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는 주인이 필요하다-47화 (47/132)

47.

“그, 그게 아니라.”

“고맙긴 한데, 사양이다. 난 너 아니야.”

마지아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냥 화나서 주먹이라도 치켜들면 깔끔할 텐데. 그런 애였으면…, 애초에 개인 관리 시스템이라도 해킹해 아주 완벽히 살기 싫게 만들어 줬을 거다.

피지컬에선 밀리지만 사무직에는 사무직 나름의 방법이 있는 것이다. 그편이 더 쉽고. 에라블은 짧게 한숨을 삼켰다.

이계인 중엔 유독 지배욕에 둔한 사람들이 있었다. 백작이나 산체, 혹은 카밀이나 얘처럼.

지구인 중에도 배고픔에 둔한 사람이 있는 것과 비슷하다. 차라리 없었으면 이계 탈출이 더 홀가분했을 것이다.

“난 너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없어.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

“…….”

손을 치켜드는 대신 마지아는 두 손을 마주 꽉 붙잡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너도 그만해.”

마지아는 시선을 떨어트렸다.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이 눈에 눈물이 고여있다. 이럴 땐 역시 술이지.

“맥주 줄까? 브랜드별로 있는데.”

“…볼랴요.”

이 와중에 고르고 있네.

“개당 12cp.”

마지아는 마침내 폭발했다.

“아! 소위님!!”

“왜. 공짜 좋아하면 머리 벗어져. 유전자에 내장돼 있어.”

“무슨 걷어차는 와중에 맥주를 팔아요! 진짜 그러고 싶어요?!”

“나도 그러고 싶진 않지만, 공짜는 정말 곤란해.”

“이 씨! 왜요, 대체 저 왜 싫은데요! 그냥, 그냥 시험 삼아서 만나봐도 되잖아요.”

쥐 콩만 한 게 정말 못 하는 소리가 없다.

“어차피 남자도 없으면서….”

무슨 도돌이표냐. 왜 또 시작이냐고.

“남자 있다니까.”

없기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남자만 열두 명이다. 에라블은 귓등을 긁었다.

뭣보다 망한 내 인생이나 얽히면 같이 망할 네 인생은 둘째치고, 오밤중에 이렇게 단둘이 있어도 아무런 긴장감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줄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심각한 감정은 아니겠지만, 자존심이 상해 진짜 주먹이라도 들면 곤란하다.

몸 상태도 안 좋은데 얻어맞으면 일이 얼마나 밀릴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적합자 매칭 아직 안 받아 봤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마지아가 눈을 껌벅인다.

“예…?”

“한 번 받아 봐.”

“…저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막상 해보면 생각이 바뀔 텐데.

“적합자라고 뭐, 그냥 막 다 좋아요?”

몸은 그냥 막 다 좋다. 경험담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소위님이에요. 다른 사람 필요 없다고요.”

“필요가 왜 없어? 서핑이 취미라며?”

“…예?”

한창 감상에 잠겨있던 마지아가 움찔한다.

“머리는 황갈색에 호박색 눈동자를 가지셨고. 키가 뭐랬더라, 180? 신검 다시 받아 봐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알고 있는 정보랑 아주 다른데.”

“그….”

“난 니 목소리 그런 거 처음 들었다. 맞선 보는 줄. 알고 보면 취향이 남자인 거 아니냐?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그거.”

“그, 그거….”

“그래, 그거 다시 잘 고민해봐. 아. 들려줄까? 내가 습관적으로 통화 내용 녹음하는 버릇이 좀 있는데.”

“그, 어, 시간이 너무 늦었네. 주무세요.”

“기다려봐. 내가 파일을.”

“빨리 가볼게요.”

“잠깐 있어 보라니, 욱…, 우웨에엑―”

에라블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작스레 쓰레기통을 붙들고 웅크렸다.

놀란 마지아가 허둥대며 등을 두드려댔다. 에라블은 손으로 마지아를 밀어냈다.

“…멀미야.”

융화제 부작용은 가지가지였다.

분수니, 위액 발사기니, 덕분에 정말 붙은 별명 값을 하고 있었다.

“아까 속 뒤집어진 게 안 가라앉아서.”

에라블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생수로 입을 헹궈 쓰레기통에 뱉어내고 한 주먹은 되어 보이는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또, 또 뭘 드시는 거예요?”

“피로회복제.”

“소위님, 진짜 인생 그렇게 살지 마세요!”

“내가 뭐.”

나라고 이렇게 살고 싶겠냐. 에라블은 투덜대며 비타민제와 소화제를 추가로 입에 털어 넣었다.

“아, 그만 먹어요!”

“시끄러! 잔소리 말고 가서 잠이나 자! 진짜 녹음 틀어버리기 전에!!”

마지아는 결국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뛰쳐나갔다. 나중에 선물로 보드나 하나 사줘야지.

