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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66화 (66/132)

66.

처음 내기 사실을 알았을 땐 참 세상이 무너진 것 같더니. 슬퍼하기엔 너무 큰 돈이었지.

에라블은 아쉬움을 삼키며 우주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선원이 저마다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복귀하면 나도 곧 정신없겠지. 그 전에 잠이라도 더 자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에라블은 앉아있던 의자에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설마 또 주무십, 와, 진짜 또….”

뭐 저런 인간이…, 아리에스는 할 말을 삼키며 다시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업무 변경이 시급했다. 아무 데나 좋으니까 감시팀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감시팀장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 * *

“잘 다녀왔어요?”

에라블은 무려 수도 스테이션까지 직접 마중을 나온 데제를 바라보았다.

“예, 잘… 다녀왔습니다.”

한 달 만에 보는 그는 여전히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물론 가끔 보면 가끔 봐서 숨이 막히고, 자주 보면 자주 봐서 적응이 안 되는 유해한 미모긴 했다.

솔직히 안전한 사회를 위해 격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죠.”

그녀가 들고 있던 짐을 가져가며 그가 말했다.

“뭘 가져온 거예요?”

“간식거리를 조금.”

“술은 아니지?”

“다는 아닙니다.”

코웃음을 치며 그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곤 가방에서 맥주 두 캔과 초콜릿바 하나를 빼고 나머지는 개들에게 던져줘 버렸다.

“조금이 아닌데?”

이제 조금 남게 되었다.

에라블은 슬픈 눈으로 그의 손에 들린 맥주 두 캔과 초콜릿바 하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안 된다는 듯 그것을 뒷좌석에 감췄다.

“노리지 마요, 내 거에요.”

“조금만 나눠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생각해 볼게요.”

입원 기간 내내 그가 먹는 것에 예민하게 굴었기 때문에, 특히 드라마 보다가 걸린 날 이후로 더.

슬쩍 무언의 허락을 받아 보려고 손에 들고 온 것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안 될 모양이었다.

“여기서 차로 한 40분 걸릴 겁니다.”

그가 주차장에서 차를 빼내며 말했다.

개들은 놀랍게도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서 수도의 스테이션으로 들어왔다. 위성인 통합 스테이션은 도로를 통해 각 행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상위계를 통과하는 4차선 아스팔트 도로였다.

셔틀보단 비싸지만, 게이트보단 이용료가 저렴했다. 셔틀을 타고 행성 중력장을 넘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적당히 돈이 있는 제국민들에게 선호되는 이동 수단이었다.

“이거나 먹고 있어요.”

한 손으로 차를 몰며 데제가 빵 봉투를 건네주었다.

아직 따끈한 빵 봉투에는 보기만 해도 건강해질 것 같은 호밀빵이 들어있었다.

“이게 또 맥주랑 먹으면 아주 맛있습니다.”

“그래요? 이따 한번 그렇게 먹어 볼게요.”

“…예.”

에라블은 조금 슬픈 눈으로 대충 빵을 뜯어 우물우물 씹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색 물감을 섞어 풀어 놓은 듯한 상위계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곧 107섹터의 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107섹터는 전형적인 상층계급 주거 위성이었다.

‘…여긴.’

차에서 내린 그녀는 조금 눈에 익은 빌라를 잠시 올려다보았다.

9층 높이, 조용하고 깨끗한 주택가에 세워진 고급 빌라는 한 달 전 카탈로그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들어가죠?”

같이 내려서 담배를 하나 빼 입에 물고, 데제가 계단을 올랐다. 주민인 듯한 사람들이 보였지만 담배를 빼서 무는 그를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는 본인이 원한다면 황제 앞에서 알몸으로 탭댄스를 춰도 상관이 없다. 다시 상기하자면 여긴 답도 없는 먼치킨의 세계였다.

지금 중요한 건 그가 담배를 찾을 때는 대체로 뭔가를 참고 있을 때란 사실이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계속 참아주셨으면 좋겠다.

에라블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익숙하게 엘리베이터 벨을 누르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한 달 전, 그녀가 직접 고르게 시킨 데제의 새 빌라는 적당히 작고 아늑했다.

“마음에 들어요?”

그가 등 뒤에서 가볍게 안아오며 물었다. 긴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에서 진정제 특유의 싸한 냄새가 났다.

“너무 작은 게 아닌가 싶은데.”

“전 괜찮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고른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에라블은 장점을 홍보할 필요성을 느꼈다.

“입지 조건도 좋고 교통도 편리합니다. 상가도 도보 10분 거리라 생활 편의성도 뛰어납니다. 나중에 되파실 때도 문제가 없을 거로 생각합니다.”

“부동산 업자 같네.”

그가 코끝으로 에라블의 귓불과 목덜미를 가볍게 훑었다. 솜털이 바짝 선다.

