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일단 저 황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원작에서 제정신인 등장인물은 없다.
애초에 이세계에서 지배욕의 숙주가 아닌 유전자는 굉장히 희박했는데, 황자는 이 희박한 유전 인자와 인연이 없었다.
황자 역시 다른 사람에게도 각자의 생각과 나름의 불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 못 하는 평범한 이세계 살인마에 불과했다.
심지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개들에게 패악을 떨던 것을 생각해보면 원작에서 상태가 제일 안 좋았다.
그리고 솔직히 둘의 연애가 잘돼봐야 데제와 개들이 크게 변할 것 같지도 않았다.
여전히 죽일 사람은 죽이고, 죽여도 될만한 사람들도 다 죽이겠지. 벌여놓은 사업이 몇 갠데.
개과천선은 괴담이다. 그거 믿고 달려들었다가 목숨이 열두 개라도 모자란다.
운명은 무슨. 저 황자는 어쩌다가 저렇게 데제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됐는지 안쓰럽긴 하지만, 지금 내가 누굴 걱정하고 그럴 때가 아니다.
에라블은 신고 있는 신발 한 짝 값이 자신의 전 재산보다 더 많을 남자들에게서 눈을 떼고 주머니를 뒤적여 작은 쪽지를 꺼내냈다.
- 112번가, 4457-88XX
- 페룸 복합 키메라 연구소
더 시간이 지체되기 전 그녀는 서둘러 걸음을 뗐다.
* * *
‘씨X….’
아리에스 시더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인적 드문 제약 단지 후문의 뒷거리는 스산했다.
말끔하게 정비된 도로 위로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지나치게 이른 새벽이다.
‘내가 왜….’
제약 단지 특유의 약품 냄새가 코를 찔러댔다. 제약 회사 몇 개가 모여있는 2,870 섹터 112번가, 공장 단지 뒤쪽.
저층의 오피스텔 건물 몇 채가 서 있었다. 대부분 직원 숙소 용도로, 별로 특별할 것은 없어 보였다.
‘씨X.’
불법 신체 개조나 무허가 세포 실험, 그것을 위한 인육 거래 등등이 이뤄지고 있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개들이 운영 중인 리페이사도 이런 종류의 업소를 몇 돌리고 있긴 했다.
소규모로 데이터 모으기에 적당했고, 은근슬쩍 시제품도 테스트해볼 수 있었고. 직접 방문할 일이, 그것도 이 새벽에 생길 거라곤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씨X…!!’
그중 한 오피스텔 앞, 차에서 내린 아리에스는 참지 못하고 계단을 걷어찼다. 세게 찰 수가 없어 분노만 더 쌓인다.
‘…진짜 내가 왜!!’
깊게 숨을 내쉰 그는 마저 계단을 올랐다.
에라블 버밀리언이 대체 이런 델 어떻게 알았나 싶다가, 그 여자가 미신고된 S등급 시그눔 계약자라는 사실이 기억났다.
이게 우리를 만나기 전에도 딱히 평범하게 살진 않았다. 이동자들이 다 그렇지.
이동자들은 대체로 어설프게 굴다가 연구소로 끌려가거나, 별것 아닌 이유로 상위 등급에 하극상을 일으켜 살해되거나 했다.
에라블처럼 현지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이동자는 극소수다. 그 극소수조차 말도 안 통하는 이세계의 풍파를 상당히 험하게 겪기 때문에, 불법 업체와 엮이는 일 정도는 그냥 디폴트 옵션이었다.
‘441x.’
아리에스는 남의 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멋대로 누르고 안으로 들어섰다.
당연히 소란이 일었다. 야단을 떠는 인간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이들의 본사와 전화를 연결해 주었다.
“죄, 죄송합니다. 리페이사 분인 줄 몰라뵙고….”
“여기 여자 하나 있죠?”
그는 상주 직원의 말을 툭 끊으며 물었다.
“여자요?”
“키는 한 요만하고, 어젯밤에 와서 APU 삽입 수술받았을 텐데.”
“아! 이, 이쪽 방에 있습니다.”
씨X, 진짜 있네. 왜 하필 나인 것이냐고! 아리에스는 아무 데나 대고 소리를 질러대고 싶었다.
인식표에서 변경 신호가 왔을 때, 올은 인식표 개발을 그가 담당했다는 이유로 이 일을 그에게 맡겨 버렸다.
‘그게 대체 언제 일인데!’
아에스는 억울했다. 이런 일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비르고 같은 놈들 많잖아! 에라블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는!! 그런 놈들 보냈으면 에라블의 목덜미를 질질 끌고 갔겠지.
귀찮게 했다고 몇 군데 부러트렸을지도 모른다. 데제의 장난감이니, 데제 앞에 데려다 놓기 전까지만 깨끗하게 고쳐 놓으면 된다고 생각할 테니까. 올이 그를 보낸 진짜 이유였다.
