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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79화 (79/132)

79.

“그래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불평하며 데제는 시선을 돌렸다.

“재밌는 얘기를 하시던데. 그 얘긴 이 사람이 아니라 나하고 해야 할 텐데요?”

그는 퍽 평이하게 물었다.

탁자 위에 놓인 찻주전자를 들어 자기 것인 양 따르면서. 쥐 죽은 듯 고요해진 응접실 안으로 찻물 따르는 소리가 도드라졌다. 고작 차 따르는 소리가 왠지 섬뜩하다.

“바이어도 내버려 두고 왔습니다. 대답 빨리하세요.”

재촉에도 대답이 없다.

“나하고 할 얘기를 왜 이 사람 불러 하고 있는 건지.”

사제는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리고 그때 까득, 까드득…, 문밖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우지끈, 와지끈,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 소음, 까득까득…, 무언가가 무언가를 씹는 소리가-….

물러선 사제가 덜덜 몸을 떨었다.

“여, 영애께… 영애께 해를 끼칠 의도로 모신 것이 아닙….”

하지만 아드득, 까드득-… 문밖에서 들리는 기괴한 소리에 사제는 말끝을 흐렸다.

“그런 의도가 있었으면 내가 지금 차나 따르고 있진 않았겠지요?”

지금도 차나 따르고 있는 것 같진 않았지만, 데제는 뻔뻔하게 말했다.

“생, 생츄어리는…, 군 장병들에 대한 소환권을 가집니다. 저희는 정당하게 대면을 한 것입니다.”

“생츄어리 소속 군 장병들이겠죠. 에라블 버밀리언 소위는 정령계 면허 소지잡니다. 생츄어리에서 불러낼 권한이 없어요.”

권한 얘기를 하는 걸 보니 아직 인간 행세를 하시려는 듯했다. 하극상이 곧장 폭력 사건으로 발화하는 세계에서 권한의 범위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지만, 인간한테나 그랬다.

데제는 이제껏 누군가의 권한 범위 따위에 신경을 쓰고 산 적이 없다. 있다면 전 우주 통틀어서 가장 심각한 범죄 집단의 수장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차, 착오가… 있었나 봅….”

쾅, 쾅! 무언가가 닫힌 응접실 문을 절박하게 두드렸다.

까득, 까득…. 두드림은 점차 잦아들다 이내 사라지고 다시 씹히는 소리만 남았다.

까득, 까드득-….

“다시는 이, 이런 일이….”

“그래야 할 겁니다.”

데제는 태연하게 말했다.

“함부로 후작가 사람을 소환시키면 곤란합니다. 거부권도 있고요. 약혼을 앞두고 있으니 이 사람은 이제 후작가 사람이나 다름없어요.”

약간 억지였지만, 데제는 그래도 꽤 상식적인 대화를 이어갔다. 비상식의 영역은 문밖에나 놔둔 듯했다.

“이런 식의 무통보 소환은 안 됩니다. 불러내지 마세요. 저 바쁩니다.”

그리고 차를 몇 모금 마시고는 덧붙였다.

“난 생츄어리가 잘 보존되기를 바랍니다. 순환하려면 생츄어리가 필요할 테니까.”

“…그, 그 말씀은…?”

“차는 별문제 없군요.”

말을 끊으며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에라블을 불렀다.

“에라블?”

“예, 예.”

에라블은 바짝 긴장했다. 그가 조금 흐트러진 머리칼을 가만히 넘겨주며 말했다.

“예정보다 일찍 돌아갈 것 같네요. 아마 오늘 저녁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별일은 아닌데. 청혼서가 도착했는지, 백작님께서 바로 오시겠다네요. 출발은 이미 오전에 하신 모양이에요. 오시는 김에 후작가에서 그냥 양가가 다 모이기로 했습니다.”

“…예?”

“준비해 둬요.”

그 말을 끝으로 무언가가 온몸을 휘감아 왔다. 뭔가 한마디도 더 물을 새도 없이 시야가 검게 꺼져버리고 말았다.

* * *

에라블은 느리게 눈을 뜨며 익숙한 거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

낮게 들리는 TV에 연결된 게임 소리. 그녀는 초점 나간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거렸다.

지폐가 잡혔다. 네모반듯하게 접힌 지폐가. 감촉으로 보아 10cp 짜리가 확실하다. 꿈은 꿈으로 끝내야지, 어? 이렇게 현실까지 이어지면 내가 너무 무섭잖아!

병원 예약은 안 잡아도 될 모양이다. 축 늘어진 에라블은 주르륵 소파에서 미끄러졌다.

“아, 씨X. 깜짝이야.”

멋대로 영화를 끄고 게임을 돌리고 있던 산체가 기척에 돌아보다 기겁을 했다.

“무슨 변사체야? 자다 말고 갑자기 왜 이래?”

망할 새끼…, 어쩐지 잔소리도 안 했는데 짐을 싸놨다 했지. 아, 그러니까 아까 아직도 모른다고 혀 차던게 이거였어? 이 개새….

“왜, 뭐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어? 님 대답 좀?”

“…꺼져.”

“아오, 저 진짜!”

에라블은 손을 뻗어 리모컨을 쥐고 띡-, 다시 로맨틱 4를 틀었다.

