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재방이…, 오늘 10시 맞는데.”
에라블은 일단 최적화해놓은 배게 위에 널브러졌다.
그와 만나는 시간, 대략 석 달에 일주일 안팎.
두 사람은 어느덧 1년 반째 공사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관계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단 본부에서 함께 있었던 기간까지 합치면 무려 2년째다.
그는 이 지속적인 관계를 마치 영화나 드라마처럼 재밌어했다. 신체 레벨이 높은 그의 적합자들은 지배욕 관리를 못 해 그의 심기를 거스르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만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유흥 거리, 살아있는 장난감 같은 것이다.
“어, 하네!”
에라블은 그런 사실에 슬퍼하며 새로 리뉴얼된 피스티스 맥주를 깠다.
“크, 리뉴얼된 것도 괜찮은데?”
사람을 장난감 취급하는 남자의 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맥주 병나발을 불며 바닥에 널브러져 한쪽 다리는 척, 소파에 걸쳐두고 짭짤한 과자 안주에 대형 TV로 최애를 보는 맛이란.
“크으.”
진짜 너무 우울하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사랑해요.]
“내가 더 사랑해!”
에라블은 TV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분히 선택적인 대화였다. 이별 장면이었는데 그냥 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있었다.
“울지 마, 애기야…. 누나가 블루레이 3개 사줄게!”
에라블은 코를 훌쩍이며 주접을 떨었다.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
그렇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누가 저 이쁜 애랑 헤어져? 작가가 정신이 나갔네. 저렇게 귀엽고 예쁜데, 백수여도 먹여 살려야지!
하여간 어제 본방 놓치고 재방은커녕 꼼짝없이 블루레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될 줄 알았는데. 세상, 이렇게 또 재방을 본다.
인생은 역시 어떻게든 살고 봐야 하는 것이다. 아, 물론 그렇다고 블루레이를 안 산단 얘기는 아니었다.
관람용, 보관용, 비상용, 3개가 기본이다. 마음 같아선 30개는 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벙커에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내일 또 돈 쓸데도 있고.
해줄 수 있는 게 고작 블루레이 3개뿐이라 마음이 너무 아팠다. 에라블은 코를 훌쩍이며 먹은 쓰레기를 미로의 입속에 던져 넣었다.
“미로야-.”
거실 바닥에 주둥이만 내민 희뿌연 고래가 넙죽 쓰레기를 받아먹어 치웠다.
환경 단체에 고소를 당해도 할 말 없는 작태였으나, 여긴 지구가 아니다. 쟨 진짜 고래가 아니었고, 그리고 이건 증거인멸이었다.
완벽한 증거 인멸.
적합자와 실컷 관계한 뒤라 정령 한 마리쯤은 가뿐했다. 연신 미로의 입속에 쓰레기를 집어 던지며 에라블은 희희낙락했다.
그녀에겐 다 계획이 있었다.
먹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이따 치우자고 생각하면 늦다. 바로바로 치워버리는 것이다. 그럼 절대 걸릴 수가 없지!
그러다 데제가 오는 발소리가 딱 들리자마자 바로 33번을 트는 거다.
33번, 세계의 신비를 다루는 다차원 우주 평행이론의 발바 아라칸 후작이 300년째 제작을 맡은 교육 방송이다.
더럽게 재미가 없어 학부생을 제외하곤 300년째 그 방송을 아는 사람이 없다. 있다면 걸러야 한다. 변태니까.
트는 순간 바로 5분 내로 기절할 수 있었다. 교육보단 수면에 효과적인 방송이었다. 그러니까 완벽하다. 안 걸려, 절대 안 걸려.
물론 나는 내 취미에 당당하지만, 일부 머글의 시선은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남의 취미생활을 좋지 않게 보는 것이다. 게다가 여긴 또 그런 남의 집이니까. 집주인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일종의 예의였다, 예의.
“크흐, 이게 행복이지!”
인생 뭐 없다.
에라블은 데제의 대형 TV로 최애를 보며 태평하게 깔깔거렸다.
* * *
데제는 물끄러미 패드 스크린을 보다가, 진정제 성분이 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제임스 안 나오는 거 본다더니. 아, 나랑 같이 있을 때만 안 본다는 거였어? 그럴 수 있지. 그는 담배 필터를 짓씹으며 인상을 썼다.
[내가 더 사랑해!]
[울지 마, 애기야…. 누나가 블루레이 3개 사줄게!!]
에라블은 주접을 떨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TV와 대화를 시작한 여자의 모습에 데제는 어이가 없어졌다. 아주, 영상통화네? 그는 꽁초를 끄고 새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는 사이 검은색 세단은 시 외곽으로 빠졌다.
“…….”
