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뭐야, 무슨 일이야?”
귀청 떨어질 뻔했네, 에라블은 귓바퀴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뭐 하고 계십니까?]
“뭐하긴, 왜?”
[어, 휴가 언제 끝나십니까?]
“갑자기 웬…, 그리고 휴가 아니고 외근이라고 말했지. 왜, 무슨 일 있어?”
[저기, 그, 진통제 어딨습니까?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뭐야. 그것 때문에 전화했어? 책상 첫 번째 서랍 안에 있잖아. 출발할 때 내가 분명히 말 해줬던 거 같은데, 없어?”
[어, 없습니다.]
“잘 찾아봐. 뭐? 항상 가던 날짜에 가겠지, 왜. 아, 마일드 3mg? 18cp. 비싸긴, 엄청 파격가에 해주는 거야. 오가는 선박료만 얼만데. 됐고, 심심하면 발 닦고 잠이나…, 어?”
에라블은 움찔 몸이 굳었다. 머리 위로 긴 그늘이 졌다. 금세 씻고 나온 데제가 손을 뻗어 아주 자연스럽게 전화기를 빼앗아 갔다.
[저 진짜 심심해서 전화 건 거 아닌 거든요. 사실은, 뭐 하고 계시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모, 목소리도 듣고 싶고.]
뺏은 전화기를 귓가에 대며 그가 픽 웃었다.
[저…,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고 계시죠? 또 와서 까먹었다고 하시면 저 진짜 화낼 거에요. 그러니까 대답…, 와서 꼭 해주세요. 보, 보고 싶어요….]
데제는 홈바에 삐딱하게 기대서선 포트 커피를 잔에 따랐다.
“그러게, 나도 좀 보고 싶네. 누구신지.”
[어…, 어, 누구세요?]
“내가 먼저 물었는데.”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그가 낮게 웃어댔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웃음소리였다.
[저, 저기…, 소위님은….]
“에라블? 에라블 소위는 지금 내 옆에 있고, 그쪽은 대답을 안 하네요. 대체 누구신지.”
[아! 아. 저, 저는 30사단 3중대 소속 일병, 마지아 올로르입니다!]
“그래요, 마지아 일병.”
데제는 일단 신원을 확보했다.
[저, 그, 그런데 진짜 누, 누구세…? 아! 저는 30사단 소속 마지아 올로르입니다….]
애가 방금 했던 말을 또 하고 있었다.
거실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목소리가 너무 잘 들린다. 약간 뭐에 홀린 것 같은…, 에라블은 불길함을 감지했다.
“일병이 소위한테 화낼 일이 뭘까? 평소에도 그렇게 장교하고 맞먹고 그래요? 둘이 친해?”
[아, 저, 저는 스물한 살입니다!]
어쩌라고, 데제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키, 키는 180cm고요, 머리는 황갈색에 호박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쿨루스 아카데미를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고요. 취, 취미는 서핑이에요!]
에라블은 마지아가 서핑보드를 실제로 본 적도 없을 거라는데 돈을 걸 수도 있었다.
그리고 키는 정확하게 178.9cm였지. 무려 1.1cm나 사기를 치고 있었다. 0.1cm면 몰라도 1.1cm이면 사기지. 평소 160cm라고 말하고 다니는 159.9cm가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한 듯했다.
마지아는 미팅 앱 프로필에나 쓸 법한 신상명세를 줄줄이 읊어대고 있었다. 그것도 대량의 MSG를 첨가해서.
데제의 목소리도 13레벨이다.
저 어린 영혼을 이해해 주자…. 인식 장애도 없이 생으로 버티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물론 이해 여부와는 상관없이 마지아의 목숨이 걱정되어 에라블은 식은땀이 났다.
“소위하고 무슨 관계냐고 물었는데. 원래 이렇게 말을 한 번에 못 알아듣나 봐요?”
[아! 소위님!]
마지아는 마침내 정신을 차린 듯했다.
[소위님 좀 바꿔주시면, 아,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잘 계신지 걱정이 돼서…. 보, 보고 싶기도 하고…. 수, 수도는 저녁때라고 해서, 그래서…. 소위님이 식사를 잘 못 챙기시거든요. 과음에 과로도 심하셔서. 사, 사귀냐고요? 아, 아닙니다. 아직….]
아니, 아직 못 차린 것 같기도 하다. 애가 끝도 없이 횡설수설이었다.
목소리가 진짜 왜 이렇게 잘 들리는 거냐고. 차라리 안 들렸으면 좋겠다….
“아아. 아직? 그럼 나중엔 사귈 거란 뜻이네? 둘이 진도는 나갔어요? 아, 고백했어. 재밌네. 하긴. 소위가 식습관이 문제가 좀 있죠. 음? 잘 챙겨 달라고?”
