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하, 또 나만 쓰레기로 모네.”
“차…, 차라리 가볍게 한 대만 때려서 기절 시켜 주시면….”
그가 코웃음을 치며, 귓바퀴부터 턱선 아래까지 잘근잘근 깨물어댔다.
“에라블, 그렇게 날 너무 개새끼 취급하면 내가 상처받잖아요.”
도드라진 쇄골뼈도 잘근잘근 씹혔다.
“죄, 죄송….”
“같이 보냈던 SDP는 어땠어요? 저장 스펠이 확장된 버전이라고 들었는데.”
“1, 11개 째부턴 메모라이즈가 부, 불안정….”
아무래도 살려줄 생각은 없으신 듯했다.
질문이 계속되었다. 다른 것도 계속되었다….
진짜 죽을 것 같았다….
다행히 실날같은 이성이 끊어지기 직전, 꿈인지 생신지 대신 의식이 끊겼다.
에라블은 마침내 찾아온 블랙아웃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 * *
‘아, 아아, 내 허리.”
죽을 것 같다.
‘아니, 이미 사후세계 아니야?’
에라블은 자신의 생명 활동을 의심하며 침대 옆자리에 잠들어 있는 데제를 밉게 쳐다보았다. 오래는 아니었다. 왜냐면 무서우니까.
조용히 잠들어 있는 그의 미모는 오늘도 어김없이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흐트러져 있는 검은 머리칼, 새하얀 석고에 유약을 입혀 놓은 듯한 피부, 감겨있는 섬세한 속눈썹. 붉은 기가 감도는 눈꼬리와 입술. 목선. 쇄골 아래 기계처럼 근육이 맞물려있는 남자의 몸은 빈틈없이 아름다웠다.
‘이런 망할.’
뭔가가 아래로 질질 흐르는 듯한 느낌에 에라블은 섬뜩해졌다.
진짜 싫다…, 미모의 남자를 보며 혼자 바들대는 심정은 정말이지…, 변태 같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불공평했다. 이런 건 남자든 여자든 밑에 깔리는 사람에게 완전히 편파적으로 작용 된다.
그나마 오랜만에 시그눔 채널이 깨끗해 그건 좋았다.
비록 허리는 깨질 것 같고, 꼬리뼈는 이미 깨진 것 같고, 몸은 후들거리는 데다가 여전히 변태가 된 듯한 기분이었지만.
섬뜩한 노이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손발 끝부터 점차 굳어가는 듯한 그 느낌은, 전신마취 상태에서 의식만 깨어있는 것과 상당히 비슷했다.
에라블은 흐느적대며 앞으로 기어갔다. 뭣보다 이건 좀 더 쉬운 방법이 있지.
“…흐….”
약, 내 약. 그녀는 약을 찾아 비척비척 침실을 빠져나왔다.
복도에 던져둔 백팩에서 주사제를 찾아 척추에 찌르고, 차가운 벽에 기대 잠시 숨을 골랐다.
“…아.”
살겠다.
에라블은 욱신대는 척추 부근을 손으로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실 그가 꽤 봐주고 있긴 했다.
어쨌든 움직일 수는 있으니까. 원작에서 황자는 평균 사흘쯤 거동을 못 했다. 9레벨짜리 신체를 가지고서도 그랬다.
뭐, 내장을 다 찢어 놓으니 당연히 그랬겠지만. 목숨 바쳐 발딱개가 된 보람이 있긴 하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서 최고의 발딱개가 되어야지!
내장은 그래도 목숨만은 안전한 황자완 달리, 그녀는 내장도 목숨도 안전 보장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세계 13년 차. 여전히 모든 것이 생존의 문제였다.
차가운 복도 벽에 이마를 대고 숨을 고른 에라블은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뒤처리하고 몸을 씻은 뒤에 그녀는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최고가 되려면 컨디션 유지가 필수다.
컨디션엔 역시 초콜릿과 설탕을 왕창 때려부운 시리얼이 최고였다. 스트레스는 건강에 치명적이니까.
에라블은 큼지막한 볼에 어제 사 온 초코 시리얼을 붓고 우유를 꺼내 따랐다. 대리석 아일랜드 테이블에 부딪히는 따뜻한 햇살이 눈부시다.
분쟁지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조용한 아침이었다. 살짝 괴리감이 들었다.
포탑 소리도 없고, 괴수들이 서로 씹어대는 소리도, 망자 군체가 우는 소리도 없는, 따뜻하고 환하고 조용한 아침이라니.
석 달에 한 번뿐이지만 매번 기분이 이상했다.
에라블은 시리얼을 퍼먹으며 햇빛을 좀 따라다니다가 패드 스크린을 켰다.
몇 건의 사적인 메일과 업무용 메일이 와 있었다. 그녀는 확인한 메시지들을 차례로 지우고, 답변해야 할 메일을 분류한 다음, 급한 것 순으로 정리를 했다.
‘운송기한 오버…, 또 121이네.’
그녀는 다시 한 숟갈 시리얼을 퍼 입속에 밀어 넣다가 작게 인상을 썼다. 뭐지? 목이 좀 따끔했다. 뭐에 긁혔나.
“시리얼 먹게요?”
