩌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감시팀 애들까지 다 따돌리시고, 그쪽 팀장님이 가만 안 있을 겁니다.》

《소위님이 정신 문제를 일으키면 어떡합니까? 지금도 상태 안 좋은데….》

《촉수 몇 가닥 가지고도 미치는 게 인간들 아닙니까. 지금 주인님 상태면…, 혹시 쇼크사 하시는 거 아닙니까?》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쏟아지는 화살에 비르고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생각이긴.”

그는 잘렸던 뒷덜미를 주무르며 태연히 대꾸했다.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비르고의 대꾸에 개들이 조용해졌다.

“허물 근처에서도 소위님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만약 이번에도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면….”

진짜인 거잖아. 진짜, 우리에게 희망이 생기는 거잖아.

“그럼 나는 그녀 앞에 기꺼이 머리를 조아리고 영원히 안주인으로 모실 거야.”

당연한 얘기 좀 하지 말라며 개들은 직속상관 앞담을 깠다.

“안 될 겁니다.”

“바랄 걸 바래야죠.”

“후작 부부도 실패한 걸 서른도 안 된 어린 소위님한테 바라면 어떡합니까.”

진짜 희망은 됐고 이번 회차나 좀 한동안 평온했으면 좋겠다는 그들을 보며, 비르고는 히죽 웃었다.

“입만 털지 말고 내기나 걸어. 소위님이 괜찮다에 100만 cp. 지면 디핏엔 내가 가지.”

개들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도망친다고 해결 안 되실 겁니다.”

“…….”

“소위님 잘못되기라도 하면 디핏이 아니라 우주 끝까지 도망쳐도 끝장 아니겠습니까?”

“…….”

“감시팀 애들 생츄어리에 잠깐 뚫렸다고 만찬 예고 받았답니다. 소위님한테 뭔 일 생기면 팀장님은….”

“나 뭐?”

“만찬 정도가 아니지 않을까요? 이참에 차기 팀장이나 미리 지정해 두시죠? 전 어떠십니까?”

“뭔 헛소리야. 소위님 잘 못 되면 나 하나로 해결이 될 것 같아? 니들도 다 끝이야.”

“…….”

“안 그래도 강제 리치화 때문에 정신 문제 터져서 비상인데, 이 상황에 악화까지 시킨다? 그럼 뭐 만찬은 천국 되는 거지.”

비르고는 희게 질린 팀원들을 보며 히죽대다가 버밀리언이 떠나간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래, 혹시 모르지 않는가. 그녀가 정말 우리의 희망이 되어줄지…, 하지만 혹시나 일이 잘못됐을 경우를 대비는 해놓기로 했다.

비르고는 유효한 자살용 독극물을 검색하며 물었다.

“공동구매 할 사람?”

“뭘 먹어야 우리가 죽을 수 있는데요….”

“찾고 있잖아, 씨X아.”

“사고는 팀장님이 쳐놓고 왜 우리까지!”

“진짜 만찬 메뉴 되기 싫으면 니들도 빨랑 찾아봐!”

“씨X….”

* * *

‘…조용하네.’

그즈음, 데제는 반파된 함선에 붙어 늘어져 벌어진 균열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

돌아가야 하는데, 상처가 빨리 아물질 않아 그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임계점이 가까워질수록 균열의 규모는 커지고 그만큼 그의 상태도 악화되어 갈 것이다.

그리고 인간화에 어려움을 느낄수록 분노와 모멸감, 자기혐오는 날것처럼 생생해지는 것이다.

데제는 죽은 듯이 잠잠히 늘어져 회복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하나 남은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을 일으켰다.

“에라블…?”

어둑한 균열의 잔여 스모그를 뚫고 소형 우주선이 인근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에라블.”

어떤 새끼 짓이지, 그는 통신을 연결하며 설득조로 말했다.

“여기 안 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혹시 제가 필요 없으십니까?]

통신기 너머로 에라블 특유의 조심스러우면서도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데제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필요는 해요. 당신한텐 안 오는 게 나을 거라는 뜻이지.”

[제가 필요하시다면 가겠습니다.]

너무 예상 그대로의 대답이라 어이가 없었다.

“…보면 진짜 자기 무덤 파는 경향이 있어.”

[그, 거기가 제 무덤입니까?]

“아마?”

데제는 웃으며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안 올 거예요?”

[진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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