“방 여러 개니까 알아서 채워 넣어요. 서재도 괜찮고 드레스룸도 괜찮고. 어떻게 쓸지 고민 좀 해봐요.”

“예, 최고의 배치를 위해 인테리어 업자를 수배해….”

“그러든가. 아, 걔네들도 한방 쓰면 되겠네. 에라블 덕질하는 걔네들. 보통 덕질존 같은 거 만든다면서요.”

“…….”

진짜 커뮤를 하시나. 왜 그런 것까지 알고 계신 거지….

“휴가 기간 동안 덕질만 하다 온 거 아니야?”

“아, 아닙니다.”

가끔 다른 것도 했다.

“아닌데 왜 더듬거려?”

왜냐하면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다.

“…하.”

표정에서 뭘 읽은 건지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고 있던 몸을 돌려세우고 못마땅하게 내려다본다. 반사적으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오늘 밤샐까.”

“살려주세요.”

“이제 아주 자동이네?”

그가 한 손으로 허리를 감싸고 지그시 몸을 붙여왔다. 에라블은 주먹을 꼭 움켜쥔 채로 바르르 떨었다.

“영화는 뭐 봤어요?”

“고, 공포 영화 봤습니다.”

“재밌었어요?”

“예….”

“왜?”

“좋아하는 장르….”

“왜 재밌었냐고.”

“…살인마 옆집 사는 남학생이 아주 많이 잘생겼었습니다.”

“그래, 오늘 밤새자.”

솔직한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원활한 인간관계를 위해선 착한 거짓말도 필요한 것이다.

어어 하는 사이 침실로 끌려들어 왔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늦었다.

“아, 신혼집은 나중에 따로 골라요.”

짧게 돌아왔던 정신은 또 엉망으로 흐트러지는데, 그는 혼자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댔다.

“흣….”

도저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만약 있었다 해도 이런 뜻일 거라곤 전혀 예상 못 했을 것이었다.

* * *

“…예?”

에라블은 멍하니 앞에 앉은 데제를 쳐다보며 자기가 들은 말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슬슬 시그눔 교환하자고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저 말씀이십니까?”

“여기 또 다른 사람 있어요?”

그들의 테이블엔 당연한 얘기지만, 두 사람뿐이었다.

가볍게 점심을 먹으러 온 평범한 레스토랑 안…, 재앙이 일어났다기엔 지나치게 평범한 환경이다.

“없, 없습니다….”

멍하니 대답한 에라블은 정신을 수습해보려 애썼다. 그에겐 언제나 ‘예’만 나오는 자동응답기인 그녀에게도 이건 쉽지 않은 질문이었고, 그래서 그대로 고장이 났다.

“저, 제가, 그…, 시그눔, 교환은…, 그러니까….”

페어가 되면 돌이킬 수 없다.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은 평생 안정제를 먹으며 연명해야 한다. 사는 게 아니라 연명이다. 삶의 질이 대폭 떨어지고 수명 역시 반 토막이 난다.

나야 인식표 터트리기 전부터 이미 그렇게 살아왔지만, 데제가 그런 삶을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았다.

에라블은 그의 하나뿐인 페어가 되어 무슨 일을 감당해야 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슬슬 할 때 됐죠. 우리 만난 지도 벌써 4년째 잖아요? 프로포즈를 할까 했는데, 말도 없이 청혼하면 받을 때 당신이 기절할까 봐.”

정신이 혼미해졌다.

만나다니…, 에라블은 마지아를 앉혀놓고 했던 것과 비슷한 말을 또 하는 그를 혼미하게 바라보았다.

“우리끼리 먼저 얘기 정리되는 대로 백작가에 청혼서 넣고, 식은 가을쯤에 올리죠?”

데제는 사람을 홀리듯 눈매를 흐리며 웃음을 흘렸다.

정신이 더 혼미해졌다. 이 와중에 아주 그의 미모에 정신이 흐리다. 여우한테 홀리면 이런 기분이겠지. 물론 그는 여우보단 뱀에 더 가깝지만.

안 돼, 자꾸 정신이 딴 데로 샌다.

“저, 데제, 시그눔 교환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신중히 생각을.”

“왜.”

데제가 말을 자르며 되물었다. 서늘한 말투에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분쟁지역에서 본 어떤 식인 괴수보다 지금 그가 더 무섭다.

“설마, 4년을 만났는데. 에라블 버밀리언. 지금까지 날 가지고 논 겁니까.”

“아닙니다.”

“난 지금까지 진심이었는데. 당신은 아니었나 봐요? 나 갖고 노니까 재밌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좀 더 신중히 생각해서 청혼서 문구를 쓰자는 그런 뜻이었습니다. 저희 백작님이 생각보다 마음이 아주 여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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