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버밀리언령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산체는 온 가십지를 장식하던 에라블의 스캔들이 진짜일 거라곤 조금도 믿지 않았었다.
‘…차이가 너무 나.’
근데 진짜였다니, 문제가 심각하다.
‘집안도 그렇고, 신체 레벨도 그렇고. 지배욕 조절은 잘 되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너무 차이가 나. 일단 그런 집안에서 누나를 잘 봐줄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그는 기시감을 느꼈다.
잠깐. 이거 누가 많이 하던 고민인데…,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지금 아버지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잖아! 진짜 짜증 난다!!
‘이씨…, 원로원 인가를 받아내서 누나의 상속 권리라도 다시 회복시켜야겠어. 원로원에서도 두 팔 들고 환영하겠지.’
아무리 중앙이라면 덮어놓고 반대부터 한다지만 그 아브가니스잖아?
‘정 안되면 일단 내 재산 중에 일부라도 빼돌려서 지참금을 마련…, 했다간 누나한테 맞아 죽겠지.’
지금도 아슬아슬하다. 저 드러운 성질머리.
‘그러니까 적당히 우리 집에서 쥐고 흔들만한 남자나 만났으면 좋았잖아?’
하여튼 그렇게 얼굴 밝히다가 망할 줄 알았다. 맞아 죽지 않는 선에서 어떻게든 몰래 지참금을 넘겨줄 방법을 골몰하던 산체는 한참 만에야 돌아 나온 데제와 어색하게 눈이 마주쳤다.
“스테이지 다 깼어요?”
“아, 예. 방금 다 깼습니다….”
잠깐 할 얘기 있다고 들어가시더니, 그는 어김없이 너무나도 샤워한 직후인 모습으로 나오셨다.
이제 전혀 놀랍지는 않지만, 어색하긴 했다. 남의 신혼집에서 철판 깔고 버티고 있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배고프죠? 저녁 해줄게요.”
“저도 돕겠습니다.”
그래도 진짜 괜찮은 사람 같아. 산체는 한시름 덜었다. 사람 속 모른다지만, 열흘 간 지켜본 봐로는 일단 그랬다. 이제 진짜 슬슬 집에 돌아가도 될 것 같았다.
* * *
다음 날 늦은 아침, 비척비척 침실을 빠져나온 에라블은 부엌에서 데제의 커피포트를 멋대로 사용 중이던 산체와 눈이 마주쳤다.
“형은?”
보자마자 묻는 소리가 해맑다. 그녀는 천천히 산체에게 다가갔다.
“어디 가셨어? 뭐, 왜… 아! 아악! 왜 때려! 악!”
산체는 커피를 내리다 말고 등짝을 비틀며 도망 다녔다. 덕분에 온 거실을 뱅글뱅글 돌아야 했다. 가만히 서서 맞을 것이지 저게 아침부터 운동시키고 있다.
“악!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악!!”
마지막으로 한 대 더 쥐어박은 에라블은 서랍 깊숙하게 숨겨두었던 초콜릿 시리얼을 꺼내며 말했다.
“나 밥 먹을 거니까. 그동안 빨리 짐이나 싸. 네가 분명히 오늘 간다고 말했다.”
산더미 같은 초콜릿 시리얼에 초코 우유를 부으며 경고했다.
“안 가면 이번엔 진짜 가만 안 둘 줄 알아. 출항 스케줄 다 잡아놨으니까 빨랑 싸.”
“넌 지금 그걸 밥이라고….”
“딴소리하지 말고.”
산체는 한숨을 내쉬며 혀를 찼다.
“역시 아직 모르는구만, 쯧쯧.”
“뭐? 뭘 몰라?”
영문 모를 소리에 에라블은 인상을 썼다.
“벌써 다 싸놨거든?”
“웬일로?”
저게 그래도 좀 컸다고 약속을 지키는 산체가 되어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역시 이 우주는 기적과 이적이 횡행하는 무시무시한 곳인 것이다.
에라블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시리얼 그릇을 들고 TV 앞으로 가 로맨틱 4를 틀었다.
상큼하게 웃는 제임스의 얼굴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TV가 대문짝만해서 제임스 얼굴도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야한 동영상의 위협을 무릅쓰고 큰 화면을 고른 보람이 있다.
“…….”
“…….”
둘은 TV에 집중하느라 잠시 침묵했다. 조용해진 거실 안으로 제임스의 웃음소리가 발랄했다. 대문짝만한 제임스가 상큼하게 웃으며 해변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미친.”
산체가 감탄했다.
“저 새낀 날도 더운데 왜 맨날 모래밭을 뛰…, 아니, 멋있다고.”
매가 약이라고 재빨리 말을 바꾼 산체가 재차 감탄성을 흘렸다.
“어휴, 창피해.”
학교도 간신히 졸업한 산체가 주제도 모르고 한탄했다.
“진짜 이해가 안 되네. 형이 오천 배는 더….”
“닥쳐.”
내가 더 잘 아니까. 생눈으로 13레벨짜리 본체도 본 적 없는 주제에.
열흘 동안 저 작은 버밀리언 때문에 속을 끓인 에라블은 적개심을 불태우며 당에 충실한 시리얼을 씹어댔다.
“꺼져.”
“씨X 문장으로 말해줄래?”
“닥치고 꺼져.”
산체는 울화통을 터트렸다.
“형은 진짜 이런 게 뭐가 좋다고.”
“야, 넌 그걸 진짜로 믿냐.”
잡아떼는 말에 산체는 비웃음을 흘렸다.
