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는 주인이 필요하다-43화 (43/132)

43.

“…예?”

“샴푸 펫샵에서 샀냐고.”

“아니요…, 마트에서.”

“애견용인데?”

“…….”

뭐…, 아무렴 어떤가. 중대 보급품보단 수도 개들이 좋은 샴푸를 쓸 텐데. 게다가 샴푸야 거품만 잘 나면 그만이지.

“너 진짜 매번 이럴 거야?”

“…그거 되게 좋은 겁니다, 되게… 비싸던데.”

하지만 되돌아오는 시선이 싸늘했다. 에라블은 그냥 조용히 있기로 했다.

사실 말할 힘도 없다. 욕조 난간에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져 그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는 개 샴푸 대신 비누와 바디클린저로 몸을 닦아 주었다.

아, 너무 늘어진다. 보조 장비에 인식표까지…. 신체 2레벨이 기운 차리기엔 너무 혹독한 일정이었다.

일반병 수준만 됐어도. 하여간 특수 계열은 문제가 아닌 게 없다.

근데 밥은 어떡하지. 스테이션에서 또 라면이나 한 그릇 사 먹어야 하나.

정기선 타기 전에 그래도 뭘 먹어둬야 한다는 뭐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하며 멍하니 기대어 있던 에라블은 움찔 몸을 떨었다.

코피 몇 방울이 욕조 난간을 타고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젖은 손으로 코와 입 주변을 천천히 닦아주었다.

“진짜 오랜 못 살겠네.”

데제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아주 금방이겠어요.”

착각인가. 뭔가 섬뜩했다. 하지만 그는 희게 질린 에라블의 머리카락을 그저 다정하게 넘겨주었다.

지금은 데제가 다정하게 구는 시간이었다. 그래, 착각이겠지.

나는 잘하고 있다. 더 잘할 수 없을 만큼 정말 열심히 잘하고 있었다. 지금 인식표도 갱신했고…, 그러니까 이유가 없다.

그가 머리카락을 넘긴 빈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었다. 귓가와 뺨에도…. 그래, 다 착각일 것이다.

애라블은 애써 불안감을 눌렀다.

* * *

[그러니까 네 말은 네가 X 같은 남자를 만나고 있다, 이거야?]

카밀이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아니, 제 얘기가 아니라요. 제 친구 얘기라니까요?”

[그래, 그렇다고 치고. 어쨌든 X 같은 남자를 만나고 있단 거잖아.]

“아니, 그게 평소엔 되게 잘해주시거든요? 제 친구 얘깁니다.”

[알았다고.]

“그, 되게 잘해주시는데. 뭔가. 되게 뜬금없이 뒷골이 싸하다는 겁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요. 역시 착각이겠죠?”

[너 혹시 유산 상속받기로 했냐?]

“…포기 각서 쓴 지가 언젠데요.”

[그럼 보험은?]

“…….”

말을 말자. 아니, 진짜 이유가 없다고. 인식표도 무사히 갱신받았고. 싸하긴. 역시 착각이야, 착각.

[방울뱀 조심해라. 오래 만났다고 방심하지 말고. 면식범이 제일 무서운 거야.]

방울…, 아, 진짜 말을 말아야지. 그 면식범이 누군지 알면 더 무서울 텐데.

[그니까 왜 하필 여기 애냐고. 죄 전과자뿐인데. 걸려도 꼭.]

카밀은 에라블이 만나고 있는 적합자가 현재 수도 인근에 퍼져 간부진의 수발을 드는 6개 중대 소속 중 한 명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신약이라고 계속 우기기에 2년은 너무 길었다.

[너 진짜 누군지 말 안 해줄 거야?]

“제임스, 루카스, 알렉….”

[니 희망 사항 말고, 아, 진짜 누구냐니까!]

“피스티스요.”

[맥주 좀 그만 처먹어!!]

그건 좀 곤란하다. 내 삶의 낙이니까.

[넌 하여튼.]

결국 쯧, 혀를 찬 카밀이 차트 넘겨보는지 패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몸 상태는 괜찮아.]

APU는 탐지가 안 된 모양이었다. 됐으면 지금쯤 아는 욕을 전부 다 퍼붓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X 같아도 참아, 알았어? 또 안정제 먹을 생각 말고.]

“예에….”

맨날 똑같은 소리다.

[뭐 따로 더 필요한 건 없지?]

“근처에 59 있는데요, 뭐. 예. 잘 알아보고 사고 있습니다. 제가 약을 몇 년째 사고 있는, 아니, 뭘 또 그따위로 산다고. 저 되게 열심히 살고 있거든요? 아니, 자랑이 아니라….”

잔소리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아, 저 이제 승선해야 합니다. 어어, 왔다.”

에라블은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내 주변 사람들은 진짜 왜 이렇게 잔소리가 많은지, 영문을 모르겠다니까.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는 대기 중인 셔틀 안으로 들어섰다.

탑승객이 많진 않았다. 대충 빈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으니, 셔틀은 어느새 상승하다가 순식간에 스테이션에서 멀어졌다.

에라블은 창 너머로 작아지는 행성을 쳐다보았다.

