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여유가 있나 봐요?”
“기, 긴장돼서….”
도피성이었다. 일종의 생존 본능일 수도 있다. 너무 자극이 심해서 피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한테 집중해요.”
“흐윽….”
열심히 집중했는데도 그는 만족해하지 않았다. 축 늘어져 그녀의 등 위로 엎어지며 그가 또 불평했다.
“…아, 힘들어.”
혹시 내가 지금 말을 했나. 그의 늘씬하지만 커다란 몸 밑에 깔린 채 에라블은 아연히 생각했다.
어이가 없어 멍하니 풀린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에라블의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 그리곤 제 뺨을 톡톡 두드린다.
“…….”
이 아연한 와중에도 진짜 정신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흐트러진 젖은 머리칼에 흐리게 번져있는 검은 눈동자와 붉게 달아올라 있는 눈꼬리…, 침대 위에서 그의 얼굴은 지독하게 야했다.
“이렇게 보는 것처럼 예뻐해 주면 참 좋을 텐데.”
데제가 서운한 듯 말하며 제 뺨을 한 번 더 톡 두들겼다.
에라블은 화들짝 상체를 세워 그 뺨에 입술을 눌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죽겠다 진짜. 질끈 감은 눈에 눈물방울이 콧잔등을 타고 뚝 떨어졌다.
“힘들게 참아주고 있는데 왜 울어.”
그가 에라블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에라블.”
“예, 예?”
“주말에 약속 잡지 말아요.”
“…….”
그가 귓가에 대고 온종일 할 거라고 중얼거렸다. 밥도 침대 위에서 먹일 거라고.
“…소화제를 한번 먹어 보겠습니다.”
“그 버릇 못 고치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했지.”
“그럼 한 번만 봐주시면….”
“대체 체력은 언제 늘어?”
센터는 뭐하러 다니냐고, 데제는 담배를 꺼내 물며 연신 불평해댔다.
“80점 언제 맞을 거예요?”
“기계가 고장 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리는 없지.”
“…….”
그가 코웃음을 치며 당겨 안았다. 느릿느릿 등허리를 쓸어주는 그의 손길에 에라블은 조금씩 눈을 깜박였다.
토닥이는 손길이 신경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내일 센터 빠질래요?”
그가 슬슬 잠이 드는 귓가에 대고 속삭이며 꼬셨다.
“하루 정도는 괜찮잖아, 응?”
너무 졸려서 그의 말이 멀게 들렸다. 그가 뭐라고 작게 투덜거리며 당긴 고개를 제게 기대게 했다.
그 손길에 따라 그의 목덜미에 툭 저항 없이 고개를 기대며, 에라블은 껌벅껌벅 잠에 빠져들었다. 잠결에 부비적부비적 그의 품에 조금 더 파고들기도 한 것 같다.
“…자기가 무슨 짓 하는지도 모르고.”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에라블은 그럭저럭 상황을 지나 보내고 있었다.
빵틀로 찍어낸 듯한 79점에도 이제 익숙해졌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과거 기억을 헤매고 다니는 것에도, 그때마다 그의 품 안인 것에도…, 그리고 온갖 제목의 기사를 보고도 더는 머리를 쥐어뜯지 않게 되었다.
쥐어뜯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 * *
백작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기사의 헤드라인을 읽으며 포기하지 않고 다시 꾹꾹 전화번호를 눌렀다.
역시 전화를 받지 않는다.
모든 번호를 다 받지 않는 거로 봐선 통신 문제이긴 했다. 누가 이쪽 행성계 신호를 싹 차단한 미친 짓을 한 게 아닌 이상, 통신 문제겠지. 그렇다고 약이 안 오르는 건 아니었다.
“얘가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게야!”
벌컥 소리치는 백작의 입매가 씰룩쌜룩하다. 누가 봐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기 힘들어 보였다. 그야 이 세계엔 발도 안 붙이려 드는 양딸의 연애는 희소식일 수밖에 없었다.
백작은 십수 장이나 쌓인 영식들 프로필을 밀어 치우곤, 연신 새 기사로 갈리는 뉴스 창을 보며 입매를 씰룩거리다가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하지만 하필 상대가.”
아브가니스는 권력의 중심에 있는 집안이었다. 이런 집안에서 애를 받아줄 리가 없는데….
[애초에 분쟁 지역에 오지 못하도록 제가 막았어야 했는데….]
어쩐지.
[소위는 이제 제가 잘 보호하도록 하겠습니다.]
낌새가 있긴 했지.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뭔데 자기가 애를 보호하겠대? 입꼬리가 올라가다가,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그럼 처음부터 못 가게 막을 것이지, 왜 애를 그런 위험한 곳에 보내?
제 양딸의 고집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백작은 그런 허물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뭔, 괜찮은 젊은이 같긴 했어. 평판도 좋고. 오락가락하는 백작을 지켜보던 산체가 불쑥 손을 들었다.
“제가 수도에 한 번 다녀올게요, 아버지.”