“여기 방음 잘 되더라?”
“…갑자기?”
되물으면서도 함정을 감지하긴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둘이 방으로 사라지고.”
“…할 얘기가 있었어.”
“시도 때도 없이 씻고 나오고.”
“…….”
“대체 하루에 몇 번을 하는 거야?”
“뭐, 적합자니까.”
에라블은 애써 뻔뻔하게 대꾸했다.
“적합자는 나도 있거든?”
그렇겠지….
“대체 누가 그렇게 허구한 날 해대? 적합자끼리 그룹으로 엉기는 애들도 그렇게는 안 붙어있어.”
“…….”
“왜? 왜냐면 걔들도 공사는 구분하거든. 아침에 씻고 나가서 같이 씻고 퇴근하고, 저녁 먹기 전에 들어가서 씻고 저녁 먹은 다음에 또 둘이 사라지고.”
“그….”
“야, 사우나 직원도 그거보단 덜 씻겠더라. 무슨 목욕을 하루에 네 번씩 하고 있어.”
“…가끔 그랬어.”
“웃기고 있네.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만, 이 판국에 관계 부정은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니냐?”
“…….”
“그리고 대체 누가 그렇게 진성 노블한테 아침저녁 수발을 받아. 끼니마다 밥 차려줘, 과일 갈아줘, 뒷정리도 형이 다 하시고, 빨래에 집안일까지.”
잔소리가 너무 길다….
“야, 너 진짜 아무리 내 누나라지만 지금 되게 쓰레기 같애. 형한테 안 미안하냐?”
“…너 그 형 소리, 정말 그만해라.”
에라블은 받아칠 말이 없어 화자를 공격했다.
“계속할 건데? 뭐, 왜? 형이 시키신 거거든? 형한테 가서 따지시든가.”
그건 좀 힘들지…. 얘 때문에 괜히 호칭까지 털려 가지고…, 이계에선 쓰지도 않는 형 소릴 데제에게 해대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이 아주 심란했다.
이 와중에 산체가 또 통보하듯 말했다.
“됐고, 넌 빨리 아버지한테 전화나 해. 진짜 후회하기 전에. 난 분명히 경고했다.”
“알았어, 이따 할 거야.”
급격히 피곤해져서 TV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제임스가 여전히 상큼하게 웃어주고 있었지만, 의욕이 나질 않았다.
에라블은 다 먹은 시리얼 그릇을 밀치고 소파에 올라가 드러누웠다.
“난 한숨 잘 테니까, 이따가 깨워라. 오후 4시 출발이니까 여기서 2시엔 나가야 된다.”
“뭐? 또 잔다고? 지금까지 자다 나왔잖아?”
“어, 근데 아침부터 너 보니까 너무 피곤해. 어휴, 꼴 보기 싫어.”
“이…! 야악!!”
산체의 지랄을 귓등으로 흘리며 에라블은 어쨌든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 * *
몰른시에서 부상 이후, 에라블이 꾸기 시작한 악몽은 대체로 비슷했다.
과거에 겪었던 일, 생활했던 장소, 어쨌든 대체로 과거의 재조합이었다. 그런데 이건….
‘…….’
그녀는 화려한 대리석 벽을 만져보았다.
손끝이 차다. 고개를 올려 빛이 쏟아지는 까마득히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신전이었다.
정교하게 세공된 황금과 청옥. 쏟아지는 흰 빛을 받는 대리석 바닥은 유리 거울처럼 눈이 부셨다.
‘…장르가 돌변했는데?’
그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생츄어리 신전에 와본 적이 없었다.
아카데미 교과서에서 그림으로나 봤던 곳이다. 일단 난 정령계 소속이라고. 생츄어리 문턱도 밟아본 적이 없는데, 왜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거지?
요새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인가.
‘…….’
에라블은 손끝에 닿은 차가운 벽을 좀 더 꾹 눌러보았다. 돌려보니 손끝에 발갛게 자국도 남았다.
진짜 정신이 나간 건지도?’
정신과는 치료 비용이 어떻게 되지? 너무 많이 들면 곤란한데. 치료 기간은? 주 2회 이상은 시간 빼기 어렵다. 지금도 훈련 시간이 부족한데….
“버밀리언 영애.”
그녀는 차가운 대리석 벽에 머리를 박고 걱정하다가, 낯선 목소릴 따라 고개를 돌렸다.
몇 걸음 뒤에 금장식이 들어간 흰 후드를 뒤집어쓴 존재가 서 있었다.
사제였다.
그 옆엔 또 티테이블과 도자기 찻잔까지 세팅되어 있었고…. 에라블은 결심했다. 내일 당장 병원 예약 잡아야지.
“많이 다치셨단 얘길 들었는데, 다행히 몸은 괜찮아지셨나 보군요.”
“…저를 아십니까?”
“물론 알고 있습니다. 요즘 상위계에서 가장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
“예, 일단 앉으시지요.”
그가 의자를 가리키며 권했다.
시키는 대로 의자에 앉으며 에라블은 이 신적인 낯선 존재를 살폈다.
“사제님께서 제 꿈엔 어쩐 일이십니까?”
말만 사제지. 이들은 빛이라는 관념을 섬기는 신들이었다. 온갖 관념을 가진 판테온과 성질이 좀 다를 뿐, 신들의 모임이라는 건 똑같다.
판테온 하니까 중대장님이 생각났다. 머리는 잘 벗겨지고 있는지 내가 참 걱정이 많다.
“꿈이라고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