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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주인이 필요하다-32화 (32/132)

32.

에라블은 한숨을 삼키며 온풍기 근처에 백팩을 던져 놓곤 웅크리고 누웠다.

“…….”

그리곤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행성 중력장을 넘은 셔틀 창으로 사성계 4개의 태양이 하얗게 떠올라 있다. 이계라는 이질감은 항상 낯설고 두려웠다.

에라블은 온풍기에 아예 벗은 발을 갖다 붙이며 바지춤을 뒤져 메모지를 꺼냈다.

- …112번가.

가지런히 번호가 적혀있는 메모지가 꼬깃꼬깃했다.

“…….”

정말 이런 짓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인생이 어디 하고 싶은 대로만 되던가. 그게 됐으면 난 진작에 집으로 돌아가 검정고시를 치고 늦은 취업 준비나 하고 있었을 거다.

에라블은 쪽지를 도로 접어 바지춤에 밀어 넣은 뒤, 적당히 2시간 뒤로 손목시계 알람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대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 * *

“뭐?”

아리에스 시더는 전화기를 붙들고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에라블 버밀리언이 80콜로니로 전출 요청을 냈을 때만 해도 아무도 그게 거기서 두어 달 이상을 버티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죽든 손 털고 돌아오든 길어야 두어 달이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건 두어 달이 아니라 벌써 1년 반째 분쟁지역에서 멀쩡히 버티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어? 너 지금 일부러 멕이냐?”

옆에서 쨍알쨍알대는 남자 목소리까지 들린다. 이게 진짜 미쳤나.

“없어! 빨리 튀어오기나 해!”

아리에스는 벌컥 소리를 내지르며 신경질적으로 끊었다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야. 올 때 커피 사 와, 모카 프라페. 시럽 왕창 넣어서.”

그리곤 전화기를 소파 위에 집어 던졌다. 소파에 늘어져 누워있던 비르고가 발을 까닥거렸다.

“난 당최, 모르겠네.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아리에스는 이죽거리는 비르고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웃통을 또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반라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대로 배를 싹 갈라 내주고 싶어졌다.

“아니-이. 그렇잖아. 매번 왜 그러는 거냐고. 데제가 진짜 걜 신경이나 쓸 것 같아?”

“예.”

“우와, 너 진짜 진심이야?”

“예, 존X 진심인데요. 씨X. 그러는 넌 여기 왜 내려와 계세요?”

인테리어도 하다만 이 저층 로비는 개들의 대피소로 주로 사용되고 있었다.

주차장을 제외하면 이 건물에서 여기가 데제의 집무실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 그러니까 이게 다 걔 때문이라고?”

“…….”

당연히 아리에스는 다 에라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걔 옆구리가 10cm나 찢어져 또 수술했다는 사실을 데제가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에. 하지만 일일이 말하기 귀찮다.

“씨발, 귀는 처닫고 왜 맨날 묻는지 모르겠네.”

말해봤자 듣지를 않으니까. 아리에스를 비롯한 감시팀은 소수 몇몇과 함께 이 모든 게 다 에라블 탓이라고 믿고 있었고, 다른 개들은 그들을 비웃으며 정신병자 취급하고 있었다.

비르고는 그 대표주자 중 하나였다.

“야, 솔직히 데제가 걔한테 진짜 관심이 있었으면 걜 1년 넘게 그딴 데 처박아 놨겠냐?”

“하….”

“걔가 여태 살아있는 건 순전히 본인의 노력이었다고. 걔가 조금만 무능력했어 봐. 걘 벌써 뒈졌을걸? 너 이거 걔 무시하는 거다?”

“진짜 씨X, 백날 똑같은 소릴 왜 자꾸 처하는지 모르겠네.”

“귀는 지도 처닫고 있구만.”

둘 사이의 의견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골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단 한 가지, 데제의 기분이 가끔 심하게 나빠진다는 사실에만 의견을 같이할 뿐이다.

그럴 때는 둘 다 사이좋게 주인의 근처에서 튀곤 했다.

“소위 언제 온답니까?”

비르고를 노려보던 아리에스는 휴게실로 들어오며 묻는 올의 모습에 더 사납게 인상을 구겼다.

“…4일 뒤에요.”

비웃는 비르고도, 어느샌가 의견을 같이 하는 올도, 아리에스는 둘 다 싫었다.

“올, 얘 그냥 다시 불러들이면 안 됩니까?”

“안 됩니다. 플랫폼 완성 단계라서.”

“씨X 그놈의 플랫폼…, 그럼 차라리 제가 갈게요. 걔 대신 제가 가면 되잖아요.”

“수송형 면허가 있어요?”

“없죠, 씨X! 근데 진짜 죽겠다고요! 이제 슬슬 제국 요원들까지 움직이고 있잖습니까. 제발 그냥 좀 불러들이자고요.”

