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는 주인이 필요하다-27화 (27/132)

27.

“저 지금 뇌세포 100cp만큼 죽었습니다.”

“숫자 한 번 구체적이네.”

“예, 100cp입니다.”

카밀은 제게 내민 손바닥에 다시 주먹을 치켜드는 것으로 응수했다.

“또, 또. 환자한테 주먹질하는 것 좀 봐. 인성이 아주….”

“뭐라고?”

“천사 같으시다고요.”

에라블은 주먹 앞에 얌전히 순응했다. 만족한 카밀은 본래의 주제로 돌아갔다.

“그래서 적합자 누구냐니까?”

“아, 없다니까요.”

“아니야, 너 있어.”

카밀이 에라블의 코앞에서 차트를 또 흔들어 보였다.

“없을 수가 없어. 단순히 클리닉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수치야, 이건. 이번 인식표 결과가 진짜 너어무 좋아. 딱 적합자하고 구른 뒤에 이렇다니까.”

쳇, 에라블은 불퉁스러운 얼굴로 투덜댔다.

“나 아는 사람이야?”

“모르는 사람입니다.”

“누구지, 대체. 이 정도면 적합률이 90%도 넘을 것 같은데.”

카밀은 소름이 끼치는 소리를 해대며 차트 스크린을 넘겼다.

석 달에 한 번.

에라블은 인식표를 맞은 후엔 늘 의무실을 찾곤 했다.

물론 그녀뿐만 아니라 인식표를 맞고 있는 다른 몇몇 사람들도 다 카밀이 담당하고 있었다.

“뭐, 누구든 잘 해드려. 한다고 닳는 거 아니니까.”

“중위님 어휘력이 정말 고급스러우시네요. 거, 그만하시고 영양제나 한 대 놓아주십시오. 링겔 새로 입고됐잖습니까.”

“수송 담당은 대체 언제 바뀌니?”

“글쎄요.”

조만간? 속말로 대꾸하곤 에라블은 다른 얘길 꺼냈다.

“저 약 좀 주세요.”

“…벌써 다 썼어?”

“인식표 수습하느라고요.”

왠지 짧게 한숨을 내쉰 카밀이 그녀가 영양제를 맞으며 마저 휴가 계획표를 짜는 동안 약품 상자를 가지고 왔다. 에라블은 상자를 넣어두기 위해 미로를 불러내다가 움찔했다.

“미로, 미…, 미로야?”

애가 반응이 좀 이상하다.

“얘가 왜 이래.”

소환된 미로는 느릿느릿 올라오더니 커다란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렸다.

“너 울어?”

푸른색 대정령이 길게 구슬픈 소리를 냈다.

“저 노이즈 괜찮은 거 맞아요? 애 상태가 이상한데.”

“어디서 한 대 맞은 거 아니야?”

“얜 밖에다 꺼내 놓지도 않는데요.”

아, 그래서 그런가?

“우리 휴가 갈 거야. 바닷가, 좋지?”

“잘도 좋겠다. 매년 똑같은 데 가는데.”

“아, 다르다니까요. 무려 8,760시간의 차이가….”

“됐으니까 누워서 빨리 링겔이나 다 맞아. 나 퇴근 좀 하게. 너 때문에 나까지 퇴근을 못 하잖아.”

“그래서 사람은 잘 가려 사귀어야, 악! 그만 때리라고요!”

“내가 언제 때렸다고 그러니. 얘가 생사람 잡네.”

카밀은 놓친 게 있나 차트를 다시 살피며 말했다.

“노이즈는 확실히 정상이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도 혹시 이상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아. 휴가 언제 간다고?”

에라블은 울먹거리는 미로를 토닥이며 대답했다.

“오늘요.”

* * *

오랜만에 작전복 입은 데제는 반쯤 무너진 담벼락 위에 앉아 콧등까지 끌어 올려놨던 검은 마스크를 내리고 입에 담배를 물었다.

“…….”

개들은 그런 데제의 눈치를 보며 숨죽이고 있었다. 그는 오늘 기분이 영 별로였고, 그 때문에 당장 보고할 용건이 생긴 아리에스는 아주 괴로웠다.

“저, 데제….”

그가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아리에스는 애써 소름을 감췄다.

“2황자의 정찰대가 E17 섹터를 탐색 중입니다. 행성 자원 탐사용입니다만. 내버려 두면 약 10시간 뒤 13황자의 본대와 경로가 부딪힐 예정입니다.”

“…….”

“그렇게 되면 E 섹터를 장악하려는 2황자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큽니다.”

“13황자 본대가 거긴 뭐하러 간 거야?”

“아티팩트가 감지됐다는 보고를 받은 모양입니다.”

“아티팩트는 무슨.”

남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행성신이라도 하나 사냥하지 않는 한 이 시기에 소유주 없는 아티팩트는 전무하다.

“미끼나 던져 줘. 가장 가까이에 누가 있지?”

“지금 에라블 버밀리언이 있습니다.”

“…그래?”

데제는 새 담배를 꺼내 다시 입에 물며 느리게 대꾸했다.

“안타깝네.”

다행히 별 관심은 없으신 듯했다.

아리에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걔도 가만 보면 진짜 재수가 없다니까. 사실 우릴 만난 것부터가 그랬다. 데제의 적합자인 것도 그랬고.

‘…마침표도 하여튼 재수 없게 찍히네.’

주인의 말대로 안타깝긴 하다.

아리에스는 내기의 끝을 예감하며 쯧쯧, 속으로 혀를 차댔다.

* * *

“너 우리 백작령이 군도인 건 알고 있냐?”

