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되지도 않는 폭력을 행사하는 대신 에라블은 핸드폰 모서리로 꾹 자기 미간을 눌렀다. 얼굴은 새햐앟게 질려선. 산체는 겁먹은 그녀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왜 이래. 너네 사단장이 대단한 사람인 건 아는데, 그래도 너랑 등급 자체는 비슷할, 악!”
이마를 부여잡으며 산체는 비명을 질러댔다.
“무슨 짓이야!”
에라블은 기어이 핸드폰 모서리로 산체의 이마를 야무지게 찍어버렸다.
“왜 때려! 내가 뭐 틀린 말 했다고 사람을 때, 악! 때리지 마! 때리지 말라고!”
“이 새끼가!”
그리고 욕을 바가지로 퍼붓기 시작했다.
경호진들은 아무도 에라블을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힘 빠지는 건 에라블뿐이었음으로.
신체 레벨 차이가 갯지렁이와 백상아리 수준이라 모시는 도련님에겐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심지어 괜히 끼어들었다간 아가씨는 선을 긋고 도련님은 그들에게 성질을 부릴 것이다.
경호원들은 익숙하게 남매의 일을 못 본 척했다. 체면을 지켜야 할 외부인도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새끼가 괜히 수도에는 쳐 기어 올라와서는!”
아가씨는 거칠 것 없이 욕을 퍼부어 댔다. 군 생활을 몇 년 해서인지 신박한 욕이 많았다. 그렇게 한참 쌍소리를 뱉어낸 다음 협박을 던졌다.
“아무것도 하지 마! 알았어?! 그냥 입 닥치고 가만있으라고! 뭐라도 해 봐. 외행성 교도소에서 수백 년은 썩게 만들어 줄 테니까. 농담 아니야. 적당한 건수 잡아서 뒤집어씌우는 건 일도 아니고.”
이 협박에는 경호원들도 조금 불편해했지만, 역시 말리지는 않았다.
안전한 지배 행성에서 살아온 산체를 위해서였다.
그들도 만약 진짜 아브가니스를 만나게 될 줄 알았다면 그냥 돌아가라는 에라블의 경고를 진지하게 들었을 터였다.
“혀, 협박이 너무 과하잖아.”
“닥쳐!”
에라블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경고했다.
“얌전히 있는 거야, 알겠어?”
“아, 알았어.”
기세에 눌린 산체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하지만 대답을 듣고도 에라블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산체의 표정도 조금씩 어두워져 갔다. 그는 에라블 버밀리언이 이러는 것을 생전 처음 보았다.
그의 나이 15살 때 버밀리언 가로 입적한 에라블은 늘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이래도 저래도 아무 상관 없다는 태도였다.
원로원이 압박을 하기도 전에 유산 포기 각서를 작성해 도장 찍고 공증까지 해버린 사람이다.
그 뒤로도 아버지만 아니면 가문 따위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말도 없이 진로를 결정하곤 어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외우주 아카데미로 가버리더니 그것도 모자라 몇 년 전엔 갑자기 툭 통보만 하곤 입대까지 해버린 사람이었다.
산체에게 에라블은 불가해한 미지의 세계였다.
그녀가 바라는 건 언제나 하나였다.
원래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산체는 처음엔 그 원래 세상에 뭐 대단한 거라도 있는 줄 알았다. 버밀리언 가 따윈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부나 명예, 권력, 뭐 그런 것.
언젠가 슬쩍 물어봤다가 욕만 배 터지게 얻어먹었었다.
개소리할 거면 꺼지라고 하길래, 내 집인데 내가 왜 꺼지냐고 너나 나가라고 했다가 누나가 진짜 나가버리는 바람에 거의 한 달 동안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야만 했다.
너네 집에 내가 왜 들어가냐는 말만 거의 백 번쯤은 들었었고. 에라블 버밀리언은 뒤끝이 아주 더럽게 길다….
“…….”
문득 떠오른 안 좋은 기억에 산체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순간 울컥해 노려보니 눈이 마주친 에라블이 에휴, 한숨을 내쉬었다. 약만 더 바짝 올랐다.
그니까 저게 이럴 정도면 대체 뭐가 어떻다는 거냐고, 그 사단장이란 사람은.
아까 전화 목소리는 되게 간질간질하던데.
산체는 좀 전 들은, 훔쳐 들은 건 아니었다. 바로 옆에서 전화 통화하는데 들리는 게 당연했다. 하여간에 통화 내용을 떠올려 봤지만 짚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데제브 아브가니스, 아브가니스 후작 가의 하나뿐인 적자. 평판도 좋고 그만큼 사생활도 나무랄 데 없이 깨끗했다.
산체는 수도로 오는 길에 나름 신경이 쓰여 조사를 좀 했고, 역시 다 오보라는 기존의 결론을 재확신했었다.
데제브 아브가니스는 이상적인 제국의 최상위층 귀족이었다.
