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에라블은 차분하게 셔틀장으로 이동하며 시간 계산을 했다.
‘17시 24분. 이동하는 데 40분쯤 걸리니까, 도착하면 18시 좀 넘겠네. 저녁을 먹고 데제의 서브 하우스로 이동하면 대충….’
데제의 서브 하우스….
‘…….’
1년 반 전 첫 외근을 나왔을 때만 해도 에라블에겐 몇 가지 고민이 있었다.
노이즈에 대한 고민도 그중 하나였다. 이제라도 적합자 검사를 받아볼까, 아니면 그냥 클리닉에라도 다녀볼까.
한번 적합자와 관계를 경험한 몸이 안정제에 심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고, 데제와의 관계 유지는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에라블은 2155 행성계로 전출 간 이후, 데제와의 관계는 당연히 거기서 일단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수도에는 황자를 포함해 그의 적합자가 이미 셋이나 있다. 다들 자신과는 다르게 늘씬하고, 화려한 미인들에, 대부분 남성체의.
아무튼 다시 상기하자면 이 소설의 원작은 BL이고, 데제는 남성체를 더 선호했다. 그쪽이 더 튼튼하니까.
어쩐지 사람보단 장난감을 고르는 기준 같지만, 데제에게 양심 같은 걸 바라면 곤란하다. 그런 게 있었으면 애초에 이 소설이 피폐물이 아니었겠지.
어쨌든 적합자가 나 하나던 사단 본부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고, 난 애초에 그의 취향도 아니고, 뭐, 그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그와의 관계는 끝난 것이라 여겼다.
스페어의 스페어쯤으로나 관리받겠지 생각했었다.
그 때문에 1년 반 전 데제가 다시 관계를 요구했을 때, 그녀는 다소 혼란을 느꼈었다.
나랑 왜…?
불량식품은 불량식품대로 맛이 나는 건가. 데제를 상대로 심층 인터뷰를 해볼 수도 없고, 사실 이유 따윈 별 상관없기도 했고.
늘 그렇듯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그가 그러겠다고 했으면 그걸로 끝인 거였다.
“2017 섹터, 19번가.”
셔틀에 올라타 주소를 말하자, 최신형 금속제 교통수단이 빠르게 수도 위를 갈랐다.
편안한 승차감. 평화롭고 안전한 기분. 청명한 하늘 위로 스모그는커녕 먹구름 한 조각도 찾을 수 없다.
정말이지 분쟁지역과는 완전히 딴 세상이다. 이것도 내전 터지면 어차피 다 잿더미가 될 테지만.
‘역시 벙커를 보완해야 해, 벙커를. 그러려면 돈이….’
어디 돈 나올 구석이 없나 이리저리 궁리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음이 들려왔다.
[20cp, 요금은 20cp입니다.]
날강도였다.
‘그거 잠깐 왔다고, 무슨 20이야?’
수도 물가는 미쳤다. 역시 여긴 사람 살 곳이 못 돼. 에라블은 투덜거리며 돈을 지불하고 셔틀에서 내려섰다.
현재 데제가 머물고 있는 사무실은 제2017 위성 외곽에 있었다.
수도는 같은 행성계에 속해 있는 21개의 행성과 3,177개의 위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접근 코드가 기밀인 중심 행성과 그 외 자연 행성, 그리고 100 넘버 이하인 위성을 제외한 3천여 개의 위성에 수도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자연 행성과 100 넘버 이하의 위성에 접근이 가능한 것은 관계자들과 노블들뿐으로, 그들은 그곳의 거주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브가니스는 제국의 단 아홉뿐인 공후작 가문으로 자연계 행성의 권리를 가졌다. 아니, 사단의 주 함선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위성보단 규모가 컸다.
그는 이 성단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자산가이다.
그런 남자가 대체 이 2,000번대 위성의 허름한 상가 건물에서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
에라블은 빈 고층 건물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심지어 1층 로비에는 마치 인테리어 공사 중인 것처럼 자재까지 흩어져 있었다. 진짜 뭣들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짧은 건널목을 건넜다.
커피 심부름 때문이었다.
커피숍은 건널목 바로 반대편에 있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5분도 안 걸리겠구만 이걸 가기 귀찮다고 3박 4일 오는 사람한테 커피 심부름을 시키다니.
양손에 몇 개나 되는 커피를 잔뜩 사 들고, 건물로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거 좀 걸었다고 옆구리가 살짝 당긴다. 그녀는 작게 인상을 쓰며 굳은 피부 조직을 문질렀다.
“야!!”
아, 깜짝이야.
멈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에라블은 감시팀장의 격한 환영 인사를 받았다.
“너, 왜 이제 와! 지금이 대체 몇 시야!”
“지금 17시….”
“내가 지금 시간 물어?!”
네…, 진짜 갱년기인가 싶었지만. 에라블은 자동응답기처럼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리에스 시더는 자기가 주문한 모카 프라페를 채가면서 계속 화를 냈다.
“빨리빨리 다녀, 빨리빨리!!”