그는 한참 웃어댔다.
“내가 열심히 챙겨 먹이고 있는데,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 이런 소릴 다 듣네?”
그러는 동안 에라블은 그냥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데제는 빙글거리며 마지아와 족히 5분은 더 통화했다.
무슨 얘길 그렇게 하시는지, 한참 만에야 끊고는 그가 허리를 낮춰 시선을 마주했다.
“에라블.”
“예.”
“나 혹시 세컨드예요?”
순간적으로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데제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얘가 본처인 척하는데?”
“진통제를 찾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중대엔 군의관이 없어요?”
“있, 있습니다.”
데제는 다시 재밌다는 듯 소리 내어 웃고는 물었다.
“있는데 왜 당신한테 전화해?”
“의사는 있는데 약이 없….”
“그래서, 너 바람피워?”
들을 생각도 없으신지 말허리를 툭 자른다.
그 말은 진짜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었다.
일단 첫째로 그들은 바람 어쩌고 말할만한 사이가 아니었고, 둘째로 설령 그런 사이라 해도 데제브 아브가니스는 독점적인 관계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원작이 피폐물인 이유가 다 그에게 있다.
그렇지만 에라블은 즉답했다.
“아닙니다.”
벌써 여러 번 그녀의 목숨을 살린 싸한 촉이 정지한 이성 대신 대답했다. 이쯤 되면 진짜 그냥 자동응답기였다.
“얘한테 반말하더라? 둘이 많이 친해?”
“안 친합니다. 애가 아직 어려서. 일병 단지도 얼마 안 된 어린 친굽니다.”
“하긴 스물한 살이 어리긴 하지. 아, 그러고 보니 당신 좋아하는 배우들도 다 스무 살짜리들 아니었나? 역시 어린 게 좋긴 하지?”
“제가 그 정도로 변태는 아닙니다.”
“다 맞잖아. 스무 살짜리들.”
“다는 아닙니다.”
“아, 다는 아니야? 다른 애들도 더 있나 봐?”
“…….”
솔직히 몇 명 더 있긴 하지만…, 이게 대체 무슨 대화지? 에라블은 슬그머니 화제 전환을 시도해 보았다.
“시, 식사는 하셨습니까?”
께름칙하던 소 살점이 갑자기 선녀처럼 느껴졌다.
* * *
이미 저녁을 먹고 온 그에게 그가 포장해온 음식은 통하지 않았다. 통했던 건 데제의 다음 스케줄이었다.
다음 날 새벽, 그는 또 바쁜 일이 생겼는지 다시 나간다고 말했다.
“오늘은 아예 못 들어오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요.”
반 죽은 채로 잠결에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건 정말 신나는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나도 할 일이 있었다.
밤새 시달린 등허리에 주사를 두 대나 놓고, 에라블은 오전 일찍부터 데제의 집을 나섰다.
집 앞에서 무인 셔틀을 타고 40cp나 되는 미친 비용을 지급한 뒤 번화가에 내리자, 오늘따라 아침부터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에라블은 사람들 사이에 서서 가전 매장 쇼윈도 안으로 보이는 커다란 TV 화면을 잠시 쳐다봤다.
‘…….’
아나나사 황자가 새롭게 수도의 3,178번째 위성이 된 이마고의 시찰을 위해 친히 황궁을 나서고 계셨다.
데제가 오늘 하는 일도 금세 알게 되었다.
‘…본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네.’
그는 황자의 곁에서 의전을 맡고 있었다.
그가 현신 등급의 괴물이란 사실을 알고 보는 입장에선, 황족의 수발드는 광경이 섬뜩했지만.
저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황자의 부드러운 황금빛 머리칼이 바람결에 흐트러져 데제의 제복 위를 스쳤다.
새파란 하늘과 눈이 부신 햇살 아래 함께 걷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마치 한 짝으로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동성이라서 되려 애정 관계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더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완벽한 날씨, 완벽한 바람, 완벽한 각도…, 둘은 서로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보이는 모든 것이 그저 다 완벽하게 아름답다.
어쩌면 순간, 운명이란 게 진짜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삶이란 타임 어택 지뢰 찾기 게임이라 믿는 에라블까지도 살짝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의 품에서 밤새 시달렸던 입장에선 민망한 생각이긴 했지만, 나야 뭐 두루마리 휴지 비슷한 존재였고.
저 황자는…, 어쩌면 조금만 생각을 달리한다면.
다치게는 할지언정 절대 죽이진 않는 그의 옆에서 서로 밝은 미래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조금만-…, 물론 그 조금이 어렵지. 에라블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동안 괜히 지방에만 처박혀 산 게 아니다.
에라블은 재빨리 쓸데없는 생각을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