에라블은 코웃음을 치며 털썩 책상 앞에 주저앉았다.

내일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할 일은 해둬야 했다. 중대장만 아니었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밀리진 않았을 텐데….

‘…개새끼.’

에라블은 두 손을 모아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중대장 머리카락이 3분의 1만 빠지게 해주세요. 다 말고 딱 정수리 3분의 1만…, 아주 간절했다.

* * *

새벽까지 일에 시달린 에라블은 직장 상사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에 불탔다.

거의 개들에 근접한 수준의 적개심이었다. 스트레스는 으레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튀기 마련이었다.

그녀는 아주 밝은 얼굴로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마지아를 환영했다.

“오, 서핑 보이, 일찍 왔네?”

“그만 놀리시라고요….”

에라블은 체크아웃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호텔 근처 식당으로 와서 먼저 밥을 먹고 있었다.

문자를 받고 조금 늦게 합류한 마지아는 우울한 얼굴이었다.

“내가 어젯밤에 파일을 찾아놨는데.”

“으으.”

마지아가 귀를 틀어막았다. 에라블은 느긋하게 햄버거를 베어 물며 고통받는 영혼을 기쁘게 구경했다. 이래서 사람은 자나 깨나 흑역사를 조심해야 한다.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당시가 생각났는지 마지아는 조금 혼란스러워했다.

“진짜 잠깐 미쳤었나 봐요. 대체 누구였던 거예요?”

“말해주면 아냐.”

알면 인생이 불지옥 되는 남자다.

“알게 설명해주면 되잖아요!”

“넌 바라는 게 너무 많아.”

“으.”

마지아는 분통이 터지는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다가 축 늘어졌다.

“아, 근데 우리 이러고 있어도 돼요?”

“안 되지.”

에라블은 태평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찍힌 거 한 끼는 제대로 먹고 들어가자고.”

“역시 초코바는 영 아니죠?”

“나 다 먹으면 먼저 갈 거다.”

마지아는 황급히 제일 빨리 나오는 메뉴를 주문했다. 하지만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바르르…, 건물이 흔들렸다. 놀란 마지아가 어둑한 창밖을 보며 소리쳤다.

“포, 폭발입니다!”

에라블도 어둑한 하늘 위로 터져 오르는 불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거의 다 먹은 햄버거를 마저 입안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복귀하자.”

이제 완전히 확신할 수 있었다.

‘…들켰네.’

뒤를 잡힌 것이 확실해졌다. 소대는 몰라도 그녀의 동선은 확실히 꼬리가 잡혔다.

* * *

다운타운에 인명 피해는 없었다.

다행히 사고 장소가 폐공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는 셔틀 안, 걱정스럽게 패드 스크린을 확인하던 마지아가 한시름 덜어낸 얼굴을 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다친 사람은 없어서.”

당연하지. 위치 선정하느라 얼마나 애먹었는데.

“욱-.”

셔틀은 어김없이 회피 기동을 해댔다.

“우웨엑.”

마지아가 멀찍이 떨어져 앉아 걱정했다.

“진짜 병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소위님, 소위님? 제 말 듣고 계세요?”

“…안 들려, 가까이 와서 얘기해볼래?”

마지아는 못 들은 척했다. 말 끝나기 무섭게 에라블이 또 토해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충 입을 닦아내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몇 번이나 이 꼴을 보고도 좋다는 소리가 나왔다니, 나이도 어린 게 비위가 좋다. 그래도 가까이 올 정도는 아닌가 보다.

“…으으.”

“괘, 괜찮으세요?”

“가까이 와서 얘기하라니까….”

“…….”

안 들리는데 대답은 어떻게 하냐고 마지아가 항의했다. 생각보다 똑똑했다.

“우웨웨웩-!”

“아니, 대체 햄버거를 얼마나 드신 거예요. 뭐가 계속 나와! 그냥 초코바나 드시지!”

“…내가 너한테 굴러가는 수가 있다.”

“…….”

마침내 조용해진 마지아를 멀찍이 두고, 에라블은 누워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셔틀 천장을 쳐다보았다.

설마, 설마 했다. 이렇게까지 재수가 없진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는데. 내 인생은 정말…, 이렇게까지 재수가 없다.

* * *

뒤가 잡혔단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중대장은 여전히 온갖 잡일을 떠맡겼고, 에라블은 그렇게 여전히 온갖 일에 치여 살며 매일 밤 그의 탈모를 진지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평소처럼 과로에 시달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숙소 밖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

포탄 소리도, 망자 군체 우는 소리도, 하다못해 작은 잡담 소리조차 들려오질 않았다. 거의 적막에 가까운 고요함이었다.

이건 또 뭔가 싶어 기어이 하던 일을 덮고 밖으로 나갔다가, 에라블은 시뻘건 머리의 비르고와 딱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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