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에라블은 당연히 꿈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더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버밀리언 영애. 우리는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영애를 모셨습니다. 영애 한 명을 모시기 위해 우리는 아주 많은 대가를 치렀지요.”
사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러니 영애께서도 이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초면에 바라는 게 많다.
사제는 이어 우리 중 몇 명이 다쳤는지, 기회를 잡기 위해 얼마나 많는 자원을 소모했는지에 대해 줄줄이 설명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차분해졌다. 말이 너무 길다. 곧 좋은 보험이 있다며 가입을 권할 것만 같았다.
“보험 안 삽니다.”
에라블은 선수를 쳤다.
“…그게 무슨.”
“그럼 옥 장판인가요?”
“…….”
사제는 침착하게 차를 권했다. 대단한데? 에라블은 빡치게 만들 다른 방법을 골몰하며 그를 관찰했다.
보통 화가 나면 본색이 빨리 드러나는 법이니까. 툭하면 쓰는 방법이라 나름 숙련도도 높은데 안 넘어온다.
에라블은 위기감을 느꼈다. 데제는 세상 계약자의 80%를 점유하고 있는 생츄어리를 싫어했다. 데제가 싫어하는 꿈이라니, 정신 건강에 매우 좋지 않다.
“영애, 이건 꿈도 그렇다고 영업 따위도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영업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설득하려고 모셨으니까요.”
역시 옥 장판이었군.
에라블은 자신은 돈이 없고, 모아 놓은 돈도 없으며, 그나마 사고 후유증으로 들어가는 돈만 많다는 사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려 했지만. 이번엔 사제가 먼저 선수를 쳤다.
“멸망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 사이비였다.
“저 무교입니다.”
“…….”
사제는 잠시 침묵했다.
“…대화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분이시군요.”
“10cp를 선불로 주시면 1시간 동안 최대한 대화에 맞춰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 돈을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예.”
뭔가를 요구하려면 돈이라도 주셔야죠, 라는 당연한 말을 눈으로 하고 있는데 정신을 수습한 사제가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숫자가 굉장히 구체적이시군요.”
“최저 시급입니다.”
“…작년 기준 제국에서 고시한 최저 시급은 8.5cp일 텐데요.”
쓸데없는 걸 알고 계시네?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
사제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후드에 가려 코밖에 안 보이는데도 느껴지고 있었다. 흠, 그나저나… 이놈의 꿈은 대체 언제 깨는 거지?
“에라블 버밀리언 영애,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말장난하려고 힘들게 영애를 모신 게 아닙니다.”
그는 엄중하게 말하며 10cp 짜리 지폐를 꺼내 주었다.
이걸 진짜 주네? 좀 더 불러볼걸. 에라블은 지폐를 곱게 반으로 접어 추리닝 바지 주머니 속에 넣으며 조금 후회했다.
그 모습을 약간 침울하게 보던 사제가 다시 엄중하게 말했다.
“영애, 그 남자와 헤어져 주십시요.”
“저, 그, 남자라면…?”
“아브가니스 말입니다. 데제브 아브가니스.”
에라블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그녀는 대략 2m 규격의 거대한 시어머니를 감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13년 전에 본 아침드라마가 이런 식으로 재생이 된다고? 생츄어리 사제 버전으로?
대박…, 근데 이 설정은 돈 봉투 두둑이 쥐여주면서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최저 시급 쥐여주면서 할 소린 아닌데.
“저, 방금 멸망에 대해 말씀하신다고.”
“관계된 이야기입니다.”
멸망과 아침 드라마가?
“영애. 영애께서는 잠시 동안 분쟁지역에서 생활하셨었지요. 그럼 보셨을 겁니다. 그 망자들을….”
이상한 혼종이었지만, 괴수가 아닌 망자 얘기가 나오는 건 좀 신기했다.
그것도 보긴 했지. 사상자를 내는 식인 괴수와 달리 실제적인 위협은 되지 않아 신경 써본 적은 없었다. 해가 안 들어 춥고 빨래가 안 마를 때나 불평하던 존재였다.
“이 세계는 썩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사제가 따른 차를 권하며 재차 말을 이었다.
“망각을 거쳐 순환에 들어야 할 망자가 괴수에 고여 썩어들어가고 있지요. 이대로면 우리 세계는 멸망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
“그것을 막기 위해 영애께서 아브가니스와 헤어져 주셔야 합니다.”
“그렇습니까….”
뭐, 멸망을 막기 위해 전설의 용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보단 사회 친화적인 설정이긴 했다.
드라마를 너무 봤나. 배우를 덕질하는 게 문제인가? 이제야말로 아이돌로 갈아탈 때인지도 모른다.
