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하여간 이상한 여자야.’
옷차림을 대충 수습한 데제는 새 담배를 또 빼 물고, 다시 봐도 역시 거지 같은 에라블의 숙소를 구경했다.
사단에 있을 땐 그나나 사람 집 같긴 하더니. 여긴 수감소로나 쓰면 될 것 같았다.
여기저기 훑어보다가 책상 앞에 앉아 안을 들춰보고 있을 즈음, 에라블이 침대에서 부스럭댔다.
“깼어요?”
잠깐 대답을 못 하고 바들바들 떤다. 보아하니 관계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의 입꼬리가 심술 맞게 올라갔다.
“…예.”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기어이 대답하는 꼴은 웃기지도 않았다.
아무리 하극상에 대한 제제가 강하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비위를 잘 맞추는 인간은 드물었다. 그게 잘 안 돼서 제제가 강한 거였으니까. 모두 저 여자만 같았으면 제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책장을 넘겨보다가 그는 별생각 없이 서랍을 열어 보았다. 서랍 안엔 온갖 종류의 약통이 가득했다.
“…….”
주사제 앰플에 재생 밴드, 봉합 테이프, 비상약, 사이사이에 끼어 놓은 비닐 포장된 일회용 주사기까지. 아주 빼곡하다.
간 손상, 신장 경화, 혈액 응고… 금지 약물의 치명적인 부작용은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렵다.
이런 걸 무슨 카드 돌려막는 것처럼 사용하고 있다. 살려 달라고는 뭐 하려 하는 건지. 어차피 오래 살지도 못할 텐데. 피식대며 그는 그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어, 거, 거긴!”
에라블이 다급히 말리는 소리를 한다. 아주 놀란 얼굴이다. 대체 뭘 숨겨놨길래.
데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심지어 이건 잠겨있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냥 힘으로 당겨서 열어버렸다.
“이게 뭐야.”
대답이 없다.
“…얜 또 누구야?”
서랍 안에 가지런히 모셔져 있는 DVD 박스.
제국법으로 금지된 불법 약물은 아무렇게나 쑤셔놓고 이건 아주 소중하게도 모셔뒀다. 데제는 그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처음 보는 앤데?”
내가 너 때문에 알게 된 연예인이 몇 명인데, 초면인 애가 또 나와.
“휴, 휴머니즘을 실천 중이라….”
“아. 그래요? 좋은 일 하시는데 왜 숨겨놨어요?”
“워, 원래 그 좋은 일은 몰래 하는 게….”
“웃기고 있네.”
고개를 홱 돌려 쳐다보니, 에라블이 잽싸게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되게 잽싸네? 아주 이럴 때만….’
데제는 이를 아득 갈며 DVD 박스를 도로 집어 던져 넣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바지 버클을 풀며 다시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 * *
‘으, 으으….’
다음 날 아침, 에라블은 허리를 부여잡고 여진을 견디며 화장실로 기어갔다. 변기에 앉아 달달 떨면서 묵념했다.
‘으윽…!’
혼자 변기 붙잡고 이러고 있으니까…, 정말 너무 좋다. 세상이 다 아름다웠다.
‘하-.’
두 번째 서랍이 문제였다. 하여튼 덕질이라면 꼭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니까. 왜 남의 취미에 호불호를 갖는 거냐고.
죽겠다, 진짜….
‘…여기 방음은 되겠지.’
뒤늦게 걱정이 됐다.
안되면 뭐, 어차피 망한 인생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쪽팔린다. 고인에게도 사회적 체면이 있는 거라고.
바들바들 떨며 간신히 일어나 몸을 씻고 선반에서 약통을 꺼냈다. 척추에 진정제를 놓은 뒤이어 팔오금에도 융화제를 주사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잠시 세면대를 끌어안고 웅크려 현기증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융화제는 부작용이 가지가지였다.
한 달간 외부를 그렇게 돌았는데 수술 한 번을 안 한 걸 보면 역시 옳은 선택이긴 했지만….
‘…윽.’
위아래로 아주. 에라블은 물컹, 비릿한 피비린내가 올라오는 코를 틀어막았다.
그래 봐야 손가락 사이로 코피가 질질 새서 그냥 세면대 안쪽에 머리를 집어넣어 버렸다.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이러고 있으려니까 약간 단두대 같기도 하고…. 약간 초점이 풀린 눈으로 멍하니 코피가 멎길 기다리고 있는데 달칵, 욕실 문이 열렸다.
몸 위로 긴 그림자가 진다.
“…그, 어.”
에라블은 그의 시선을 느끼며 손으로 얼른 다시 코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여전히 피는 손가락 사이로 줄줄 샜다.
“아, 커피라도 내오겠습니다….”