이 와중에 비르고까지 매달려 징징거렸다.
“에라브을, 보고 싶었어엉. 왜 이제 와? 으응?”
매달리는 비르고의 무게 때문에 허리 다친 곳이 본격적으로 결리기 시작했다. 이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살인마 놈들.
“목욕했어? 어? 냄새 되게 좋다? 왜, 데제랑 하고 싶어서?”
비르고는 혼자 킬킬거렸다. 여전히 정신 상태가 안 좋은 듯했다.
“그러지 말고 나랑도….”
악-, 주절대던 비르고가 아리에스 손에 머리채가 잡혔다.
“자기 요새 너무 거칠어. 내가 그렇게 좋아? 난 자기 좀 별론데.”
“아오, 이 씨X. 야! 넌 뭐하고 서 있어?”
구경하고 서 있다.
“빨리 안 들어가?!”
“예,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입 닥치고, 꺼져! 빨리!”
또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갱년기를 처맞은 아리에스가 더 폭발하기 전에 에라블은 데제의 사무실로 재빨리 꺼졌다.
* * *
“왔어요?”
지랄하던 감시팀장 덕에 바짝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데제는 세상 다정하게 에라블을 맞아주었다.
“오는데 고생이었죠?”
“아닙니다. 편하게 왔습니다.”
그가 손짓으로 그녀를 불렀다. 다가갔더니 얼굴을 감싸 쥐곤 살펴보신다.
자리에 앉아있어 소름 끼치게도, 그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얼굴에 벌겋게 열이 올랐다.
동시에 심박수도 미친 듯 올라갔다. 하지만 뭐, 괜찮다. 정상 반응이다. 거의 3달 만에 이 얼굴과 맞대면 했으니까.
데제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석고 같은 피부에 붉은빛이 감도는 눈가, 그 위로 떨어지는 섬세한 검은 머리칼이 그를 사람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보이게 했다.
선악과를 건네주면 그 손까지 아주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핥게 할 듯한 모습에, 에라블은 숨을 죽였다.
개들의 짖는 소리마저 머릿속에서 몽롱하게 멀어져 갔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아니면 이승도 그렇게 멀어져가는 수가 있었다.
“잠은 제대로 잤어요?”
“예, 잘 잤습니다.”
잠이야…, 뭐. 푹 잤다. 오는 길에 거의 70시간은 깨지도 않고 숙면을 했더니 나중에는 항해사가 죽은 줄 알고 깨우러 왔었지.
그 덕분에 이번에는 점심밥을 챙겨 먹을 수 있었다. 탑승비에 다 포함된 건데 또 안 먹고 내렸으면 진짜 아까울 뻔했지.
데제는 금세 딴생각에 빠진 에라블의 얼굴을 손으로 꾹 눌렀다.
“읍….”
“…….”
그는 잠시 상당히 웃긴다는 듯이 볼이 짓눌린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기울여 왔다.
벌어진 입술 안쪽이 핥아지며, 그가 긴 손가락으로 뒷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 으. 에라블의 머릿속이 다시금 몽롱하게 멀어져갔다.
소름이 허리 아래부터 위로 오싹대며 타고 올라왔다. 어질어질하게 눈이 풀렸다.
근 3개월 만의 적합자의 체온에 온 신경이 다 들끓었다.
어지러워 비틀거리자, 그가 코를 툭 두드려주었다. 밀렸던 숨을 크게 들이쉬니, 서늘한 그의 체향이 한껏 밀려들었다. 사태가 더 악화했다.
그가 웃으며 힘 빠진 에라블을 제 무릎에 앉히고, 한참을 더 입술을 눌러왔다.
“아직 식전이죠?”
그러다가 그는 또 갑자기 입술을 떼어냈다.
“저녁은 뭐로 할까요?”
하던 거나 계속했으면 좋겠다….
에라블은 다시 무릎에서 일으켜지며 우울하게 재킷을 챙기는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가 돌아와 다시 쪽, 입을 맞춰주었다. 닿았는지 안 닿았는지 당사자도 헷갈릴 정도로 가볍다. 이거나 먹고 떨어지란 뜻인가 싶었다. 그럼 떨어져야지.
“전 치킨이 좋을 것 같습니다. XX치킨에서 신메뉴가 나왔는데 별이 다섯 개입니다.”
“그래요.”
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샐러드 먹죠, 건강하게.”
“치킨도 건강합니다. 그 단백질.”
“닭가슴살 먹어요. 샐러드 안에 들어 있잖아?”
닭가슴살은 치킨이 아니다. 치킨엔 가슴이 없다. 걔는 다리와 날개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아무래도 모르시는 것 같아 말씀을 드릴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그는 잠시 거울 앞에서 미모를 점검했다.
안 봐도 아름다우신데, 점검까지 하시니 더욱 아름다우시다. 에라블은 보다가 침이라도 흘릴까 봐 걱정돼서 입을 다물었다.
“나가죠.”
데제가 어쩐지 눈을 흐리고 웃으며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