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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64화 (64/132)

64.

“엇, 뜨거.”

잠시 샤워기와 낯을 가리며 내외하던 에라블은 꿈지럭대며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샤워볼에 바디워시를 짜내고, 꼼꼼하게 몸을 문지르는 동시에 양치질했다. 그다음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으면서 입 안을 헹구면 시간을 두 배로 절약할 수 있다.

“뭐야. 왜 벌써 나와?”

열심히 씻고 나오니, 심각한 얼굴로 TV를 보고 있던 산체가 또 시비를 걸어왔다.

“씻은 거 맞아?!”

에라블은 대답 대신 수건으로 맹렬하게 머리를 털어주었다.

“악! 하지 마!”

“비켜 봐. 양말 신게.”

“머리 안 말려?”

“어.”

“물 떨어지는데 왜 안 말려?”

어차피 냅두면 알아서 마를 거 뭐하러 귀찮게,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경고했다.

“나가서 차 시동이나 걸어놔. 아니면 다시 드러눕는다.”

“어후! 내가 진짜 말을 말아야지!”

산체는 짜증을 내면서도 차 키를 들고 나갔다. 왜냐면 진짜 다시 누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산체를 내보낸 에라블은 서랍에서 투명한 플라스틱 약통을 꺼냈다.

통 안엔 검붉은색 알약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휴기 기간 동안 거의 다 먹고 이제 두어 알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중 한 알을 손바닥에 털어냈다.

입원 기간 내내 맞았던 링겔, 그것과 꼭 같은 색의 알약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물도 없이 그냥 꿀꺽 삼켰다. 약한 피비린내가 맡아졌다.

“…….”

산체가 틀어놓은 TV에선 연신 심각한 어조의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연이은 균열 발생으로 분쟁지역의 확대가 예상되는 가운데, 괴수들이 이상 행동을 보여 시민들이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2차 웨이브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

그만큼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단 뜻이겠지. 분쟁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 외부에서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카밀도 바쁜지 연락이 힘들었고.

‘뭐, 복귀하면 알겠지.’

약통을 다시 서랍에 넣어놓고 방을 나서던 에라블은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윽!”

눈부셔. 넓은 창이 달린 복도에 직사광선이 쩔었다. 햇빛 잘못 맞은 곰팡이 마냥 꿈지럭거리는 그녀를 개들이 환멸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에라블은 순하게 웃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예, 되게 오랜만이시네요.”

개들은 진짜 질린단 얼굴로 감탄했다.

“…곰팡이도 이보단 역동적으로 살듯.”

“내 말이.”

에라블은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인식장애가 걸려 미리 양해를 구한 백작을 제외하곤 아무도 그들이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 너무 안 봐서 에라블도 거의 까먹을 뻔했다.

그렇게 휴가 기간 28일 만에, 그녀는 처음으로 집을 나섰다.

* * *

“나오니까 좋지? 어? 사람이 역시 햇빛을 받고 살아야지.”

지금 뒤에 뭐가 붙어있는지 알면 좋단 소리 절대 안 나올 텐데.

종알대는 산체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에라블은 차창에 고개를 괴고 드라이브 나온 개처럼 멍하니 바람을 맞았다.

뭐, 날씨가 좋긴 하다.

한적한 도로를 따라 늘어선 짙푸른 가로수, 일렁이며 비쳐 드는 햇살, 새파랗게 맑은 하늘.

산체는 차를 영화관이 있는 해변 공원으로 몰았다.

하나뿐인 귀한 후계자를 운전수로 끼고 나선 산책길, 탐탁지 않아 할 만도 한데 최소한 버밀리언 본가 내에선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

본가에서 그녀를 제일 못마땅해 했던 사람은 지금 옆자리에서 종알대고 있는 산체 놈이었다.

“좋잖아, 밖에 나오니까. 그치?”

자꾸만 동의를 구하는 산체를 무시하며 찬 바람에 젖은 머리를 말리던 에라블은 움찔했다.

“…뭐?”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발언이 귓바퀴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백작님이 뭘 하신다고?”

“누나 선 자리 찾고 있다고.”

산체가 곁눈질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어쩐지. 새끼가 갑자기 나가자고 생난리를 친 이유가 다 있었던 거다.

“내가 그냥 미리 말해 두는 거야. 아버지 앞에서 누나가 발작할, 아, 때리지 마! 운전 중이잖아! 사고 난다고!”

푸닥 대던 산체는 설득조로 말을 이었다.

“누나도 이제 그만 자리 잡을 때 됐잖아. 그 쓸데없는 군 생활은 이제 집어치우고 결혼이나 해. 솔직히 아버지도 많이 참아줬다.”

“뭔 개소리, 아니, 애초에 누가 이 나이에 결혼을 해.”

이 세계 결혼 적령기는 60세 전후였다. 개조 안 한 인간의 평균 수명이 170~180세니 60도 빠르다.

“그야 누나가 이동자니까 그렇…, 악! 그만 때려! 그만 때리라고!”

