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그게 뭔지…?”
의사가 자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데제께 직접 여쭤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안 여쭤본 이유에 대해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야.”
물어볼 수가 없었다.
“선생님께서 대신 물어봐 주시면 안 될까요?”
“말씀이 너무 지나치시네요.”
의사는 정색했다. 거의 길 가다가 낯선 사람한테 장기 매매를 부탁받은 얼굴이었다.
에라블은 옅은 분노와 공포와 두려움이 뒤엉킨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의사는 아주 이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절대 사람이라고 여길 수 없는 짐승의 구강구조였다.
“선생님, 이빨 보이십니다.”
조심스러운 지적에 의사는 화들짝 놀라 입을 가렸다. 에라블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저, 그, 그….”
“진정하세요.”
“…약 드리겠습니다.”
그는 심호흡하곤, 서랍에서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투명한 플라스틱 약통을 꺼내 건네주었다.
“…….”
에라블은 그것을 손에 쥐고 또 한참 내려다보았다. 검붉은색 알약 일곱 개….
이게 도대체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다.
“내 몸뚱이 갈라서 실험하는 취미는 없습니다.”
이건 눈치를 채고 못 채고,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해가 떠서 아침이 오는 걸 보고 있는 기분에 더 가깝다.
에라블은 한동안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또 물도 없이 한 알을 꿀꺽 삼켰다.
“여기 물….”
물잔에 물을 따르던 의사가 그 모습을 보곤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잘 드시네요….”
“익숙해서.”
한때 프로 약쟁이였다.
“그럼….”
띠띠-, 인사를 하던 에라블은 불쑥 울리는 알람음에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찾아 쥐며 몸을 일으켰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예, 건강 잘 챙기시고요. 식사 잘하셔야 합니다.”
에라블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진료실에서 돌아 나오며 전화를 받았다.
“어, 백작님? 응. 전화? 뭐, 무슨 소리예요. 내가 전화를 언제 안 받았다고.”
백작은 받기 무섭게 화를 쏟아냈다. 대체 며칠을 안 받고 전화를 피하는 거냐면서. 뜬금없이 쏟아지는 누명에 에라블은 억울해졌다.
“걸려온 거 없었거든? 통신 문제겠지. 왜. 우리 백작님이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셨을…, 뭐?”
에라블은 전화기를 든 채로 굳었다.
“뭐라고, 누가 어딜 온다고?”
* * *
제타-위성, 통합 스테이션.
1,200km에 달하는 수도의 통합 스테이션은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고정 게이트의 좌표 관리와 민간의 검열 및 입국 절차를 위해 개발되었다.
수도로 들어오는 모든 민간 우주선은 제타-위성을 통해야 한다.
수도에서 제일 복잡한 곳 중 하나였지만, 당장은 두어 명의 공항 직원을 제외하곤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제국 귀족, 주요 인사, VVIP를 위한 출입 통제 구역이었기 때문이다.
에라블은 가주 전용선에서 내리고 있는 산체를 빤히 쳐다보았다. 새끼가 아빠 배 끌고 왔네.
“뭘 봐?”
눈이 마주치자마자 산체가 시비를 걸었다.
“왜 오셨어요.”
에라블은 공항 직원들의 눈을 의식해 순혈 노블에게 존댓말을 구사했다.
“뭘 왜 와? 누나가 사고 쳤으니까 왔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산체한테 저딴 소리를 듣다니… 새삼 인생에 회의감이 들었다.
“됐고요, 왜 오셨어요.”
“좀 더 공손히 물어봐 줄래? 무릎이라도 꿇으면 더 좋고.”
“진짜 꿇어 드려요?”
“아니요….”
급격히 쭈글해진 산체가 눈치를 살폈다. 왜냐하면 에라블이라면 진짜 꿇고도 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요히 빡쳐서 사람 취급도 해주지 않겠지.
“저 관광 왔어요. 아버지가 누나 기사 보더니 빨리 가보라고 떠밀어주시더라고요. 뭐 그런 기사가 다 나셨어요, 고맙게. 아, 누나 나는 가고 싶은데 진짜 많아. 다 체크해왔음.”
“돌아가세요.”
“아, 왜에, 나 수도 어렸을 때 오고 처음이란 말이야.”
“바로 출항 스케줄 잡아드리겠습니다.”
“나 안 가.”
그리고 산체는 빠르게 옆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지금 어딜, 기다…, 기다리라니까!”
산체는 나름 고위 AT 계열 노블이었다. 일반인보다 다리가 아주 조금 더 길다는 뜻이다.
벌써 멀어지고 있었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에라블은 다급하게 쫓아 나갔다.
진짜 저 웬수같은 새끼!
경호진들도 옆을 지나쳐가며 눈인사를 해왔다. 에라블은 반사적으로 마주 인사하면서 말했다.