코가 막혀 맹맹한 목소리로 에라블은 되도록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러면서 세면대 물을 틀어 손과 얼굴을 황급히 씻어냈다. 당황할 이유가 없는데 왜…, 씻어도 씻어도 자꾸만 피가 떨어진다.
“워, 원두가 두 종류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주시면….”
“천천히 해요.”
“…죄송합니다.”
“죄송은, 왜? 아. 내가 더 못 갖고 놀게 돼서?”
그가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그건 당연히 아니었다. 코피가 무슨 상관인가. 그는 필요하면 상대의 상태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얼마든지 해댈 사람이었다.
죄송하다는 것도 습관성 발언에 불과했다. 이세계 13년 차에 얻은 일종의 말버릇이다.
“안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서….”
목덜미와 동그란 가슴 위로 질질 코피를 흘리며 변명하는 에라블의 모습에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또 웃었다.
“더 한 꼴도 봤는데, 뭘.”
생각해 보니 그렇다. 인식표 갱신 땐 이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았다. 문젠 그땐 의식이 없고 지금은 있다는 것이었다.
“천천히 하고 나와요. 난 그만 가볼 테니까.”
그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림자가 사라지더니 이내 방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진짜 가셨나?’
아무래도 그런 듯하다. 밖이 아주 고요했다. 뭔가, 순식간에 폭풍이 쓸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
코를 틀어막은 채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에라블은 흡-하고, 생각 없이 코를 들이마셨다가 우거지상을 했다.
“…웩.”
코피가 목 뒤로 넘어와 버렸다. 당장 입안을 헹궈 뱉어내고 콧구멍에 휴지를 쑤셔 넣었다. 세면대에 바닥까지 지저분하게 핏물이 떨어져 있었다.
대충 샤워기를 틀어 수챗구멍으로 씻겨 보냈다. 김이 펄펄 오르는 온수를 보니 에너지 팩 비용이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그렇게 대충 수습하고 옷을 걸쳐 입은 후 욕실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없는 빈방이 휑하다고 하기엔, 여기도 개판이었다. 폭풍은 지나갔어도 잔해는 남는 것이다.
“미로야.”
에라블은 눅눅히 젖은 침구를 싹 걷어내 미로의 입안에 던져넣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꿀떡 잘도 삼킨다.
마약류에 살상용 군수품까지 온갖 걸 이동시키는 마당에 젖은 침구류 따위에 새삼 죄책감이 들었다. 아직까지 이런 양심이 남아있었다니 놀라웠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도 시키고, 보이는 대로 일단 다 치웠다. 방이 작아 다행이었다. 금세 아무런 흔적이 없다. 몇 초만 더 투자하면 내가 있던 흔적까지 싹 다 치울 수 있을 것만 같다.
치우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져서 그녀는 일찌감치 숙소 방을 빠져나왔다. 나오기 전에 콧구멍에서 휴지를 빼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노이즈가 안 들리니 그나마 좀 살 것 같았다.
“진짜 41사단이 왔어?”
“그렇다니까. 함선까지 왔다고. 안타레스 그거 행성급 괴수도 잡을 수 있다던데, 어, 소위님 나왔다.”
“어제 저 소위님이 밤새….”
식당을 향해 걸어가며, 에라블은 중대 인간들이 수군덕대는 소리를 들었다.
“밤새 거기 사단장이랑 단둘이 같이 있었다던데?”
씨X…, 사회적 체면은 역시 희망 사항이었나 보다. 내 인생이 그렇지 뭐. 에라블은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앞으로 걷다가 흠칫했다.
“아, 깜짝이야.”
마지아가 벽에 기대 쭈그리고 앉아선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위님….”
“뭐야. 너 여기서 뭐 하고 있, 울었어?”
애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밤새 그분과 계셨던 거예요?”
“무슨 소리야.”
“정말, 소위님 정말 밤새…, 그, 그 사단장님 하고 같이 계셨던 거예요? 예? 지, 진짜예요?”
에라블은 울먹이는 마지아를 떨떠름하게 쳐다보았다.
“난 모르는 일.”
“소문 다 났어요.”
씨X, 나도 알아.
“무슨 찌라시 기자들도 아니고. 뭔 일만 났다 하면 아주 다들 미쳐서.”
“딱히 할 것도 없잖아요.”
그건 그렇네. 에라블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단장의 적합자는 대외비다.
숨기려고 한다면 개들은 나도 모르게 내 집 안방에서 괴수도 키울 수 있었다.
누구도 그들이 건 인식 장애를 뚫을 수 없다. 주인까지 갈 필요도 없이 개들 선에서 벌써 막히는 것이다.
여기 세계관이 답도 없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지금 기본적인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인데.
왜지. 모르겠다. 사실 이제 와 알려진다고 딱히 달라질 것도 없었고. 그의 적합자란 사실이 한 줄 추가된다고 해서 내가 더 나빠질 일은 없었다. 쪽팔린 것만 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