“악!”

보스를 잡던 산체가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TV를 틀자마자 뉴스 속보가 지나가고 있었다.

“…….”

생츄어리와 잠시 연결 이상이 생겼다는 속보였다. 충격파가 감지되어 확인 중이라는 소식에 이어 알 수 없는 이유로 확인이 지체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반파되어 물리계로 떨어지고 있는 생츄어리의 영상과 함께….

잘 보존되기를 바라신다더니…, 그의 기준은 일반적인 것과는 많이 다른 게 확실했다. 그래도 영상을 보니 다 때려 부순 것 같지는 않았다.

“뭐, 뭐야, 갑자기 무슨 일이야?”

“네가 왜 놀래. 어차피 넌 니네 백작령 행성신하고 계약돼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생츄어리잖아!”

그래, 생츄어리다. 연방이고 제국이고 최소 80%쯤의 인구가 주 시그눔 면허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산체의 호들갑을 멍하니 귓등으로 흘리며 에라블은 중얼거렸다.

“제임스…, 인생은 감자 칩 같은 거야.”

귀여운 제임스의 머리 위로 빨간 글자들이 경고등처럼 번쩍거렸다.

“부서지고 또 부서져도, 아직 부서질 것이 남은 것이지.”

아주 가루가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충격을 받아 떠벌거리던 산체가 그녀를 다시 돌아봤다.

“뭔 헛소리야?”

“닥치고 꺼져.”

“…….”

잠시 가만있던 산체가 벌떡 일어나더니 TV를 툭 꺼버렸다. 그리곤 곧장 리모컨을 빼 들고 튀었다.

“야!!”

에라블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산체의 뒤를 쫓았다. 당연히 잡히지 않았고 남매간 감정의 골만 더 깊어졌다.

* * *

“그러게 내가 전화하라고 말했지.”

슬프다. 나는 꼭 하려고 했는데…, 그러니까 오백 년 뒤에 진짜 꼭 하려고 했다고.

“난 분명히 경고 했다.”

진짜 너무 슬퍼서 옆에서 이죽대는 산체의 명치를 세게 쳐주고 싶었다. 거대 스크린 안에서 말없이 저를 내려다보는 백작의 시선을 받으며 에라블은 어색하게 웃었다.

[…가서 보자.]

그냥 지금 보면 좋겠는데…. 에라블은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백작은 코웃음을 치곤 화면을 꺼버렸다.

그냥 안 오면 안 되나고 사정사정했다가 일이 더 틀어졌다. 안 그래도 삐졌는데 이젠 빡쳤다는 뜻이다.

아브가니스 가의 함선 내부.

예고대로 저녁쯤 돌아온 데제와 함께 후작령으로 이동 중이었다. 후작가 함선인데,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죄다 41사단 인간들이었다.

이 죄악의 소굴에 산체가 있는 것을 보니, 정말 놀랍게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지난 열흘간 데제와 한집에 있는 산체를 본 터라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인생…. 에라블은 조용히 패드를 켜 백작의 위치 정보나 연결해 놓은 뒤 의욕 없이 침대 위에 축 늘어졌다.

몇 년씩 한 직장에서 얼굴을 맞대고 산 동료 직원들이 마치 VIP처럼 그녀를 대하며 굽신굽신 선실로 안내해주었다.

차기 후작의 위엄에 맞게 무슨 대저택 별채 같은 선실이었다. 하지만 막상 방 주인인 데제는 일찍 돌아오는 바람에 일이 밀렸는지 잠깐 들렀다가 다시 자리를 비웠다.

“…….”

혼자 남은 에라블은 하릴없이 발뒤꿈치로 매트리스나 툭툭 두들기다가, 촛점 나간 눈으로 제 몸값보다 비쌀 펜던트 조명을 쳐다보며 한물간 노래를 흥얼거렸다.

‘…갑자기 웬 양가 회동이람.’

가사가 생각나질 않아 돌림 노래처럼 부르다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또 문득 손을 떼고 빤히 쳐다보았다.

“…….”

사슬처럼 빼곡하게 이어지던 그 문자, 문자들…. 그 검붉은색….

“…역시 똑같은 색이었지.”

지금 복용 중인 알약하고, 완전히 똑같은 색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피처럼 검붉은색 알약하고.

에라블은 끙끙대며 몸을 굴려 작게 웅크리곤 눈을 감았다. 그렇게 계속 끙끙거리다가, 그대로 숙면했다.

푹 자고 일어나 보니 아침이다.

‘…잠이 오네.’

잠이 와, 이 상황에서 아주 잘 잤다.

‘에라이….’

투덜거리며 습관처럼 패드를 당겨 어제 연결해 놨던 백작의 위치 정보를 확인하다가, 에라블은 놀라 벌떡 일어났다.

* * *

백작의 함선 경로에서 균열이 터졌다. 분쟁지역에서나 열리는 괴수 균열이었다.

그게 대체 왜 분쟁지역도 아닌 곳에서 터진 건지는 일단 시급한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균열이 생성 시 인근의 민간인 생존율이 3%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회복 불가능한 중환자나 극심한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피해자 전부를 합한 3%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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