이세계 탈출이 인생 목표인 누나가 제 선 안에 엮어 넣을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쪽 역시 마찬가지로 누나를 원할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리고 어디에도 에라블 버밀리언이 저렇게 발작을 일으킬만한 부분은 없었다.
사실 알고 보면 막 미친놈인가? 아니야.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저 인간이 이럴 리가 없어.
산체는 최악에 최악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가 호텔에 도착할 때쯤, 산체의 머릿속엔 당장 정신병원에 수감 돼야 할 미친 사이코패스가 탄생해 있었다.
“에라블.”
해서 호텔 로비에 서 있는 화려한 미모의 남자를 봤을 때, 산체는 잠시 인지 부조화를 겪었다.
빛을 삼키는 것처럼 새카만 머리칼, 서늘하게 뻗은 눈매, 진줏빛 피부. 그린 듯한 이목구비에 그늘진 음영까지도 아름다운 남자였다.
사진으로 봐서 보기 드문 미형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일찍 왔네요?”
이건 너무…, 엄청난 미모의 남자가 누나에게 살살 녹일 듯 다정하게 말을 걸고 있었다.
산체는 제 누나에게 이렇게 구는 남자를 처음 보았다. 남자는 대 놓고 눈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에라블은 모태솔로였다. 덕질하는 연예인만 삼천 명이었지, 연애 비슷한 것도 해본 적이 없다.
산체는 작게 입을 벌리고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 완벽한 남자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제 시스터의 뺨에 입술을 맞추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경 나 지금 눈이 어떻게 됐나 봐. 우리 누나가 엄청난 미인한테 지금….”
“저도 지금 보고 있습니다….”
말소리를 들었는지 남자가 이쪽으로 시선을 주며 흐리게 눈꼬리를 접었다. 씨X 심쿵…, 산체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방금 심장의 위협을 느꼈다! 이게 바로 누나가 말한 덕통 사고인가!!
산체는 덕질하는 에라블의 취미를 당장 이해할 것만 같아 몹시 두려워졌다.
* * *
“집?”
20여 분 전, 호텔 파라곤 로비.
생츄어리 수도사의 사체를 구둣발로 밀며, 데제는 마치 전혀 예상 못 했다는 듯이 되묻고 있었다.
더 웃긴 건 빤히 예상하고 미리 개들까지 다 풀어놓은 와중에 진짜로 기분이 나빠지고 계신다는 점이었다.
에라블 입에서 딴 남자와 집에 간다는 얘길 들으니 새삼 빡치시는 모양이었다.
개들은 그런 데제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아, 거기. 관리 안 된 빈집이잖아? 동생 수도에 처음 올라왔는데 그런 데서 지내게 하게?”
그가 짓이긴 시신을 발로 밀었다.
“멀쩡한 집 두고 하나뿐인 동생을 그런 데서 지내게 할 순 없지. 일단 저녁부터 먹이죠. 동생 데리고 호텔로 와요. 주소 보낼 테니까.”
태연하게 통화를 끝낸 데제는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곤 구역질을 해댔다.
물론 자기가 짓이겨놓은 사체 때문은 아니었다. 최근 데제는 에라블이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걸 보면 토하는 병이 생겼다.
로비 쓰레기통에 빈 토사물을 쏟아낸 그는 생수로 입안을 대충 헹궈 뱉어놓고, 버릇처럼 담배를 물었다.
“빨리 치워.”
처리팀이 주위를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데제는 가만히 있다가 불쑥 물었다.
“입적한 양녀가 적자하고 결혼할 수 있긴 하지?”
데제의 흐릿한 시야와 마주하니, 아리에스는 솜털이 곤두섰다.
“파양하기 전엔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파양을 한다 해도 절차에만 한 5년 걸릴 거고요. 양자와 친자가 눈 맞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노블들이 제도적으로 여러 가지 장난질을 쳐놨습니다.”
“그래?”
어쨌든 파양하면 된단 소리네, 데제는 어린 버밀리언의 영식과 에라블이 눈 맞을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리에스는 조용히 감시 중이던 랩탑 화면을 데제 쪽으로 돌렸다.
[이 새끼가 아주 정신 상태가 무지개 꽃동산… 씨X… 수도에는 괜히 쳐 기어 올라와… 인생이 아주 만만… 주둥아리를… 확…!]
잠시 정적이 흘렀다.
로비를 비워놔서 참 다행이었다. 뭐, 어쨌든 아리에스의 행동은 불필요한 일이긴 했다. 데제도 똑같은 화면을 보고 있었으니까.
“분쟁지역에 있더니 욕이 엄청 늘었습니다.”
“욕은 원래도 좀 했어.”
아리에스는 에라블이 데제 앞에서 욕을 어떻게 한 건지 엄청나게 궁금해졌다.
“근데 웬 관심이야?”
데제가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아리에스는 결백을 위해 자신이 최근 만나는 애인 사진을 보여드렸다. 신체 6레벨, 주인과는 다르게 그의 시력은 정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