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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67화 (67/132)

67.

말이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막 나가고 있었다.

몇 년 전 데제가 처음 집에 찾아왔을 때도 이러다 망한 기억이 분명히 있는데, 있다고 뭐 달라지는 게 없었다.

“아.”

데제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요, 난 혹시 나 싫다는 줄 알고 서운할 뻔했잖아요.”

“제가 말입니까?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도 굉장히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죠? 나 속상할 뻔했어.”

말을 주고받으며 그가 탄산수를 밀어주고 조각낸 스테이크 한 점 잘라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

목이 타 마른침만 삼키던 에라블은 급히 탄산수를 마시고 고기 조각을 입속에 밀어 넣었다.

마치 당신의 호의를 온몸으로 환영하고 있다는 신호를 열심히 보내는 것처럼….

데제는 그런 에라블을 보며 제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긴 손가락이 붉은 입술을 가리고 고개를 떨어트린 채 가늘게 어깨를 떨고 있는 모습이 아주 슬퍼 보이신다.

정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마음이 뒤숭숭해서인지, 그날 밤 에라블은 심한 악몽을 꾸었다.

* * *

낯선 골목거리.

“하아, 하아….”

낯선 건물, 낯선 사람들…, 에라블은 그 사이를 미친 듯이 내달렸다. 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눈앞은 뿌옇게 어지러웠다.

뜨끈한 손바닥에 물웅덩이 진 낡은 보도블록이 만져졌을 때가 되어서야 달리다가 넘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도블록을 밀고 일어나 다시 달렸다.

“어, 엄마아….”

아무리 헤매고 달려도 제자리인 것만 같았다.

“엄마아….”

낯선 문자로 가득한 어지러운 홀로그램 간판들 위로 세 개의 달이 비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겹쳐있는 두 개의 달과 겹쳐있는 것보다 더 큰 하나의 달이.

한참 낯선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여긴 어디지….

귓가로 생소한 말소리가 끊임없이 스쳐 지나갔다.

여긴…. 에라블은 덜덜 떨며 아무 처마 밑으로 기어들어 가서는 머리를 가리고 몸을 웅크렸다.

신발…, 신발 하나가 없다. 달리다가 잃어버렸나 봐…. 더러운 양말뿐인 발을 다른 쪽 신발 등에 올려놓으며 흐느껴 울었다.

“애기였네.”

더러운 빈 발등을 커다란 손이 감쌌다. 마디가 곧고 아름다운 손이었다. 흠칫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 * *

“에라블.”

에라블. 에라블….

“…헉!!”

자길 부르는 소리에 퍼뜩 눈을 뜨며 에라블은 헐떡였다. 눈을 뜨자마자 옆에 누워있는 데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적당히 안아줬나 봐. 돌아다닐 기운도 있고.”

그게 아니라고, 밥 먹으면서 너무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공손히 답변을 드리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멍한 눈가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손끝으로 가만히 눈가를 쓸어주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히 당겨 안아주었다. 헐떡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만 울라니까.”

자꾸만 숨이 찼다. 그가 덜덜 떨리는 몸을 더 깊이 끌어안았다. 단단한 몸에 감싸여 조금씩 떨림이 사그라들었다.

“저, 저 왜 이러는 건지… 잘….”

“괜찮아요.”

괜찮아. 떨림이 멎을 때까지 그가 품에 안은 채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도 에라블은 계속 악몽을 꾸었고, 그리고 깨어나면 항상 데제의 품 안이었다. 그건 섬뜩하면서도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 * *

“여기 맥주 한 잔, 빨리.”

신원불명 무국적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에라블은 취업에 성공했다. 노력의 성과였다.

“톰 아저씨 여기 맥주 한 잔이요!”

미친 미인이던 첫인상과는 달리 톰은 덥수룩한 아저씨였다. 처음엔 왜 말도 안 되는 미인이라고 생각했던 건진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녀는 처마 밑에 웅크리고 있던 제게 손을 내밀어준 아저씨를 열심히 공략했다.

가게 뒷문에서 죽치고 앉아 아저씨가 그리로 나올 때마다 뒷골목을 치우는 모습을 보여 드린 것도 방법의 하나였다.

쓰레기를 가지고 나오면 대신 치웠고, 그냥 시늉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깨끗하게 정리해서 쓸만한 노동력임을 어필했다.

“…들어 와라.”

운이 좋았다. 급료는 짜지만, 아저씨가 술집에서 숙식을 제공해주셨기 때문이다. 일을 많이 안 시킨다는 게 단점이긴 했다.

“뭘 드릴까요, 손님?”

“피스티스로 줘요.”

“예! 손님. 역시 맥주는 피스티스죠!”

“어렸을 때부터 발랑 까졌었네요, 에라블.”

이상한 손님이었지만, 무섭게 잘생겼다. 진짜 무서울 정도로 미인이었다.

