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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44화 (44/132)

44.

‘으, 추워….’

벌써부터 추워죽겠다. 진짜 항성이 네 개나 되면 뭐 하냐고. 어둡고 춥고.

에라블은 몸을 웅크렸다.

점퍼를 단단히 여미며 59, 간판도 없이 혼란스러운 그래피티가 엉켜 있는 건물 지하로 들어갔다.

덩치 큰 가드들이 그녀를 힐끗거린다. 59의 트랜스폼은 상당히 구식이었다. 그래픽이 약간 깨져 있는 사람도 있었고. 무기상이나 용병도 아닌데 큰돈 쓸 필요가 없긴 했다.

에라블은 문가에 서서 잠시 대기했다. 알아본 남자 하나가 들어가 보라는 듯 고갯짓을 한다.

“왔냐.”

“예.”

웬일로 기다렸다는 듯 아는 척을 하는 59 사장을 약간 미심쩍게 보며 그녀는 두서없이 놓여있는 소파를 피해 카운터로 다가갔다.

고객으로 보이는 몇몇이 힐끗 시선을 두었다가 무심히 지나갔다.

신체 레벨 낮은 건 이럴 때 요긴했다. 그 누구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요새 쥐새끼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던데.”

59의 사장은 약물과 신체 레벨로도 주름을 감추지 못하는 나이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감찰부 요원 말이야.”

걔네야 항상 있다. 하지만 새삼스러운 얘기를 사장이 굳이 꺼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슬릿에서 찾았어. 알지? 며칠 전에 사고가 터졌거든.”

사장이 검게 그을린 작은 합금 조각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

특수 제작된 합금이었다. 단가가 비싸 사용자들이 특정되었다. 주로 돈 많은 제후의 기사단이나 제국 요원들이 사용하곤 했다.

2155는 분쟁지역이었고 그나마 세력이라고 할만한 건 2황자쪽 뿐이었다.

이런 곳에 제후의 기사단이 돌아다닐 리는 없으니 요원일 확률이 높았다.

“꽤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는 것 같아. 조심하라고. 너희야 뭐 알아서 잘하겠지만, 선물이야.”

선물은 무슨. 알아서 자르든 잘리든 하라는 거지. 에라블은 조각을 챙긴 뒤, 지폐 다발을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59 사장이 무슨 뜻이냐는 듯 눈을 치켜떴다.

“소개료입니다. 페룸이요.”

“아, 아아.”

에라블에게 페룸의 복합 키메라 연구소, 그러니까 불법 보조 장비 시술 업체를 소개해준 건 59 사장이었다.

“장비 성능은 어때? 써봤어?”

지폐를 세며 사장이 물었다.

“아직 안 써봤습니다. 엊그제 넣었는데요.”

“돈이 남는데?”

“융화제 주십시요. 마력 순환제하고 실드 디스크도요. 약도 한 세트 부탁드립니다.”

“너 진짜 오래는 못 살겠다.”

요새 이 소리 진짜 너무 자주 듣는다. 이 이계인들은 왜 꼭 자기들 기준으로만 생각하는 걸까.

역시 선량한 지구인이 살기에 너무 험악한 세계다.

“진짜 APU를 박다니. 너도 참 어지간히 독종이야.”

에라블은 사장이 깔깔대는 소리를 못 들은 체하고 물었다.

“생체 앰플 좀 구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또? 구할 수야 있는데, 우리 약쟁이 그게 얼마짜린진 알지?”

“돈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장기를 팔아서라도 갚겠습니다.”

“약쟁이 장기를 누가 사.”

뭐, 왜, 취향 특이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근데 괜한 낭비 아니냐? 감찰부 해결 못 하면 어차피 써 봤자일 텐데. 너네 벌여 놓은 일 꽤 많잖아. 이렇게 쑤시고 다니는 거 보면 아주 작정한 것 같은데.”

“해결할 겁니다.”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문제지만…, 씨X.

59 사장은 어깨를 으쓱하곤, 옆에 있던 여자에게 고갯짓했다.

여자가 약과 디스크를 챙겨다 주었다. 59 사장은 약상자에 서류 봉투를 얹어 주었다.

“생체 앰플은 따로 보내줄게. 그게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네? 뭣하면 가는 길 선물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씨X. 조의금은 현찰로만 받는다고. 투덜대며 돌아 나오는 에라블의 뒤통수에 대고 사장이 외쳐댔다.

“일 꼬이면 서류부터 파기해야 해, 알지?”

에라블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싶었다. 무력한 특수능력 계약자였기 때문에 그냥 상상만 했다.

* * *

‘…요원이라니.’

에라블은 내항용 셔틀을 타고 중대로 돌아오며 머리를 싸쥐었다.

‘그것들은 갑자기 또 왜….’