인상을 쓰고 스크린을 쳐다보던 데제는 오늘 아침, 늘 그렇듯 제 척추에 주사제를 꽂아 넣던 여자를 떠올렸다. 하여간 오래는 못 살 거야.
제 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굴리는 여자였다. 조금만 불편해도 약부터 찾는다. 길게 끄는 것보다 짧게 끝내는 게 낫다는 말은 온갖 곳에 다 통용되었다.
그는 대충 패드를 던져두고 멈춘 차에서 내렸다.
한적한 곳에 자리한 레스토랑 앞이었다. 수 대의 비슷한 차량이 연이어 멈춰 섰다. 물고 있던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켄 모스로 예약돼 있을 겁니다.”
데제는 직원을 향해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순식간에 로비를 점거한 동일 모델의 트렌스폼, 검은 정장 차림의 덩치 큰 남자들에 굳었던 직원은 데제의 부드러운 표정과 말투에 살짝 누그러졌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스토랑은 한자리를 제외하고 텅 비어 있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상단주. 앉으시죠.”
예약된 자리에 미리 와 있던 칼로르의 상단주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칼로르는 남자의 맞은편에 앉으며 짧게 호흡을 골랐다.
그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개 주인’을 직접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적당한 실무책임자나 만나게 될 거로 생각했는데. 고작 이런 일에 대체 어쩌다가….
“거래량을 늘리고 싶으시다고요.”
헬 하운드, 통칭 ‘개들’.
청부, 불법 개조 무기 및 시약 등의 약물 거래, 미허가 에너지 팩 유통, 필요하다면 대규모 무력 작전에 이르기까지.
돈 되는 거면 뭐든 하는 이 악명높은 집단은 실패해 본 적이 없는 섬뜩한 의뢰 성공률과 팔고 있는 불법적인 제품들의 카탈로그를 제외하곤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칼로르 상단은 이들을 통해 연방과 거래를 하고 있었다.
돈만 제때 지불하면 문제 될 게 없는 신뢰도 높은 집단이긴 했지만, 간담이 작은 칼로르 상단주는 이들이 두려웠다.
이들이 죽인 사람 숫자만으로 대형 콜로니 하나를 채우고도 남을 것이었다. 사람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는 자들이니, 절대로 직접 맞대면하고 싶은 자들은 아니었다.
“품목을 늘리는 것도 괜찮을 듯한데. 핸드건 쪽엔 관심 없으십니까? 최근 로드 4시리즈 시험 사격이 완료되었는데 가격만 적당히 맞춰주시면 선공급을…, 아, 고마워요.”
웨이트리스가 접시를 내려놓으며 눈가를 붉혔다. 새로 바른 듯한 립스틱이 눈에 띄었다. 가슴골이 살짝 보이도록 풀어둔 블라우스 단추도…. 칼로르 상단주는 침음을 삼켰다.
저 꼴을 보아하니 ‘개 주인’은 인식 장애를 쓰고도 최소 신체 6레벨은 넘는 자임이 틀림없었다.
인식 장애는 겉모습을 지정된 형태로 바꿔주는 트랜스폼에 비해 예의를 차리면서도, 동시에 신분을 감춰주었다. 그것도 한계는 있어서 저 지경이지만.
“손님―, 메인 메뉴가 딜레이될 것 같은데. 양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여자가 끝 음을 부러 길게 끌며 말했다.
“천천히 가져오세요.”
개 주인은 별 관심 없는 듯했는데, 웨이트리스는 대신은 아니지만, 식당에 있는 와인 중 제일 좋은 것이라며 잔을 들고 왔다.
남자의 정체를 아는 상단주는 여자의 뻔한 아양에 식은땀이 났다.
남자가 개 주인이란 사실을 미리 알고 정신 방벽을 높여두지 않았더라면 자신 역시…,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원하시면 선공급을 해드리지요. 연방에서 소화 가능한 선까지 충분할 겁니다. 로드 4시리즈 경우 살상력에서 기존 핸드건보다 우수 판정을 받았습니다.”
“저…, 저흰 시약을 취급하는 터라….”
“연방 쪽에선 관심을 보여서요. 물론 저희가 알아서 해도 되지만. 아무래도 상단주님의 오랜 거래처라 말입니다. 원하신다면 그쪽을 통해 저희 애들이 넘기는 거로 해드리겠습니다.”
지분을 떼주겠다는 소리였다.
“그, 그럴 리가요. 저희는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요.”
“그럼 시약 거래량은 늘리고, 이건은 저희 쪽에서 알아서 하죠.”
“예, 예, 물론입니다.”
“아, 혹시 상단주께서도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몇 정 정도는 선물로 드리죠. 요새 세상이 워낙 험하지 않습니까. 연방 국경이 RS와 겹치기도 하고.”
개 주인의 친절한 제안에 칼로르 상단주는 식은땀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