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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35화 (35/132)

35.

그의 얼굴 위론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좀 전까지 웃고 떠들던 게 다 거짓인 것처럼.

그는 어둑한 눈으로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어 여린 목을 쥐어 보았다.

손아귀 아래로 가는 맥이 뛴다. 이대로 누르면, 쉽게….

여자는 아주 무력했다.

손톱을 세워 가는 맥을 긁었다. 무른 살갗에 핏방울이 맺힌다. 날카로운 손톱을 따라 맺힌 핏방울이 톡톡 떨어졌다.

“…….”

그는 손아귀에 힘을 풀고 느릿느릿 둥근 턱선을 쓸었다.

그러다 아예 손을 떼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어둑한 시선은 내내 여자를 향한 채였다.

‘…잠은 잘 잤다더니.’

과로에 시달려 지친 에라블의 얼굴을 쳐다보며 데제는 작게 실소했다.

한결같이 성실한 사람이야, 뭐 변하는 게 있어야지. 한숨을 내쉬며 그는 문득 1년 반 전을 떠올렸다.

* * *

“여기서….”

에라블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채 정자세로 거실 인근에 서 있었다.

값비싼 카펫을 밟기라도 할까 봐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고작 서브 하우스에 데려왔다고 투정이라도 부릴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별로 없긴 했지만.

그래도 백작가 딸인데, 아무리 양딸이라도 애를 어떻게 키운 건지. 슬쩍 물러서는 게 눈으로 가격표라도 매기고 있는 모양새였다.

혹시 냉대받고 사는 거 아니야 라고 오해하기엔 백작가와 사이가 지나치게 좋다.

“아쉬워도 좀 참아줘요. 어차피 석 달에 며칠만 사용할 거잖아?”

“예.”

에라블은 외계어라도 들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와중에 데제는 자기 말에 자기가 기분이 비틀리는 웃긴 체험을 하고 있었다. 그게 너무 웃겨서 실소가 나왔다.

“편히 앉아요. 어차피 소위와 쓰려고 산 집이니까.”

데제는 고개를 떨어트리며 눈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에라블은 그가 가리킨 딱 그 지점에 앉으며 정자세로 얼어붙었다.

“침대로 갈까요?”

그는 지나치게 긴장한 에라블이 못마땅해 물었다.

에라블은 또 당황한 얼굴을 했다. 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건 물론이고, 할 가능성에 대해서조차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왜지? 그래도 내가 적합자인데.

어쨌건 그 질문에 퍼뜩 정신을 차린 에라블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러려면 일단 씻어야 합니다. 제가 삼 일 동안 머리를 안 감, 못 감았습니다.”

“…그래요.”

할 말이 없다. 구겨진 군복, 엉클어진 머리, 오는 3박 4일간 침대에 구겨져 딱 잠만 잔 모양새였다.

머리는 무슨 세수는 한 건지 의심스럽다. 직접 말로 들으니 더 의심스러워졌다.

‘난 대체 얘랑 왜 하고 싶은 거지?’

데제는 자신의 취향이 정말로 의심스러웠다. 그런 와중에도 당기는 게 정말 웃길 뿐이다.

“욕실 이쪽.”

일단 뭐, 하고 나서 생각하자. 사실 바로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에라블이 기절이라도 하겠지.

‘기절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진짜 내가 기절하는 것도 아니고.’

긴장한 에라블을 보니 다시 다 처음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못해도 수십 번은 해댔는데, 그 모든 게 다 없던 일인 양.

“좀 궁금한데, 사 일이나 안 감으면 머리 안 가려워요?”

“제가 두피가 아주 튼튼한 편입니다.”

“그거 전에도 한 번 들었던 소리 같은데.”

“…예, 한 번 했었습니다.”

에라블은 덤덤하게 대답했지만, 귀 끝이 붉었다. 이게 창피하면 왜 이 꼴로 수도를 활보하는 건지. 황당해하며 데제는 직접 욕실 문을 열어주었다.

“씻고 나와요.”

“예, 그, 그럼.”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백팩을 꼭 쥐고 안으로 들어가선 살그머니 문을 닫았다.

그러곤 안에서 8자로 미친 듯이 뱅뱅 돌기 시작했다.

머리라도 쥐어뜯으며 의미 없이 욕실을 배회하고 있겠지. 안 봐도 뻔했다. 데제는 문에 기대서며 이죽거렸다.

생각해보니 처음 에라블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도 이랬다.

고레벨 AT 계열들의 인지 반경을 빤히 알면서도 여자는 가끔 눈에만 안 보이면 일단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까 가끔 이렇게 당황할 때.

아, 그러니까 정말 나랑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단 거지?

진짜 왜 없지? 자기도 좋아하면서.