네모반듯한 이계 행성의 시가지가 꼭 비스킷 같다. 네오 제과에서 나오는 비스킷이 꼭 저렇게 생겼는데. 매운 라면을 먹었더니 비스킷이 당긴다.

멍하니 과자 생각을 하는 사이에 행성 외부로 나온 셔틀은 덜커덩 소리를 내며 대기 중이던 장거리 함선과 도킹했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솜니움 호는 제도 임펠리움에서 출발하여 제2155 행성계까지 운항하는 장거리 여객선입니다.]

맨날 똑같은 안내 방송을 대충 흘려들으며, 에라블은 지정된 캡슐로 기어들어 갔다.

[승객분들의 안전을 위하여 현재 시간부로 시그눔 채널의 연결이 일시 중지됨을 알려드립니다.]

의무 수면 시간이 있는 이 수면 캡슐은 선박료가 제일 저렴했다. 사람이 아니라 짐짝 운송 수단 같단 평이 지배적이긴 했지만.

[삼등석을 이용하시는 고객님들께선 의무 수면 시간을 준수해주시기 바랍니다. 20시간 이상의 연속 수면은 권장되지 않습니다.]

무조건 쥐 죽은 듯이 재워버리니 짐짝 취급이란 말도 아주 틀린 얘긴 아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리겠습니다. 삼등석을 이용하시는 고객님들께선….]

그래도 최소 10시간마다 40분의 활동 시간이 보장되어 있다. 다행히 짐짝보단 약간 나은 취급이긴 했다.

‘으으윽….’

수면 시간을 맞추고 안으로 기어들어 가며 에라블은 끙끙 앓는 소릴 냈다.

짐짝 취급이고 뭐고, 힘든 일정을 보낸 그녀에게 수면 캡슐은 안성맞춤이었다.

싸고, 맘 편히 잠만 자면 되고,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주 적극적으로 곯아떨어졌다.

* * *

“수면 시간은 최대 20시간이라고 이미 몇 번이나 안내받으셨잖아요. 이게 대체 몇 번째세요. 자꾸 이렇게 70시간씩 맞춰놓으면 어떡합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해서.”

리미트를 걸어 놓던가.

“계속 이러시면 저희도 블랙리스트에 올릴 수밖에 없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에라블은 최대한 불쌍해 보이는 표정으로 항해사를 올려다보았다.

잠 좀 오래 잤다고 블랙리스트라니. 아무리 뇌사 위험이 있다고 해도 진짜 너무하다.

“다른 분들은 돌아다니셔서 문젠데, 진짜 고객님은…. 어휴. 다음번엔 진짜 안 봐 드려요.”

“예, 정말 감사합니다!”

“스트레칭하고 식사라도 좀 하세요. 고객님의 부주의로 인한 사고는 저희 솜니움 호에선 절대 책임지지 않습니다.”

“예, 예, 물론입니다.”

“어휴, 진짜 죽은 줄 알았네.”

투덜대며 사라지는 항해사에게서 눈을 떼며 에라블을 길게 하품을 했다.

70시간 가지고 오버는. 반성의 기미라곤 전혀 없이 그녀는 꿈지럭꿈지럭 선내 식당으로 가 적당히 한 끼를 때웠다.

[…84WP에서 미로 2기를….]

[…121WP에서 단기파견 요청….]

제2155 행성계로 들어오니 허가 요청이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에라블은 적당히 걸러 들으며 셔틀 게이트 구석에 조용히 처박혀 시그눔 채널을 열었다.

함선의 시그눔 채널 차단기는 A급이 기준이다.

S급은 제국 내에서도 몇 명 없었다. 그들을 기준으로 설비를 해놓는 민간 선박은 없다.

낮은 신체 레벨로 어디서나 굽신거리고 다녀서 그렇지, 에라블은 등록만 하면 서류에 네임으로 관리되는 최고등급자였다. 내가 진짜 등록만 하면….

[…39WP 승인 거절….]

[재요청 진행 중….]

인공정령에 제한을 걸어두었기 때문에 귀찮아도 일일이 체크를 해줘야 했다.

다행히 잘 안착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몇 개월 정도는 더 두고 봐야 한다.

아직 잠이 덜 깨서 머리가 몽롱하다. 내 잘못이 아니다. 인생이 피곤해서 어쩔 수 없, 아. 내 인생이 잘못됐네.

그녀는 짧게 자아 성찰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77콜로니는 80과 같은 2155 행성계에 속해있는, 공권력이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슬럼가였다.

그나마 80보단 후방이어서 스모그가 덜하긴 했지만, 가시거리 안 좋은 건 마찬가지다.

에라블은 데제에게 선물 받은 SDP(스펠 디스크 플레이어)를 작동시켰다. 비싼 거라 그런지 아주 빠릿빠릿하다.

미리 메모라이즈 해둔 인식 장애 디스크를 돌리며, 그녀는 가로등에 의지해 어둑한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제2155 행성계는 그것도 사성계인 분쟁지역이었고, 감시망을 피해 세력을 잡고 있는 조직들이 수두룩했다.

에라블도 그런 이유로 여길 선택하긴 했지만. 그만큼 엮이면 곤란한 인간들에게 인기 많은 지역이다.

인식 장애도 없이 맨몸으로 다닐만한 곳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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