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아무래도 억압된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욕구불만이지 싶습….”
“아, 욕구불만이에요?”
데제의 질문에 에라블은 재빨리 얼굴을 숨겼다. 데제는 키득거리며 제 품에 숨은 동그란 머리에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두 팔로 끙, 소리가 나도록 꽉 끌어안았다.
“밥 먹게 천천히 나와요.”
그리고 그는 먼저 침실을 빠져나갔다. 최근 그는 3명분의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
얼른 일어나 따라 나가고 싶었지만…, 약이 없어 무리였다.
“누나!”
망할….
“아, 빨리 일어나! 지금 시계가 몇 시야!!”
차라리 양두머리가 낫지.
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에 에라블은 귀를 막으며 질끈 눈을 감았다.
“일어나라고 빨리!! 야, 에라블!!”
이런 씨…!! 에라블은 우거지상을 쓰며 벌떡 일어났다.
“누나!!”
“일어났어.”
그니까 꺼져. 같이 소리를 지르지 않기 위해 온 우주의 힘을 끌어모아야 했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욕실로 들어가 대충 세수를 한 다음 그녀는 잔인한 현실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부엌에 산체가 서 있었다.
데제와 함께.
“빨리빨리 좀 일어나, 빨리빨리.”
산체는 식탁 앞에 서서 데제가 구운 찹스테이크 몇 점을 포크로 찍어 먹으며 그 곁에서 조잘대고 있었다. 저 망할 놈의 애새끼….
“뭐 한다고 맨날 늦잠이야?”
열흘, 산체가 그에게 완전히 넘어가는 데 걸렸던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열흘 동안이나 이 집에서 안 가고 버티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슬슬 죽여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형, 저거 밥 주지 말고 그냥 굶겨 버리시죠.”
저저, 저 새끼가 진짜…. 에라블은 다시 질끈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내가 누나 먹이는 낙으로 사는데, 그건 안 되지. 에라블 얼른 앉아요.”
데제가 요리용 집게로 고기를 뒤집으며 웃었다. 청아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소였다. 에라블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예….”
이 사람이 밤새 침실에 같이 있던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정말 믿기 힘들었다.
“하여튼 게을러 터져 가지고, 쯧쯧. 너 그렇게 버릇 나빠져서 대체 어쩌려고….”
“잘 잤니?”
에라블은 끝도 없이 시비를 거는 동생을 다정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뭐야, 왜 이래. 미쳤어?”
“자는데 혹시 불편한 건 없었고? 있으면 꼭 누나한테 말해주렴.”
“하지 마.”
“누나가 너무 걱정돼서 그래.”
“아, 하지 말라고!”
산체 놈이 다소 불행해진 듯해 에라블은 약간 행복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앉아서 식사해요.”
데제가 둘 사이를 가르고 접시를 내려놓으며 에라블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 달아올랐다.
물론 아주 역겨워하는 산체와 눈이 마주치고 금세 다시 차분해지긴 했다.
“아우, 적응 안 돼. 저 얼굴에 진짜 괜찮으세요?”
“왜, 난 귀엽기만 하다니까.”
“으으.”
미식거려, 소름 끼쳐, 호들갑을 떠는 산체에게 에라블은 다정하게 권유했다.
“그럼 이만 집에 가지 그러니?”
“아. 형. 제가 오늘 진짜 끝내주는 게임 하나 찾아놨는데, 저녁에 시간 되세요?”
“그럼요.”
에라블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데제가 긴 손가락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난스럽게 머리칼을 흩트려 놓았다.
* * *
79점, 트레이닝을 마친 에라블은 고장 난 점수판 대신 전화기를 쳐다봤다. 카밀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안 받으니 문자가 쏟아졌다.
<너 진짜 전화 안 받을 거야?>
<기사 진짜야?>
<진짜 결혼하냐고!!>
에라블은 상급자의 번호를 수신 거부해놓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보스 스테이지?”
“네, 네네. 그 왼쪽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와, 근데 전 졸업템에 풀 도핑인데도 부활템 다 썼는데. 아직 하나도 안 쓰셔죠?”
아마 저래서겠지. 에라블은 흐린 눈으로 현관 앞에 서서 거실 풍경을 바라보았다.
커피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맥주 캔 몇 개, 과자 봉지, 그리고 산체가 좋아하는 류의 게임….
데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양과 신나게 놀아주고 있었다.
자주 사람의 숨통을 꺾어놓는 길고 곧은 손가락으로 게임 패드를 움직이던 그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며 웃었다.
“왔어요?”
산체도 돌아보고 시비를 걸어왔다.
“뭐야, 왜 저러고 서 있어?”
쥐어박고 싶다…, 진짜.
“아. 누나, 아버지가 전화 좀 받으래.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그야 아버지도 수신 거부해 놨으니까.
“연결식 겨울이 괜찮다고 하시던데. 아버지한테 전화 좀 해봐.”
“그래.”
한 오백 년 뒤쯤에 해보겠다. 에라블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인내심을 끌어올리며 물었다.
“넌 집에 언제 가니?”