“도련님 그냥 다시 집에 모시고 가면 안 됩니까? 수도에서 무슨 관광입니까.”
어떻게든 수도에 줄을 대려는 지방 귀족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제국이었지만, 버밀리언 가는 그와는 전혀 반대 노선을 걷고 있는 집안이었다.
“백작님 허락하에 오신 거라서요.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월급쟁이가 별수 있나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같은 노동자끼리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기엔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출구를 빠져나간 산체가 대기 중인 차에 들어가 앉고 있었다. 에라블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당연히 백작가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수도라고 발작을 일으키는 건 늙은 원로원 정도였다. 백작령 사람들도 알음알음 관광 정도는 하고 사는 것이다.
직계라 원로원의 감시를 피하지 못한 산체가 불쌍할 만도 한데, 그녀는 원로원만큼이나 펄쩍거리고 있었다. 이해하지 못한 건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약 1시간 전, 그녀는 열과 성을 다해 백작을 설득했었다.
하나뿐인 귀한 후계자를 어딜 보내느냐고. 절대로 안 된다고. 보내면 나 우주선 앞에 배 깔고 누울 거라고. 그러자 양부는 출발은 이미 한참 전에 했고, 오늘 5시쯤에 도착 예정이라고 전해주었다.
에라블은 통화가 끝나자마자 제타-위성으로 날아온 참이었다.
“이야, 역시 수도가 다르긴 다르네.”
그들을 태운 차량은 곧바로 위성 107S로 향했다.
백작은 또 데제와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둘은 함께 사는 중이었고, 그가 거주 중인 집의 위치를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에라블은 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때깔 봐라.”
산체는 태평하게 도로가 깔린 상위계를 구경하며 속을 긁어댔다.
“일단 누나 집부터 확인하고 밥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확인하긴 뭘 확인해! 씨X, 그냥 집에나 쳐 가!”
“어휴, 외부인 없다고 바로 본색 드러나는 것 좀 봐.”
“이 씨X!!”
에라블은 울화통을 터트리다가 움찔했다. 전화가, 전화가 오고 있었다…. 그, 그에게서 전화가….
“예, 데제.”
벌벌 떨며 두 손으로 공손히 전화기를 붙들면서도 에라블의 목소리만은 담담했다.
[동생 만났어요?]
“지금 만났습니다.”
[어디에요?]
“지금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집?]
“예, 버밀리언 사택으로….”
옆에서 산체가 수도에 우리 집이 있었냐고 조잘대는 것을 무시하며, 에라블은 전화기만 꽉 붙들고 있었다.
[아, 거기.]
그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관리 안 된 빈집이잖아? 동생 수도에 처음 올라왔는데 그런 데서 지내게 하게?]
그들도 안 간지 벌써 1년이 넘어서 아마 전보다 더 먼지 구덩이가 됐을 테지만.
“괜찮습니다.”
[동생은 아닐 텐데.]
그가 웃고는 말을 이었다.
[나도 아니고. 멀쩡한 집 두고 하나뿐인 동생을 그런 데서 지내게 할 순 없지. 음, 일단 저녁부터 먹이죠. 동생 데리고 호텔로 와요. 주소 보낼 테니까.]
“예, 바로 가겠습니다.”
마음과는 달리 입은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에라블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전화가 끊어지고도, 그녀는 한참 끊긴 전화기를 붙들고 얼어 있었다.
“뭐야, 왜 그래? 누구 전환데?”
산체가 옆에서 쨍알거렸지만, 에라블은 그저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 * *
“내 말 잘 들어.”
한참 만에야 입을 연 에라블은 주의사항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심각한 그녀와는 달리 산체는 재밌기만 했다.
“아. 너랑 열애설 터진 그 피해자분이었어?”
“…뭐, 피해자?”
산체는 에라블의 뻔뻔한 반응에 혀를 찼다.
“그럼 피해자지. 나도 기사 다 봤거든? 남의 혼삿길을 그렇게 막으면 돼?”
“막아? 내가, 사단장님을?”
“혹시 앵무새야?”
왜 자꾸 사람 말을 따라 하냐고 짜증을 낸 산체는 이어 줄줄이 훈계를 늘어놓았다.
“오해를 받았으면 빨리 집에 연락해서 해명 기사를 내던가, 입장표명을 하던가, 뭐라도 하게 했어야지. 좋다고 가만있으면 어떡해? 누나 그렇게 얼굴 밝히다가 큰일 나.”
“…….”
“아브가니스는 중앙 귀족 중에서도 최고위 가문이라고.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면 남은 평생을 빚쟁이로 살아야 해.”
“내가…, 사단장님 명예를 훼손시킨다고….”
“왜 이래, 정신 차려. 진짜 고소당하면 갚는 것보다 이자가 더 빨리 늘어날, 아니, 난 걱정이 돼서 그러잖아. 핸드폰은 왜 또 치켜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