투이아 해변은 우주 변방, 그것도 아주 구석진 곳에 있는 작은 행성에 붙어있었다.

나름 한적하고 좋은 곳이다.

“그럼 모를까 봐.”

“아는데 왜 맨날 여기야. 우리 집도 사방 천지가 바단데! 왜 맨날 바닷가로 데려오냐고! 그것도 맨날 똑같은데! 누난 안 지겨워?”

“똑같긴, 야, 안 똑같아. 저기 봐봐, 어? 벤치도 새로 생겼네. 저 쓰레기통도 원래 연녹색이었는데 새로 칠해서 진녹색으로 바뀌었잖아.”

“아, 숨은그림찾기였어?”

답을 찾은 산체는 게임에 참여했다.

“그러고 보니 저기 레스토랑 슬레이트 색깔도 바꿨네. 아! 새로 얹은 게 아니라 그냥 낡은 거구나! 간판 글자도 떨어졌네? 이 동네 최신 트렌드인가 봐!”

“그래! 그런 태도야. 그렇게 좀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것을 찾아보란 말이야.”

“…….”

산체는 다시 폭발했다.

“7년째 똑같은 데 오는데 어떻게 적극적으로 찾아!”

괴성을 지르는 꼴을 보며 에라블은 쯧쯧 혀를 찼다.

“하여간 요새 애들은 인내심이 없어.”

이 정기적인 바캉스는 사실 벌써 수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에라블이 신분증을 발급받고 무국적자 신세에서 벗어났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미친. 아, 몰라, 난 바에나 갈래.”

산체는 호텔 방에 짐을 던져 놓기 무섭게 밖으로 다시 나가버렸다.

하여간 저 답도 없는 AT 종자. 아주 가만히 있는 꼴을 못 본다. 나돌아다니는 게 뭐가 재밌담. 어차피 몇 년 내내 와서 이제 더 볼 것도 없는데.

“아이고-오….”

에라블은 침대에 드러누우며 앓는 소릴 냈다.

“삭신이야. 아이고, 죽겠다, 죽겠어….”

연신 골골대며 침대에 눕기 무섭게 곯아떨어져선 복장이 터진 백작이 끌어낼 때까지 그대로 계속 잠만 잤다.

“아…, 졸려.”

“인간이냐.”

산체르타가 환멸스럽다는 표정으로 쏘아봤지만, 에라블은 늘 그렇듯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래 잠은 잘 수록 느는 거야.”

“적당히 해야지, 진짜 인간이냐.”

“그래 봐야 뭐 얼마나 잤다고.”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진짜 인간이냐.”

“…이 새끼가, 근데.”

에라블이 머리채를 잡기 위해 손을 뻗쳤고 산체는 메뉴판으로 방어했다.

미취학 아동들처럼 싸우기 시작한 남매를 무시한 채, 백작은 느긋하게 패드 스크린을 넘기며 뉴스를 읽었다.

균열, 괴수, 날씨와 황가 소식 등등. 평범한 뉴스거리들뿐이다.

“식사 나왔습니다.”

레스토랑 여급이 웃으며 아는 체를 해왔다.

“올해도 어김없으시네요?”

이 해안 콜로니는 작은 커뮤니티였다. 마주치는 사람 대부분이 다들 건너 건너 아는 사이에, 누구 집 아들, 누구 집 딸인 경우가 많다.

“안 오면 섭섭하죠. 별일 없으시죠?”

에라블도 그녀를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방금까지 남동생의 머리채를 잡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별일은요, 항상 똑같죠.”

“언닌 더 예뻐지셨는데요?”

살살거리는 아부에 그녀가 서비스라며 음료를 갖다주었다. 무료 음료에 빨대를 꽂아 쪽 빨면서, 에라블은 심드렁하게 산체를 쳐다보았다.

“왜, 뭐.”

“아니, 그냥 소름 끼쳐서. 이쯤 되면 다중이 아니냐?”

“다중이는, 니가 사회생활을 알아?”

“사회생활은 무슨, 그냥 내숭이지. 착각도 참 심하셔.”

“…….”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눈만 마주치면 싸워대는 통에 오늘만 벌써 한 12차전쯤 되는 듯했다.

더는 참아주기 힘들었던 백작이 탕-, 나무망치로 가재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응? 왜. 계속해라. 더 싸워.”

“…소, 소금 줄까?”

“어, 응. 그래. 너도 샐러드 먹을래?”

갑자기 사이가 좋아진 남매의 모습에 백작은 쯧쯧 혀를 찼다.

“너희는 어째 나이를 먹어도.”

백작의 한탄에 에라블이 반박했다.

“변하지 않는 게 좋죠. 그거 아주 힘든 일이라고.”

“맞지, 이건 진짜 누나 말이 맞다고.”

갑자기 죽이 맞아 깐족대는 둘을 보며 백작은 나무망치로 가재 대신 두 놈의 머리통을 때려주고 싶어졌다.

* * *

“내일모레부터 축제 시작이에요. 해안가에 노점도 오픈하고요. 해변에서 음악회랑 폭죽도 터트리니까 꼭 한번 들러주세요!”

레스토랑 언니가 계산 영수증과 함께 전단지를 건네주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들이 귀족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단순 사업가라고 수년째 사기를 치고 있다.

알면 서로 불편할 테니까. 지방 가문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건 제도의 귀족들뿐이었다.

행성의 주인이며, 대대로 시그눔의 축복을 받아 최소 수 배의 수명을 가진 귀족은 일반인에겐 완전히 다른 세계의 상위종이였다. 그러니까 착한 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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