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는 주인이 필요하다-26화 (26/132)

26.

가성비를 따지자면 그조차 이보다 나은 조합을 찾아주기 어려울 정도였다. 물론 태반이 금지 약물이라 수명은 좀 갈아 먹겠지만.

데제는 손을 뻗어 다물려 있는 에라블의 입안을 들춰 봤다. 안쪽 살이 다 터져 있었다. 하긴 손수건을 그렇게 악물고 있었으니까.

“…흐, 흐으.”

정작 맞을 땐 아주 잘 참더니, 혼자 있는 지금은 잠결에도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얕은 숨에서도 풀풀 약 냄새가 맡아졌다.

뭔가 기분이 꽤 더러운데, 더럽다는 사실에 더 심사가 꼬이는 중이었다.

“…미로, 괜찮, 습.”

“이미 미로 안이에요.”

“미, 미로….”

쓰레기통으로나 쓰는 이 무력한 대정령에 의지하는 모습이 한편으론 좀 웃겼다.

그는 벌벌 떠는 에라블을 안고 대정령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내부에 생명체만 있으면 무방비하게 실체화되는 것도 모자라 이동 속도까지 굼벵이가 되는 쓸모없는 대정령이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숙소까지는 도착해 있었다.

데제는 처리팀이 갈아놓은 깨끗한 시트에 에라블을 눕혔다.

‘뭐 하자는 건지.’

그는 제 행동에 작게 실소했다.

“미, 미로….”

“그만 찾아.”

“미….”

의식이 오락가락하던 에라블이 제정신을 차린 것은 이틀이 더 지난 뒤였다.

* * *

이튿날 뒤, 새벽.

잠깐 자리를 비우고 샤워를 하고 나오던 그는 문밖에서 작게 칭얼대는 에라블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 아파….”

에라블은 이 와중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 아프다고….”

정신 차리자마자 통화라니 꽤 열렬한 상대인 모양이다. 무엇보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아니, 그냥…, 과로. 응, 열도 나고 목도 아파…. 나 맥주 마시고 싶다. 불룸 아저씨 맥주…, 뭐, 아-, 아파도 마시고 싶을 수 있지….”

에라블은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백작님…, 나 엄마 보고 싶어…. 아빠도….”

데제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삐딱하게 문가에 기대섰다.

“…나 엄마 아빠 보고 싶다. 아저씨도 보고 싶고…. 응, 나? 나…, 휴가, 다음 주….”

뭐야. 어리광도 부릴 줄 아네?

실소하던 그는 목소리가 다시 잠잠해지자, 기대어있던 몸을 떼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조명도 켜지 않은 캄캄한 방에 그녀는 전화기를 손에 꼭 쥔 채 또 잠이 들어 있었다.

“…….”

데제는 에라블의 손에 든 휴대폰을 빼 아무 곳에나 멀찍이 던지고는 옆자리에 길게 늘어져 누웠다.

그리곤 고개를 틀어 물끄러미 잠든 에라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데려다준다는 것도 싫다더니.”

그는 낮은 목소리로 불평을 했다.

“좀 너무하네?”

작게 내쉬는 숨에 뒤섞인 약 냄새. 어두운 방 안. 웅크려 잠결에도 끙끙대는 여자를 그는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손을 뻗어 여자의 뺨을 감싸 보았다.

한 손아귀에 들어오는 작은 얼굴을 손끝으로 쓸고 고인 눈물을 슬그머니 밀어냈다. 여자가 문득 눈을 뜨고 느리게 초점 없는 눈을 껌벅였다. 그러다가 다시 작게 몸을 웅크렸다.

그에게 칭얼대는 일은 없었다.

그런 당연한 걸 굳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 꼴을 만들어 놓은 사람한테 칭얼댈 정도로 에라블 버밀리언은 머리가 꽃밭이지 않다.

“기분이 이상해. 나 왜 이러지?”

잠든 에라블은 당연히 대답이 없었다.

죽은 듯 다시 잠들었던 그녀는 정확히 딱 삼 일째 되는 날, 멀쩡하게 일어나 평소와 똑같이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뭐, 완전히 똑같진 않았다.

“씨X….”

비틀대며 침대에서 내려가 팔오금에 주사를 찾아 넣고 평소보다 몇 분 더 오래 웅크리고 앉아있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염병, 아….”

온갖 욕설을 주워 삼키면서.