“나? 나 안 가면 안 돼?”
“응, 안 되지.”
“왜? 왜 안 돼? 나 가기 싫은데.”
“가기 싫어?”
“응.”
“그럼 기다려 봐. 누나가 좋은 데로 보내줄 테니까.”
삼시세끼 콩밥 잘 나오고, 일주일에 한 번쯤 산책도 시켜주고, 시설도 좋은 그런 곳으로 찾아봐야겠다.
제 입으로 처넣으라고 소리친 전적도 있으니, 이 기회에 재빨리 처넣어주면 되겠지.
이 얼마나 동생의 의견을 너그럽게 수용해 주는 훌륭한 누나인가.
“내일 갈게.”
“괜찮아. 누나가 보내줄게.”
“아니야, 나 집에 가고 싶어. 그니까 그 패드 좀 내려놔 줄래? 그건 왜 허구헌날 들고 난리…, 나 진짜 내일 간다니까? 진짜 진심이야, 누나. 한 번만 봐죠, 내일 꼭 갈게요.”
“그래, 잘 생각했어.”
그 사이 데제는 혼자 2페이즈로 진행된 보스를 깼다.
1페이즈의 인간형을 벗고 괴수 형태인 2페이즈로 진행된 보스는 거대한 몸체를 바닥에 누인 채 잠잠했다.
불쌍한 보스를 죽여버린 그가 가볍게 패드를 내밀었다.
“한번 해볼래요?”
“누나 이 게임 못해요. 튜토리얼도 못 넘어간다니까요. 자기가 못하는 거면서 왜 사서 고문당해야 하냐고 화나 내고. 하여튼 성격 진짜, 와, 이거 어떻게 깨셨어요? 2페이즈 완전 어려운데.”
산체가 기회는 이때라는 듯 열심히 흉을 보다가, 데제가 혼자 잡아 놓은 보스를 보곤 또 흥분했다. 진짜 세게 때려주고 싶다….
“두 사람 정말 사이 좋네요.”
“그렇습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 데제는 재밌다는 듯 웃기만 했다. 에라블은 어색한 얼굴로 옷 갈아입는다는 핑계를 대고 터덜터덜 침실로 향했다.
“2페이즈가 어렵긴 하지?”
“예, 예 맞아요, 진짜. 인간형은 그나마 괜찮은데 2페이즈 괴수형은 패턴 미쳤어요.”
분명히 개들하곤 상관없는 게임이긴 한데 뭔가…. 상황이 비슷해.
에라블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아주 신난 산체의 목소리에 한숨을 삼켰다.
오는 첫날 그렇게 두들겨 패 가며 경고를 했는데, 싹 다 잊어버린 산체 놈의 지능에 문제가 있는 게 확실했다. 그날 머리를 때리는 게 아니었지. 얼마 없던 뇌세포마저 싹 다 죽어버린 게 틀림없다.
데제와 사이좋게 게임이라니. 이 무슨 공포…스럽지만 며칠째 보고 있는 광경이라 더는 놀랄 기운도 없었다.
그나마 인식 장애는 계속 돌려주고 계셔서 다행이다. 13레벨 그대로였으면 지금쯤 저게 무릎 꿇고 사랑 고백이라도 했을걸.
갑자기 서핑을 잘한다던 마지아가 떠올라 에라블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후….’
코를 흡-, 들이마시며 눈가를 부빈 에라블은 간단히 세수라도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려다가 데제에게 얼굴을 붙들렸다.
“울었어요?”
저사양의 신체 감각이 느리게 상황 파악을 하는 동안 입술이 빨렸다.
“왜 울었어요? 내가 동생 죽일까 봐?”
입술 사이로 데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타액이 투명한 실처럼 붙어 늘어졌다.
“그….”
섬뜩한 질문에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뒷골이 저리며 다시 온갖 생각이 희미해졌다.
“뭘 울어요.”
그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낯으로 식은땀에 젖은 머리칼을 넘겨주었다.
“울지 말아요, 안 죽일게요.”
살살 달래면서….
식은땀에 젖은 목덜미에 코를 묻고 그는 연신 달래는 말을 속삭였다.
“…다치게 안 해요. 당신한테 소중한 거, 다치게 하지 않을께. 응?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말아요.”
“데제….”
에라블이 울먹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안도했지만, 잠시였다. 그가 체중을 눌러오고 있었다.
“그….”
“응, 걱정하지 말라니까.”
경직한 그녀의 귓가에 속닥이며 그가 웃었다.
* * *
‘…이 집 방음 진짜 잘 되네.’
그즈음, 거실에 혼자 남은 산체는 번민하고 있었다.
누나와 한 공간에 있는데 이렇게 쾌적한 건 진짜 처음이었다. 에라블 버밀리언을 그럭저럭 멀쩡한 공간에서 살게 만든 것부터 합격점이다.
무엇보다 열흘 넘게 이 집에서 버티며 목격한 것이 있는 산체는 이 아늑한 빌라에 불평할 수 없었다.
‘…….’
산체는 게임 패드를 내려놓고 뒷머리에 깍지를 꼈다.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