산체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에라블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여간 쓸데없는 짓을.”

“쓸데없긴, 누나가 지금 하는 일이 쓸데없지! 안 그래도 하자 많은 몸뚱이에 뭔 군인을 한다고. 누난 몸이 저질이라서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애를 낳아야, 악! 고만 때려! 아악!!”

개소리엔 매가 약이지. 그래서 더 때려줬다.

“아파!”

“닥쳐. 어쩐지 요새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그건 누나가 방에서 안 나와서고.”

산체는 비호하듯 말했지만, 백작이 제 양딸을 슬슬 피해 다니고 있는 건 사실이긴 했다.

“됐고, 너네 아빠 만나면 나 선 안 본다고 꼭 전해라.”

“너네 아빠가 뭐냐!”

“시끄럽고, 꼭 전해.”

산체는 인상을 쓰고 있는 에라블을 보며 저도 불쾌한 듯, 같이 인상을 썼다.

“누난 아직도 떠날 준비나 하면서 사는 거야?”

“준비는 뭔 준비.”

개들이 이거 다 듣고 있을 텐데…, 어차피 내가 이동자인 건 다들 알고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떠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거 아니니까 말이나 전해.”

“그런 거 아니면 뭔데?”

“나 독신주의야.”

“뭐?”

마음이 상해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산체가 코웃음을 쳤다.

“남자를 그렇게 좋아면서 무슨 독신주의야?”

“아니, 내가 뭔 남자를 좋아해!”

최근 바람둥이란 근거도 없는 비난을 자주 들었던 에라블은 울컥했다.

“엄청 좋아하지. 덕질하는 남자 연예인만 열두 명이잖아.”

“연예인은 연예인이지! 연예인이 남자냐? 아, 됐고, 결혼하고 싶으면 백작님이나 하시라 해. 자기도 미혼이면서 지금 누구한테 결혼하라 마라야.”

짜증 내는 에라블을 보며 산체가 고개를 내젓는다.

“아버지한테 말 그렇게 하는 건 진짜 너밖에 없을 거다. 너 아버지가 이 행성계 지배자인 건 알고 있지?”

“…누나, 새끼야. 누나.”

“악! 때리지 말라고!!”

남매는 서로를 향해 적개심을 불태웠다. 한 차에 동승을 한 지 10분 만에 둘은 서로가 아주 더 지긋지긋해졌다.

“돈이나 좀 쥐여주고 너 갈 길 가.”

해안 공원은 한적했다.

그래도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어서, 에라블은 쫓아 붙는 산체에게 삥을 뜯으며 동시에 거리를 두었다.

물론 적게는 수 개에서 많게는 수십 개의 행성계를 거느리고 있는 중앙 귀족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백작가도 이곳 행성계를 다스리고 있는 지배 가문이다.

이곳 사람들에겐 머나먼 제도의 귀족보단 가까이에 있는 백작이 더욱 두려운 존재였다.

소심하고 안전지향적인 에라블의 성격상 버밀리언 백작가 역시 가까이 하고 싶은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냥 코가 꿰였지.

“무슨 깡패야?”

“너 때문에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속 시끄러우니까 여기서 찢어져. 애초에 왜 쫓아와?”

“나 없으면 안 쳐다볼 것 같아? 그리고 쫓아오긴! 애초에 내가 나오자고 한 거였잖아!!”

“이제 나왔으니까 찢어져.”

에라블은 손바닥을 내민 채 말했다. 산체는 부아가 치밀었다.

“이…! 나도 영화 볼 거야!”

“이 영화에서 재밌는 건 제임스 얼굴뿐임.”

“아! 본다니까?”

“런닝 타임도 개 김. 3시간짜리임.”

“보, 본다고!”

후회할 텐데, 산체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병원 신세를 오래 지었더니 이런 부작용이 있다.

“RBD라도 돌리던가.”

“그게 뭔데?”

“인식 장애 디스크.”

“…그거 군수품 아니냐?”

“너네도 군수 공장 돌리긴 하잖아.”

“그거야 전시 대비로 비축하고 있겠지. 너는 대체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 거야.”

“…맥주 사 와라. 피스티스.”

할 말이 없어진 에라블은 딴 소릴 하며 몸을 돌려 근처 벤치로 걸어갔다. 등 뒤에서 산체가 또 벌컥 화를 냈다.

“미친, 환자가 무슨 맥주야!”

“퇴원한 지가 언젠데 환자 타령이야. 피스티스 맥주. 아니면 택시 타고 다시 집 간다.”

“아! 가든 말든!”

버럭 짜증을 냈지만 어차피 사 올 것이다. 아니면 집 가서 다시 잠이나 자면 그만이었고.

에라블은 길게 하품을 하며, 그럭저럭 전망이 트인 나무 벤치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짙푸른 바다 수면 위로 물비늘이 반짝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고래 울음소리를 들으며 숨을 뱉어내고 벤치 등받이에 축 늘어졌다. 역시 바다 가까이 있으니까 좋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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