무슨 바람이 든 건지. 그간 정보 은폐만 신경 썼지, 물리적인 추적은 딱히 걱정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분쟁지역은 하나의 거대한 슬럼가이면서 동시에 작은 군소 조직들로 뒤엉켜있었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균열은 그 외의 다른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손대봤자 손해만 볼 뿐인 곳이라서, 지하 경제에 질서를 맡겨 놓는 것이 최선이었다. 너무 눈에 띄는 짓만 하지 않는다면 귀찮아서라도 그냥 내버려 뒀었는데…. 머리가 복잡해 죽겠다.

어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대 외곽에 내린 그녀는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평소와 같이 직장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뇌물을 바쳐댔다.

“수도에서 막 가져온 신선한 맥주, 맥주가 12cp입니다. 예? 원가가 6cp 아니냐고요. 아니, 심부름 값은 주셔야죠. 선박료만 5천 cp입니다. 담배요? 담배는 18cp로 모시고 있습니다.”

어둑한 길을 빙빙 돌며 방문 판매, 아니, 뇌물을 바치고 소정의 심부름 값을 받아 챙겼다.

“대체 얼마를 올려받는, 윽…. 소위님 머리 또 안 감으셨습니까?”

“감았습니다.”

3박 4일 전에. 그만하면 뭐, 감은 거나 다름없다. 신체 레벨이 낮아서 티가 조금 날 뿐이었다.

지들은 막 1주일씩도 안 감으면서. 에라블은 툴툴대며 털모자를 꺼내 꽉 눌러썼다.

“아! 거기다 털모자는 왜 쓰는데요!! 똥 위에 신문지 덮으면 뭐가 달라져요?”

“까고 다니는 것보단 낫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사람한테 똥이라니, 말이 너무 심하시네. 에라블은 머리가 간지러워 털모자 위를 벅벅 긁었다.

“악! 좀 씻고 다니라고요! 안 그래도 못생긴 게!”

“씻으면 좀 낫습니까?”

“아뇨?”

“그것 보십시오. 해도 안 되는데 뭐하러 애를 씁니까.”

“듣고 보니 그러네요?”

도리어 에라블에게 설득당한 병사는 미안했는지 담배를 두 갑이나 더 사주었다.

멍청하긴, 냄새까진 생각을 못 하시는군. 에라블은 웃으며 다음 손님을 찾아 건물 사이를 빙빙 돌았다.

“초콜릿, 초콜릿 주문하셨던 분? 수도에서 막 가져온 달달한 초콜릿이 40cp, 40cp입니다. 고급 수제 과자도 있습니다. 단돈 39cp에 모시겠습니다.”

바빠 죽겠는데 콰과광-, 포탑 반동에 건물이 또 바르르 흔들렸다. 들러붙어 있던 성에가 떨어져 눈발처럼 흩날렸다.

“아우, 추워!”

에라블은 몸을 웅크리고 연신 바쁘게 건물을 돌며 뇌물을 나누곤 본관 건물로 이동했다.

“저 들어가도 됩….”

본관 중대장실 문을 두드리려던 에라블은 멈칫했다.

잠깐. 잠깐, 잠깐만. 이거 아니야. 지금 아니야.

“뭔데, 들어와.”

에라블은 고개를 저었다.

싸했다. 인생의 빅데이터가 지금은 아니라고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럼 아닌 거지.

“이따가 다시 오겠….”

“주접떨지 말고 빨리 들어와!”

씨X. 오늘 욕할 일이 많네? 에라블은 벌레 씹은 얼굴로 중대장실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중대장실 소파에서 절찬리에 생식 활동 중이었다. 밑에 깔린 자곤 상병과 사이좋게 합체되어 있는 광경은 안구에 치명적이었다.

윽! 내 눈! 그 와중에 자곤이 아는 체까지 해왔다.

“학, 바람! 소위님! 문 좀요!”

“…예에.”

첫 만남에 아주 좋은 제안을 했었던 자곤은 지금 열심히 노동 중이었다.

근무 중에 부업은 명백한 노동법 위반 아닌가. 상하가 쌍으로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안구를 빼서 흐르는 물에 씻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이런 부분이 지구인으로서 제일 감당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더군다나 난 보수적인 동양권 출신이라고! 데제가 깔끔한 신사인 척을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만일 그가 개들 있는 데서 이러셨으면, 어후. 애써 인생의 밝은 면을 찾아보려 애를 쓰고 있는데 앞에서 합체 중이라 집중이 잘 되질 않았다.

“뭔데. 왔으면 제 숙소로나 갈 것이지, 또 담배 팔러 왔….”

성가셔 죽겠다는 듯 짜증을 부리던 중대장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것도 모자라 하다 말고 갑작스레 몸을 일으켰다.

“…너.”

그러고는 무섭게 에라블을 노려보았다.

덜렁대며 죽어가는 거뭇한 중심부를 혐오할 겨를이 없었다. 190cm에 달하는 거대한 덩치가 무섭게 노려보니 간이 쪼그라들었다.

일어선 그가 그녀의 관절마다 씹듯이 훑어보았다.

에라블은 중대장이 삽입된 APU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양어깨, 팔오금, 손목, 두 무릎, 고관절, 척추… 13개에 달하는 APU를 하나하나 훑으며 노려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 그렇지.”

어딘가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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