크게 될 사람 같아 미리 사인을 받아두고 싶었지만. 최근 이세계 천연 미인들은 맨손으로 척추를 뽑는 사이코패스들뿐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도….

에라블은 그저 웃었다.

“맥주 나왔다.”

톰 아저씨가 바 너머에서 그녀를 불렀다.

“예!”

쟁반을 들고 조르르 달려가다가 어쩐지 눈가가 축축해서 소매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런데 닦아도 닦아도 소용이 없다.

뭐지.

“비가 오나?”

술집 천장을 쳐다봤지만, 물 새는 곳은 없는데 자꾸만 눈가가 축축해서 에라블은 자꾸 눈가를 문질러댔다.

* * *

“비는 무슨.”

데제는 투덜거리며 시간선을 나돌아다니는 에라블의 목덜미를 꽉 깨물었다.

그러자 에라블은 이제 벌레가 있다며 뿌리는 약을 찾아대고 있었다. 귀여워 죽겠네. 그는 키득대며 다시 잠든 눈가를 핥았다.

관계 후 에라블은 그의 품에 잠든 채, 정신체로는 술집 서빙 일을 열심히 하는 중이었다.

비가 온다고 외치는 이때도 하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일하고 있었다.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일종의 방어기제인 듯했다.

“…몇 살이야, 지금. 어린 게 벌써 술은.”

어둑한 그림자가 잠든 에라블을 감싼다. 더러운 촉수가 말랑한 살갗을 쓸었다. 그는 혀를 내어 눈가와 식은땀을 핥고 이어 가볍게 깨물어댔다. 허둥대는 에라블을 보며 그는 연신 웃어댔다.

에라블은 외부 자극을 비나 벌레처럼 상황 내에서 자신이 납득 가능한 것으로 치환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게 데제는 은근히 귀여웠다.

으, 축축해. 뭐야, 뜨거워. 숨 막혀. 물지 마! 헐떡이다 눈을 뜨니 창에서 직사광선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꿈틀거리며 그늘로 이동하다가 움찔했다. 그가 한쪽 팔로 고개를 괴고 빤히 내려다보고 있어서였다.

음, 그러니까 지금 그의 품을 파고든 것이다.

그는 에라블의 허리에 걸치고 있던 팔을 들어 뜨끈해진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사실 아차 싶었지만, 냅다 몸을 피하진 않았다. 그랬다간 아침부터 아주 고달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 뜨자마자 그의 품인 게 이제 조금 당연해져 버리기도 했고….

“안녕하십니까, 사단장님….”

그가 제품에서 작게 웅크린 채 인사하는 에라블을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밤새워 일하고, 눈 뜨자마자 또 출근하지 말아요.”

“죄송…합….”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사과부터 하다 말고 바들바들 떨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바들대는 에라블의 귓바퀴에 입을 맞추며 그가 웃어댔다.

“되게 강아지 같네요, 에라블. 발발 떠는 게 엄청 귀여워.”

“야, 약 좀….”

“응, 안 돼요.”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씻죠.”

에라블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몸이 그의 한쪽 팔에 의해 들어 올려졌다.

‘……!!’

에라블은 벌겋게 달아오른 채 그의 팔뚝에 걸터앉아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 살려줘….’

그는 뭔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욕실로 걸었다.

에라블은 그저 파들파들 떨다가 욕실 거울을 보고 흠칫했다. 저기 웬 비 맞은 노숙자가….

“아침은 간단하게 먹을까요? 치즈나 호밀빵 정도?”

같이 자고 일어난 청순한 미인이 예민한 몸을 쓸었다.

“흑-….”

싫다…. 그런 얘긴 제발 이런 순간엔 안 하셨으면 좋겠다…, 벌게진 에라블의 눈꼬리에 방울방울 눈물이 맺힌다.

그가 그것을 할짝거리며 욕실 벽으로 안고 있던 몸을 밀어붙였다.

“데, 데제-….”

“응.”

에라블은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괜찮아요.”

하나도 안 괜찮다. 정말…, 아침부터 기진맥진했다. 약이 절실했다.

허리가 진짜 끊어질 것 같은데, 약은 하나도 허용이 되질 않았다.

“…….”

에라블은 약 대신 놓인 아침밥을 응시했다. 치즈를 잔뜩 올린 리조또에 샐러드, 또 호밀빵과 원두커피였다.

“오전에 부대 잠깐 들렸다가 상가나 갈까요? 이것저것 필요한 것도 있고, 냉장고도 비었고.”

빈 건 냉장고만이 아니었다. 식기 같은 사소한 것부터 TV 같은 중요한 것까지, 집 안에 제대로 있는 게 별로 없었다.

“TV는 큰 거로 사죠.”

역시 데제도 그게 중요하단 사실을 알고 계신….

“저번에 찍어둔 거 같이 크게 보게.”

남의 야한 비디오를 보는 취미는 없다고 주장하기엔, 이미 텍스트로 된 그의 사생활을 상당량 읽은 전적이 있다.

심지어 두 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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