백작은 하나뿐인 친아들을 약간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카데미 다닐 때와는 달리 이젠 제법 어른스러워진 아들이었지만, 그래도 아주 약간의 의구심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난린데. 누구 한 사람은 가서 확인해 보고 와야 하잖아요. 누나 성격에 통화돼 봐야 소용없을걸요. 바쁘니까 끊으라고나 하겠지. 그니까 제가 가서 직접 보고 올게요.”
쓸데없는 소릴 하는 아들을 노려보던 백작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수도까지 가는 데 오래 걸릴 텐데.”
“초장거리 뛰면 금방이죠.”
산체는 가볍게 말했다.
“가주 함선 내주시면 못해도 한 달이면 도착할 거에요. 진짜면 대박이잖아요. 아버지도 누나 선 자리 밀어 넣는 거 더 고민할 필요도 없고.”
고민해봤자 될 일도 아니었다. 영식들 프로필을 제아무리 뒤져봐도 소용없는 일이다.
“누나가 순순히 선 자리에 나갈 리가 없어요.”
산체는 백작도 빤히 아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억지로 밀어 넣으면 아버지한테 중매가 물밀 듯이 들어올걸요? 결혼하고 싶으면 아버지나 하시라고 누나가 그랬거든요. 결혼 정보 업체 해킹하는 거야 일도 아니잖아요. 아마 한 3년은 시달리실 거예요.”
확인 사살이었다. 지어 산체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한 확인 사살이었기 때문에 백작의 결론이 더욱더 빨랐다.
“원로원은 내가 알아서 막으마.”
산체르타 버밀리언의 수도행이 그렇게 결정되었다. 출발은 그보다 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극성스러운 원로원이 눈치 때쯤엔 이미 가문의 지배 행성계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기 위해서였다.
“아가씨께선 괜찮으시겠죠?”
산체를 어렸을 때부터 보필해 온 경호 및 보좌진들은 에라블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그녀가 백작가에 들어왔을 때 산체르타 버밀리언은 딱 15살이었는데, 그때 산체는 중2병을 아주 위독하게 앓고 있었다.
중병이 큰 사고 없이 치료된 건 전적으로 에라블의 공이었다. 병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경호 및 보좌진들이 그녀에게 호의적인 이유였다.
“와, 설마 경은 그 스캔들을 진짜로 믿어?”
산체는 어이가 없었다.
“예? 그럼 도련님께선 안 믿으십니까.”
“당연하지, 그걸 누가 믿어. 그 데제브 아브가니스야. 그 가문이 소유한 행성계가 몇 갠 줄이나 알아? 제국에 아홉 개밖에 없는 제후 가문 중 하나라고.”
산체는 코웃음을 쳤다.
“아버지 눈에 뭐가 씌어서 지금 그걸 그대로 믿으시는 거지. 누나가 뭐 볼 게 있다고 그런 남자를 낚아챘겠어? 분명히 마음 약해서 쓸데없는 일에 휘말렸을 가능성이 99%일 걸? 아버지한테 휘둘리는 거 봐. 안 봐도 뻔하지.”
“아가씨께서 그렇게 말랑한 성격은 아니시잖습니까.”
“경이 뭘 모르는 거야. 누나가 되게 멍청할 정도로 마음이 여려. 특히 자기 좋아해 주는 사람한텐 엄청 약하다고.”
“…아, 예에.”
유산 포기 각서부터 외우주 아카데미에 입대까지…, 극성인 지배 노블들 사이에서 결국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작은 여자를 떠올리며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어 물었다.
“그럼 수도엔 왜 가십니까?”
“응? 이때 아니면 언제 가봐.”
산체는 왜 당연한 소릴 묻냐는 듯 대꾸했다.
“신년제 때 한번 가보겠다는 것도 절대 못 가게 하는데. 누나 핑계 대고 이 김에 수도 공기 좀 맡아 보는 거지. 뭐 얼마나 대단한 공기길래 그 몸을 하고 기어이 올라갔는지.”
궁금하잖아.
산체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 * *
“왼쪽 팔 한번 들어보세요. 예. 주먹 쥐었다 펴보시고요.”
주 함선 의무 병동.
에라블은 오늘 센터 대신 군 병원을 찾았다. 검진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몇 개로 보이세요?”
의사가 한쪽 손을 다 펴 보이며 물었다.
“여섯 개요.”
“예, 좋습니다.”
아니, 손가락이 여섯 개로 보인다니까?
“의사 상대로 몸 상태 갖고 농담하지 마세요. 진짜 여섯 개로 보이면 79점도 안 나오셨죠.”
“곧 80점 될 겁니다.”
“긍정적인 태도는 참 좋은 거죠.”
열심히 힘내서 응원해 주는 의사에게 에라블은 자꾸 옛날 꿈을 꾸는 것에 대해 질문했다.
의사는 사고로 큰 충격을 받아서 그럴 수 있다고, 별일 아니니 크게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대답해주었다.
“금방 괜찮아지실 겁니다.”
“그럼 인식표도 다시 받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