그리고 난 또 왜 이렇게 하고 싶은 거고. 이건 진짜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고,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게 뭐라고. 노이즈가 문제면 아무나 하나 골라잡으면 그만이다. 수도에는 적합자도 셋이나 있는 데다가, 그것도 안 내키면 지원계열 중 아무나 하나 호출하면 그만이다. 난 대체 왜.

“저, 면도기를 좀 써도 되겠습니까.”

안에서 에라블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데제는 더 빨갛게 달아올랐을 에라블의 귀 끝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숨이 달다. 그는 혀끝으로 필터를 핥았다.

“소위,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감, 감사합니다.”

이내 들려오는 진동음, 당황했는지 우당탕 뭘 떨어트리는 소리가 이어 들렸다.

데제는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당장 바지를 내리고 싶은 게 제일 웃겼다.

잠시 문짝에 기대어 가만히 서 있던 그는 그냥 몸을 일으켰다.

하고 싶으면 하면 그만이지. 어차피 싫다고도 안 할 텐데. 싫긴, 광장에서 옷을 벗겨도 이를 악물고 참아낼 거다.

삐딱한 생각을 하며, 그는 욕실 문을 열어버렸다.

그리고 면도기를 든 채 얼어붙은 상처투성이인 여자의 몸과 마주했다.

“…….”

팔, 다리, 상체. 자잘하게 튄 파편과 꽤 크기가 있는 몇 개의 흔적들.

다 아물어 벌써 하얗게 된 것과 아직 아문지 얼마 안 돼 벌겋게 남아 있는 것까지.

에라블의 몸은 온통 엉망이었다.

분쟁지역에서 지내고 있으니 당연했다. 아니, 고작 저 정도 상처만 얻은 채 살아 돌아온 게 대단했다.

심지어 새롭지도 않았다. 인식표 맞을 때도 손톱이 부러지거나 치아가 상하는 게 예사였고, 미끼로 썼을 땐 허벅지가 크게 찢어지기도 했었으니까.

“…어.”

에라블은 입에 칫솔을 물고 다리털을 밀고 있다가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선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체 한 번에 몇 가지를 하는 건지, 그는 실소하며 욕조에 걸터앉았다.

“할 거 해요.”

“…예에.”

에라블은 그에게 자리를 내주고 넋이 나간 얼굴로 다리털을 마저 밀기 시작했다.

위잉 위잉―.

면도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체모 별로 없잖아요. 왜 밀어요, 매번 그거.”

“미, 민망해서…, 밀고, 밀고 있습니다.”

죽을 것 같다는 얼굴로 에라블이 대답했다.

“계속 밀어요.”

“예….”

데제는 욕조에 앉아 조용히 담배를 태웠다. 에라블은 그에게 물이라도 한 방울 튈까 봐 거의 욕실 벽에 붙어서서 씻고 있었다.

꽤 넓은 욕실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지금 내가 꽤나 병X 짓을 하고 앉아있는데, 왜 그러냐고 묻지도 않았고.

“먼저 나가 있어요. 침실, 왼쪽 두 번째 방. 안에 들어가 있고. 추울 텐데.”

그는 손을 뻗어 욕실 가운을 던져 주며 말했다.

“예…, 아, 알겠습니다.”

에라블은 살짝 넋을 놓은 얼굴로 가운을 꿰입고, 그 와중에 또 야무지게 변기 위에 벌려 놓은 백팩을 챙겨 들고는 욕실에서 나갔다.

문이 달칵, 닫히고 데제는 습기에 젖어 이마에 붙은 머리칼을 손끝으로 밀었다. 짜증 내면 안 되지. 수도 한복판에서. 낼 이유도 없고.

그는 세면대를 발로 걷어차며 생각했다.

“…아.”

그렇게 짜증 내면 안 된다니까.

쾅-, 굉음과 함께 터진 수도관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머리부터 와이셔츠까지 싹 젖어갔다.

데제는 꺼진 담배를 떨떠름하게 보며, 다시 다리를 뻗어 벽에 붙은 수도관의 남은 부분을 발로 꾹 내리눌렀다.

찢어졌던 부분이 맞물리며 터져 나오던 물도 차츰 멎는다.

아예 수도관을 반쯤 벽에 밀어 넣어놓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젖은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게 대체 무슨 병X 짓인지.

그는 젖은 와이셔츠를 벗어 던지고 머리를 털어대며 침실로 향했다.

“…에라블.”

침실로 들어선 데제는 우뚝 멈춰서서,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누워있는 에라블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정말 여러모로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여자였다. 에라블은 옷까지 다 벗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베개까지 엉덩이 밑에 받쳐놓고. 벌벌 떠는 주제에.

흰 시트 위에서 그러고 있는 게 흡사 제단에 올려진 제물 같기도 하고. 이제 배를 가르면 되나? 데제는 헛웃음을 흘렸다.

“뭐합니까?”

“예, 예?”

시트를 꽉 움켜쥔 에라블이 덜덜 떨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하냐니까?”

“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

그는 천장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떨궈보니 에라블은 더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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