“…이런, 미친.”
그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섰다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피로 얼룩진 방, 알싸한 약품 냄새, 몇 개나 달린 수액과 피 붕대로 가득한 양동이.
에라블 버밀리언은 철제 침대 위에 누워 식겁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마치 자기가 더 놀랐다는 듯이. 아리에스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야….”
“…예, 예.”
아리에스는 이성을 찾기 위해 애썼다. 잘 되진 않았다. 미간을 꾹꾹 짓누르며 심호흡하듯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넌 이젠 하다 하다 외박까지 하냐?”
“…예?”
말귀를 전혀 못 알아듣는 저 얼굴을 보니 정말 잘 되질 않았다.
“저, 대위님께선 여긴 어쩐 일로…?”
묻다 말고 전화기를 찾는지 주변을 더듬는다. 엉켜 있는 붕대 더미를 이리저리 밀치다가, 안 되겠는지 다 침대 밑으로 떨어트리고 있었다.
그러자 이젠 아예 양동이가 보이질 않았다. 산더미 같은 피 붕대에 파묻혀서.
“아, 미치겠네.”
아리에스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야.”
“예, 예….”
“너 그냥 대충 좀 살 수 없어?”
그는 코에 두꺼운 거즈를 붙여 놓고 개구호흡하고 있는 에라블을 노려보며 소릴 질러대기 시작했다.
“씨X, 그냥 대충 좀 살라고!! 분쟁지역도 모자라서 이게 지금 APU를…, 13개나, 씨X 13개! X같네, 진짜. 너 그거 뒈질 때까지 융화제 넣어야 하는 건 알고 있냐?”
“예,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X도 모르면서.
“데제가 화내실 거야, 화내실 거라고!”
“데제께서 말씀이십니까…?”
왜요, 안 한 뒷말이 들리는 듯했다. 아리에스는 머리 가죽이 열릴 것만 같았다.
“야. 너 그냥 토껴. 너나 나나 한 방에 끝내게. 질질 고통받는 것보다 그냥 다 같이 짧고 굵게 한 방에 끝내는 게 낫지 않겠냐?”
“그….”
“왜, 너 그런 거 좋아하잖아, 어? 그리고 혹시 또 모르지. 잘하면 살 수 있을지도.”
“인식표에 자폭 기능….”
“씨X!!”
더는 못 참고 버럭 소리 지르니 에라블이 움찔 놀라 아예 벽에 들러붙었다.
진짜 겁은 더럽게 많으면서, 왜 자꾸 이런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 아리에스는 흉악스럽게 여자를 노려보았다.
코 밑에 댄 거즈에 붉게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에라블은 그것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면서도 또 슬금슬금 새 거즈를 한 겹 더 덧대는 것이다.
“아오!”
아리에스는 그 꼴을 보고 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씨X, 눈치 보면서 맨날 지 할 건 맨날 다 하지!’
그는 사납게 욕설을 짓씹고는 몸을 돌렸다.
“빨리 따라와!! 찾으시니까!”
쏘아 말했지만, 그는 채근 없이 기다려주었다.
링거 바늘을 빼고, 재킷을 껴입은 여자를 뒤에 달고 속도를 맞춰 오피스텔을 질러 나갔다. 내부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가 거실을 지나는 동안 오피스텔의 상주 직원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리페이사의 악명은 동종 업계 종사자들에게 더 실체적이다.
인체 실험용 연구소가 따로 있다는 둥. 동종 업계 종사자를 특히 선호한다는 둥. 내부에서 기술을 빼돌린 직원이 거래처 심처에서 산 채로 터졌다는 둥.
별의별 괴담이 많은데 대부분이 다 사실이었다. 심지어 흑마법을 연구한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빨리 타!”
에라블을 데리고 밖으로 나온 아리에스는 승합차 문을 열어주며, 새벽 공기에 달달 떨고 있는 여자에게 다시 소리를 질러댔다.
벤 안엔 이미 시커먼 복장의 남자 서넛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에라블은 빈자리를 찾아 앉으며 몸을 웅크렸다.
“출발해.”
앞자리 보조석에 앉은 아리에스는 히터를 세게 올렸다.
차라리 비르고의 말이 맞길 바랄 때가 오다니! 정말 여러모로 개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씨X.”
그는 또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얼마나 갔다고 뒷좌석에서 작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혼자 태평하게 자는 에라블의 모습에 빡쳐 배알이 뒤틀렸다.
그는 분노를 짓씹으며 히터를 더 세게 올려버렸다. 아주 더워 죽으라고. 혹은 땀 좀 확 빼고 나면 상태가 약간이라도 나아있길 바라면서.
그래봤자 인식표가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
에라블의 인생도 진짜 뭣 같다. 물론 끝없이 되풀이되는 그들의 삶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저것 인생도 진짜 X 같긴 했다.
아리에스는 다소 지친 얼굴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