“소위가 알아서 잘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걱정을 어떻게 안 해요? 걔가 생긴 건 안 그래 보여도 가끔 급발진할 때가 있다고요.”

둘의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야야.”

소파에 누워 토독토독, 에라블에게 간식 메뉴를 문자로 넣고 있던 비르고가 불쑥 대화를 자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고 내기나 하자. 내가 얘 정리할 테니까 데제가 어떻게 나오시는지 한번 보자고.”

“…정리?”

아리에스가 조용히 되물었다.

“어떻게?”

“뭘 어떻게야? 뻔하지.”

“…….”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잠시 침묵했다.

“시끄러우니까 나가서 싸우세요.”

올이 선수를 쳤지만, 아리에스는 이미 총신으로 비르고의 머리를 내리찍고 있었다.

“나가서….”

비르고는 킬킬대며 나이프로 아리에스의 목을 그어버렸다.

“나가서 싸우라고!!”

올이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추임새에 불과했다. 하여튼 저 부산스러운 것들, 쯧.

“악, 피 튀기잖아요! 내 와이셔츠!”

“미친! 바지 어제 산 건데.”

“잠 좀 잡시다!”

둘 싸움에 근처에 있던 개들까지 와락 신경질을 냈다. 저것들까지 합류하면 로비에서 또 대판 개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예민해진 개들은 건수만 생기면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이렇게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그들과는 달리, 에라블 버밀리언은 4일 뒤 혼자 태평한 얼굴로 나타날 것이다. 처음 그랬듯이.

그러니까 처음.

1년 반년 전 여자가 수도로 첫 외근을 나왔을 때처럼.

* * *

1년 반년 전.

“…멀쩡해 보이십니다?”

분쟁지역에서 처음 수도로 올라온 에라블 버밀리언은 올의 평가에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갑자기 웬 관심이냐는 표정이 번개처럼 짧게 스쳐 지나가고,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특유의 순하게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예, 무탈합니다.”

말 그대로였다. 에라블 버밀리언은 사지 멀쩡해 보였다.

흐트러진 머리칼에 눈 밑엔 다크써클, 안색이 약간 피곤해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데미지는 없어 보인다.

거의 저능아 수준의 신체 능력을 갖춘 여자는 분쟁지역에서 두어 달가량을 버티고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그것도 제 발로 고문이나 다름없는 인식표를 맞기 위해서. 그런 에라블을 책상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쳐다보며 데제가 물었다.

“꼴은 왜 그럽니까.”

그는 에라블이 도착하기로 한 시간쯤 전부터 별로 할 일도 없는 부관실에서 죽치고 있었다.

핑계는 맥주나 몇 캔 축내며 잡담을 떠는 것이었지만, 타이밍이 너무나 공교로워 올은 그냥 믿는 척만 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 말 그대로, 사지 멀쩡해 보이는 것과 별개로 에라블의 꼴은 좀 심각했다.

어딜 봐도 두어 달 만에 사귀는…, 아니, 사귄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뭐 어쨌건 ‘남자’를 만나러 온 모습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구겨진 군복, 엉클어진 머리, 세수는 한 건지 의심스러운 얼굴. 누가 봐도 딱 자다가 기어 나온 모습이다. 말끔한 데제와 무서울 정도로 부조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혼자 있다 보니까 긴장이 좀 풀린 것 같습니다. 숙소에 돌아가는 대로 정리하고 내일 아침 정시에 다시 출근하도록 하겠습니다.”

올은 순간 긴장했다.

“숙소?”

그렇다. 에라블 버밀리언은 수도에서 데제와 함께 지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예, 수도에 백작가 사택이 있습니다.”

“…거기, 관리 안 된 빈집 아닌가?”

데제가 진정제 성분이 든 담배를 입에 물며 물었다.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는지 에라블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며칠간 지내기에는 괜찮습니다.”

명백하게 오답이었다.

“너무하네. 에라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놀리듯 나른한 어조였지만, 순간 올은 보았다. 검은 촉수 다발이 데제의 피부밑을 긁고 가는 것을….

그가 감시팀과 의견을 같이하게 된 순간이었다.

* * *

에라블은 간만에 들이마시는 따스한 수도의 공기를 양껏 흡입했다.

뼛골을 에이는 혹한의 냉기 대신, 바삭바삭한 햇볕 냄새가 나는 수도의 공기는 달기까지 했다. 물론 공기 정화기 덕분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좋았다.

주름 하나 없이 다린 정복 차림, 내리기 직전에 한 세 번의 샤워와 말끔한 제모. 간만에 사람이 된 듯한 기분도 날아갈 듯 쾌적했다.

와아, 문명이다!

데제와 황자가 함께 있는 문명이다!

“…….”

들뜬 기분이 순식간에 진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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