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야, 내려. 야!”
에라블은 화들짝 놀라 번쩍 눈을 떴다. 언제 도착한 건지, 벌써 차 문이 열려 있고 아리에스는 또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입가에 굳은 침을 닦으며 서둘러 일어섰다. 개구호흡을 했더니 침이 말라 잘 떼지질 않았다.
그냥 손톱으로 긁으며 차에서 내리는데, 아리에스가 왠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아으으, 씨X…!”
왜 저래. 역시 갱년기 문제인가, 에라블은 그런 아리에스를 슬금슬금 옆으로 피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분위기가 어째 썰렁했다. 새벽이라 그런가. 숨 쉬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주변이 고요하다.
고층으로 올라 온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전, 거울을 보며 코에 덧댔던 거즈를 떼어냈다.
고개를 들어 콧구멍을 확인하니 마침내 피가 멎어 있었다. 킁, 숨을 들이켜며 코볼을 정리한 뒤 곧장 데제의 사무실로 갔다.
“…들어와.”
똑똑―, 문을 두드리고도 한참 후에야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고요한 복도에서 듣는 데제의 목소리는 조금 섬뜩했다.
그는 일하는 중이었다.
“…….”
많이 바쁘신지 그렇게 한참, 그는 서류만 넘기고 있었다. 뭔가 좀…, 싸한 기분에 에라블은 긴장했다.
“근섬유 강화, 중추신경 제어, 감각 제어, 반사신경을 포함한 시야 확장….”
한참 만에야 그가 책상에 기대서서 패드 스크린 위에 뜬 내용을 읽어 내렸다.
“이쯤 되면 신체 제어권을 장비에 다 떠넘긴 수준인데?”
그녀가 몸에 부착한 보조 장비 목록은 13종에 달했다. 이유야 듣지 않아도 뻔하지만. 그래도 데제는 물었다. 왜 이런 짓까지 했느냐고.
“잦은 부상으로 업무 효율에 문제가 생기고 있었습니다. 보조 장비가 통증이 좀 있긴 하지만, 부상으로 얻는….”
데제는 이어지는 에라블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잦은 부상으로 인한 업무 효율 하락, 어차피 부상으로 인한 통증이나 보조 장비로 인한 통증이나 비슷하다는 판단.
그렇다면 효율이 좋은 쪽으로 가는 게 당연히 낫다는 결론.
언제나 그렇듯, 지극히 합당한 결론이었다.
그래서 에라블은 자신의 몸 주요 관절마다 보조 장치를 13개나 박은 것이었다.
“역시 오래 살 생각은 없는 게 분명해, 그렇지?”
하지만 에라블은 그건 너무나도 이계인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지구인 기준으론 그럭저럭하였다.
“할 말 있는 얼굴인데?”
“예, 저, 혹시 선박의 추가 구매를 할.”
“선박? 선박은 왜.”
그는 에라블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121번 웨이포인트의 운송 기한이 지속해서 오버되고 있습니다.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일주일까지 오버되는데, 거래량 증가로 인한 운송선이 부족한 단순 문제로 판단됩니다.”
“아, 그래서 선박을?”
“예. 반면 39번에선 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그쪽에선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절대 선박을 내줄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조율이 안 된다면 역시 선박의 추가 구매를.”
“나한테 할 말이라곤 다 그런 것뿐이지.”
줄줄이 이어지는 업무 브리핑에 그가 작게 웃으며 또 물었다.
“밤새 야근이라도 했어요?”
“자, 잠도 안 오고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어서….”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아, 에라블은 변명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토하느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새 코피와 구토의 하모니였다. 코나 입 둘 중 하나는 비어 있어야 숨을 쉴 텐데 둘 다 난리여서 한숨도 못 잤다.
거기다 피 설사까지. 위아래로 쏟으면서 덕질을 하고 싶진 않았고, 그런 이유로 일 말고는 진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또 약이라도 처넣고 주무시지, 왜?”
“중첩 현상 때문에 수면제가 안 들었….”
“중독이겠지.”
에라블은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언제 출발합니까?”
데제는 담배를 재떨이에 대고 비벼 껐다.
“인식표 갱신하고, 내일모레쯤 정기선을 이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뭐, 그래요.”
그는 또 픽 웃고는 대답했다.
“인식표나 맞죠.”
* * *
석 달에 한 번 있는 이 외근은 일정이 퍽 일관적이었다.
3일간은 데제의 서브 하우스에서 빈둥대며 보냈고, 나머지 3일간은 인식표를 맞은 뒤 백작가 사택에서 문을 닫고 지냈다.
수도에서 미인가 대정령을 타고 돌아다닐 순 없었기 때문에, 갱신 자체를 사택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개들이 커버 쳐줄 것을 믿고 하는 짓거리이기도 했다.
“끄으으윽-”
온몸이 바글바글 끓어 올랐다.
수천 마리의 벌레가 자근자근 몸을 뜯고, 뒷머리는 톱날에 갈려 나가는 것 같다.
악다문 입에선 고인 피 맛이 낫다.