패드의 카메라 기능으로 목덜미를 확인해 보려던 차에, 데제가 광택이 나는 얇은 실크 로브 한 장만 걸친 채로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예, 한 그릇 드시겠습니까.”
“그래요.”
에라블은 패드를 내려놓고 선반에서 새 그릇을 꺼내 시리얼을 부었다. 그가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며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의 성욕이 공복과 관련돼 있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신경이 연결되어 있어서 배고프면 성욕을 느낀다던데?”
그럼 안되지, 에라블은 데제의 그릇에 시리얼을 산더미만큼 부었다.
“근데 난 배가 부르면 성욕을 느끼는 것 같아요. 배고프면 식사를 해야지.”
그건 그렇지, 에라블은 데제의 시리얼을 다시 제 그릇으로 옮겨 담았다. 별거 아닌 모습에 그가 몸을 잘게 떨며 웃었다.
‘그래…, 뭐, 즐거우시면 됐다.’
아침부터 놀릴 거릴 찾으시는 걸 보니 다행히 기분은 좀 풀리셨나 보다. 어젯밤엔 역시 뭔가 꼬여 계셨다. 우주의 평화를 위해 이 한 몸 희생한 기분이 아주 별로였다.
“언제 일어났어요?”
“조금 전에 일어났습니다.”
데제가 다정하게 그녀를 끌어당겨 제 무릎에 앉혔다. 그의 체구 때문에 다리가 허공에 붕 떴다.
여린 에라블의 목덜미에 그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살짝 따끔하던 목덜미에 그의 입술이 닿아 뭉근한 열감으로 번졌다.
데제는 이런 종류의 스킨십을 아주 좋아했다. 굳이 침대에 있지 않을 때도 그는 퍽 다정한 애인처럼 굴었다.
바로 이게 그가 가진 제일 고약한 면 중 하나였다. 닿은 입술이 목덜미를 부드럽게 누르다가 살갗을 빨아들인다.
그는 적합자다.
에라블은 깊게 빨려 저릿저릿한 목덜미에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게 봐도 안 돼요. 밥은 먹고 해야지.”
“예….”
열이 올라 훔쳐보는 시선에 그가 빙글거렸다.
그조차도 섬뜩하게 아름다웠다.
생각해보면 아직 세수도 안 하셨을 텐데, 이 미모는 진짜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일이람.
매끈한 콧대 위로 흐트러지는 새카만 머리칼을 보며 에라블은 생각했다.
석 달 열흘간 머리를 안 감아도 모두가 남신이라고 찬양할 것만 같다. 대머리가 돼도 찬양받지 않을까.
“너 이상한 생각하지?”
에라블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시리얼을 퍼먹었다. 데제는 코웃음을 치곤, 식탁 위에 놓여있던 그의 패드 스크린을 켰다. 좀 전의 에라블이 그랬듯 그는 단순 업무 몇 가지를 처리했다.
그는 의외로 바쁜 남자였다.
그냥 맡은 일이 많아서 바쁜 자신과 달리, 데제는 일을 재밌어했다. 아니었으면 세상이 조금은 더 평화로웠을 테지만…, 사실 이건 좀 딜레마였다.
패드 스크린을 내려보던 그가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짧은 대화가 오갔다.
“됐어. 미룰 필요 없어.”
바깥일이 생겼다는 전화였다.
“20분 내로 준비해 놔, 지금 나갈 테니까.”
3개월 만에 만났다고 그가 온종일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진 않았다. 그는 바쁜 남자였고 석 달에 한 번 있는 이 기간에도 꽤 빈번하게 집을 비웠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쉬고 있어요.”
그래서 딜레마라는 것이었다. 그가 하는 일 중 좋은 게 없다는 걸 잘 아는데, 그가 바쁠수록 혼자 있는 시간은 또 많아지니까.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반기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올바름과 편리함은 언제나 반비례인 모양이었다. 이 환경오염 같은 남자.
“너 또 이상한 생각.”
가늘게 눈을 뜨는 그를 보며, 에라블은 공손하게 고개를 떨어트렸다.
코웃음을 친 데제는 돌아서서 외출 준비를 했다. 그러는 동안 에라블은 시리얼을 마저 먹어 치우고, 아까 못다 한 일을 마저 했다.
패드 카메라를 켜고 목덜미를 확인해봤다. 벌겋게 울혈이 진 키스 자국만 확인해 볼 수 있었다. 분명히 손톱 같은 것에 긁힌 것처럼 따끔했는데.
‘…….’
떨떠름하게 패드를 내리고 먹은 그릇이나 치우는 사이, 데제는 가벼운 차림새로 드레스룸에서 나왔다.
연회색 슬렉스에 흰 드레스 셔츠, 금속제 시계. 사람 잡으러 가는 건 아니신 모양이었다. 컬러가 밝다. 물론 희망 사항이었다.
“한 반나절쯤 걸릴 겁니다.”
에라블은 그가 나가는 것을 배웅했다.
현관문이 닫히고 몇 분쯤 더,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외출하는 주인 뒤에 남은 충성스러운 강아지처럼 현관 어귀에 서 있었다.
그렇게 한참 있다가…, 에라블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싸,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