“제가 이런 설정은 또 처음이라서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가…, 그 멸망이 대체 사단장님의 사생활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아브가니스는 현신입니다.”
에라블은 그냥 웃었다.
이 와중에 표정 관리가 된 건 정말 오랜 직장생활의 기적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씨X, 순간 사제 면전에 대고 욕할 뻔했네.
“무슨 말씀이신지….”
“아실 텐데요.”
“…….”
“그가 바로 망각입니다.”
에라블이 손대지 않자 사제는 혼자 차를 홀짝이며 마셨다.
“하지만 온전하진 않죠. 그는 제 신성을 방치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건 마치 인간이 숨을 방치하고 있다는 것 혹은 물고기가 아가미를 방치하고 있다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신성을 방치한 채, 의무를 저버리고… 멸망을 불러일으키는 악신이 되어 버렸지요.”
사제는 이를 갈았다. 개들에게 익숙해진 경력자가 아니었다면 소름이 끼쳐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더럽고 추악한….”
상위 존재의 증오가 살을 찌르는 것만 같다.
“영애.”
“예.”
멀쩡히 대답하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사제가 기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그 동작이 약간, 약간….
“영애께선 그를 보며 이상한 점을 느낀 적 없으십니까? 역겹거나, 거슬리거나, 혹은 징그럽고 끔찍하거나.”
닭 같다.
그래, 진짜 약간 닭 같았다. 아니면 비둘기나. 움직이는 게 꼭 새 종류 같다.
“그건 그가 온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류. 개들이 개 같다면, 사제는 새 같다. 개새…, 묶으니까 욕인데? 딱이다. 개새들.
아니, 아니지. 개들은 개 같다기 보단 뱀 같지. 하지만 어감이 개 쪽이 더 맘에 든다. 진짜 이 개새들.
“비틀리고, 뒤틀어지고, 무너진… 딴생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아닙니다.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돈을 주면 최대한 맞춰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고 있습니다.”
최저 시급 줬으면 노동도 그냥 그 수준인 거지, 꼴랑 10cp 쥐여줘 놓고 대단한 노오력을 바라면 아주 곤란하다.
“대화하기 정말 어려운 분이시군요.”
한숨을 내쉬며 일어선 사제가 그녀에게로 손을 내뻗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는 제대로 된 존재가 아닙니다. 비틀리고, 뒤틀어지고, 무너진 존재지요. 그러니 그 곁에 있다간….”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에라블은 고양이 앞에 얼어붙은 쥐처럼 굳어, 사제가 제 이마를 건드리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이렇게 휘말리게 된답니다, 영애.”
그가 건드린 곳부터 시커먼 핏줄이 번져간다. 점점…, 머리부터 손끝까지 온몸으로.
에라블은 손을 들어 제 팔을 들여다보았다.
검붉은 주술 문자가 빼곡한, 살갗 위로 핏줄처럼 검붉은 문자가 흐르고 있는 제 팔을….
“이대로면 영애도 곧 그것들과 같은 것으로 영락하고 말 겁니다. 절대 안식을 맞이하지 못하고, 사람도 괴수도 아닌 것이 되어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끝없이 배회하게 되겠지요. 오직 그의 자비에 기대어서. 그것이 과연 삶이겠습니까.”
사슬처럼 이어지는 빼곡한 글자, 글자들. 죽은 자의 손처럼 파리한 살갗, 그 속에 빼곡한….
“그러니 영애,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의 곁을 떠나시길 권하겠습니다.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요.”
사제는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영애가 방해되고 있어요. 아주 방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영원히 떠들 것만 같았던 사제의 입이 다물렸다. 떨리는 팔을 들여다보던 눈이 가려진다.
“내가.”
그녀의 시야를 뼈마디가 긴 남자의 손가락이 가만히 가린다. 서늘한 체향이 맡아졌다.
“널 아주 원하게 됐기 때문이지. 숨들이 마셔요.”
에라블은 크게 들이마셨다. 저도 모르게 멈추고 있던 호흡이 크게 밀려들었다.
숨을 고르자, 눈을 가리고 있던 커다란 손이 턱을 쥐었다. 들어 올려지는 고개를 따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라블.”
데제의 아름다운 얼굴에 선득한 그늘이 져 있었다.
“여기서 뭐 합니까? 꿈꾸지 말라고 밤새 힘들게 봉사해줬더니, 이런 데서 뭐 하고 있어요.”
“아…, 아르바이트하고 있었습니다.”
목소리가 나오는 게 이상해서, 에라블은 조금 말을 더듬었다.
“……?”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에라블은 더듬더듬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지폐를 꺼내 보였다.
“한 시간 기준 최저 시급보다 1.5cp 더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