고통을 견디는 법은 단순했다.
모래알을 세듯, 에라블은 제게 남은 기억을 셌다.
엄마, 아빠.
내 이름은 민지우였고….
그리고 친구들은…, 수빈이, 경아.
우리 집 앞에는 슈퍼가 있었다.
아, 세탁소도….
이세계 13년 차, 기억이 흘러내릴수록 마음은 더 간절해졌지만, 고통을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이길 수 있으면 고통이 아니다.
고통은 머릿속을 희게 만들었고, 내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며, 똥오줌을 지리게 하는 육신의 고통 앞에 마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까지 깨닫게 했다.
남은 기억은 지푸라기나 마찬가지였지만, 그거라도 잡을 수 있어 그래도 지금껏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버텨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때론 그게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으…, 흐으으윽-”
에라블은 몸을 뒤틀며 손을 뻗었다.
진통제…. 그녀는 주사제를 찾아 더듬거렸다. 덜덜 떨리는 손이 흐릿한 시야를 더듬는다. 누군가가 뒷목을 잡아 꾹 눌렀다.
에라블은 그제야 자신이 다른 사람 몸 위에 엎드려 있음을 알아챘다.
잠시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깼습니까.”
데, 데제브 아브가니스.
데제브 아브….
현신체. 레벨 13. 웃음, 그의 웃음소리, 희생자의 비명, 피, 피 냄새, 싸늘하게 식어가던 사람들의 얼굴….
지금 침대에 늘어져 누운 그의 몸 위에 엎드려 있었다. 뒷목은 그의 손에 감싸 쥐인 채로.
순간 그 손이 주삿바늘을 찔러 넣으면서 주었던 고통이 치솟았다.
“…미, 미로-”
에라블은 고장 난 라디오처럼 중얼거렸다.
“미로…, 미로를….”
“여기 백작가 사택이야.”
데제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또 어디로 가게?”
에라블은 잠시 눈을 껌벅대다가, 자기 품으로 가만히 누르는 그의 손짓에 축 늘어지듯 힘없이 그의 가슴에 머리를 괴었다.
숨이 낮고 규칙적으로 오갔다. 그는 마치 쓸어주기라도 하듯 뒷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에라블은 연신 느리게 눈을 껌벅대다가 다시 감았다.
제대로 정신을 차린 것은 그러고 이틀이 지난 뒤였다.
의식을 차리자마자 그녀는 시간부터 확인했다.
“…지금 몇 시….”
데제가 손가락 사이에 끼고 있던 담배를 입에 옮겨 물고는, 구겨진 시트 위로 손을 툭 떨어트려 손목시계를 찾아 쥐었다.
“9시 됐네요, 오전.”
제시간에 일어났다는 안도감에 다시금 축 늘어진 에라블의 몸을 데제가 가볍게 안아 들었다.
“좀 씻죠.”
굳이…, 싶었지만. 이미 옮겨지고 있었다. 에라블은 그에게 들려가며 멍하니 복도를 떠다니는 먼지 알갱이들을 쳐다보았다.
사용되지 않는 백작가 사택은 고요했다.
신년제조차 대리인을 보낼 정도로 수도 일에 관심이 없는 백작가에선 사택을 방치하고 있었다.
그저 명목상 유지는 하지만 가끔 수리하거나 외부 정원을 관리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나마 최근 1년 반 동안 에라블이 사용을 위해 작은 방 하나와 욕실 하나 정도를 치워두었을 뿐이다.
솔직히 외근 기간엔 그냥 계속 여기서 지내고 싶었지만. 데제가 낡고 후졌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같이 지내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뭐, 솔직히 낡고 후지긴 했다.
“흐으….”
그가 온수를 채운 욕조 안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에라블은 가늘게 신음했다. 인식표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공포와 관리.
그녀는 그것에 완전히 순응했다. 아니었어도 순응했겠지만, 더욱 적극적으로 순응했다.
이제 앞으로 다시 3개월간은 그럭저럭 안심이다.
그래서 에라블은 사실 이 고문 같은 일정에 한편으론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쓸만하단 증거였으니까.
“입 벌려 봐요.”
데제가 에라블의 턱을 한 손에 쥐고 관절의 이음새를 느슨히 눌렀다.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그는 손가락을 넣어 치아를 확인하더니 양치 컵에 물을 받아 주었다.
에라블은 입안을 헹군 뒤 욕조 밖으로 몸을 내밀어 배수구에 뱉어냈다.
기운이 하나도 없다. 주사제 키트나 돌려주고 혼자 있게 해준다면 정말 좋을 텐데….
언제부터인가 그는 도통 이 일을 혼자 해결하게 내버려 두질 않았다.
병 주고 약 준다는 생각은 굳이 하지 않았다. 왜냐면 무서우니까.
“…….”
그가 셔츠 소매를 걷고 에라블의 뒷머리를 한 손에 쥔 채 샴푸를 집어 들다가 멈칫했다.
“…에라블, 이 샴푸, 혹시 펫샵에서 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