그러다가 문가에 기대어 서 있던 그와 눈이 마주치곤 귀신이라도 본 듯 힉-, 새된 소리를 냈다.

“사, 사단장님….”

“네.”

그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에라블은 말문이 막힌 듯 당황한 얼굴을 했다.

“주사를 참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그가 턱짓으로 널브러져 있는 진통제와 안정제를 가리키며 물었다.

“…조,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좋아한다고 하면 무슨 꼴을 당할까 싶은 건지 황급히 대답하는 꼴이 좀 우습다.

“아닌 것 치곤 너무 애용하시는데?”

“길게 아픈 것보단 짧게 끝내는 쪽이 아무래도 더 나, 나아서….”

에라블은 목을 움츠리며 변명했다.

“인생도 짧게 끝내고 싶은가 봐요? 전부 금지약물인데.”

데제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

“저, 제가 뭔가….”

실수했냐고 묻고 싶은 눈치다. 데제가 빤히 쳐다보니 그건 아니다 싶은지 또 곧장 말을 바꾼다.

“혹시 시킬 일이 있으십니까.”

하지만 그 역시 빤한 말이다.

“눈 뜨자마자 참 부지런하네요. 출근 준비해야죠?”

“예, 지금.”

“해요, 그럼.”

에라블은 반사적으로 꾸벅 인사를 하다가 그가 픽 비웃는 소리에 움찔했다.

준비하라더니 그는 막상 기대어 선 문가에서 비켜 주질 않았다.

에라블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그의 옆으로 움직였다. 내리 3일은 안 씻어 다행이었다. 때리려면 일단 손을 대야 하니까.

그래서 에라블은 그가 제 목덜미를 움켜쥐자마자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저 안 씻었는…!”

그가 다시 낮게 비웃었다.

“내가 씻겼어요.”

“예? 사단장님께서요?”

“네. 삼 일 내내 밥도 내가 먹이고.”

아니, 왜…? 무섭게…?

“안 고마운가 보네?”

“고, 고맙습니….”

그가 담배를 다른 손가락 사이에 끼고는, 에라블의 뒷덜미를 쥐고 있는 손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대로 끌려온 에라블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또 비웃기라도 하듯 다정하게 입술이 닿아왔다.

에라블은 살그머니 눈을 떴다가, 그와 시선이 부딪히곤 다시 질끈 감았다.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긴, 인식표도 내가 집어넣었는데.”

파르르 몸이 떨렸다.

내가 진짜 뭘 잘못했나…, 복기가 습관이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못 고치는 게 습관이다.

“잘못한 거 없다고.”

그가 속을 읽기라도 한 듯 낮게 을렀다.

“나한테 집중이나 해요. 안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잠깐 패딩만 할 거예요.”

“예…?”

“여유 시간 얼마 없잖아? 곧 죽어도 7시 10분엔 출근해야 하는 사람인데 안정제까지 먹으면 수명이 더 짧아질 거 아니야. 아, 혹시 그게 목적인가?”

“저, 역시 제가 뭐 잘못한 거….”

“없다니까.”

“…읏….”

순식간에 침대에 눕혀져 발목이 눌렸다.

“…아, 안 하신…!”

에라블은 진저리를 쳤다.

“…-흑!”

곧 치미는 비이성적인 감각에 그녀는 이를 악다물었다.

“입 열어요, 그렇게 악물지 말고.”

그가 한 손으로 에라블의 턱관절을 쥐었다. 관절 이음새가 눌리며 입이 벌어진다.

“자, 살살하고 있어요.”

상체를 숙인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에라블, 느릿느릿 이름을 부르며.

에라블은 의식이 하얗게 비는 감각에 잘게 떨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 * *

“2채널 보고서입니다.”

에라블은 기어이 평소와 똑같은 시간에 출근해서 평소와 똑같은 일과를 시작했다.

보기엔 멀쩡해 보였다. 고문 같던 사흘간도, 이어진 수 개의 금지 약물도, 아침의 일도, 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늘 일하는 건 에라블 뿐이네요.”

그 역시 평소와 똑같이 보였다.

매달 돌아오는 정례 회의, 데제와 개들은 느긋하게 잡담을 떨고 있었다.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남자들을 피해 제자리로 돌아오며 에라블은 작은 알림음에 폰을 확인했다.

‘20만 cp…?’

뭐지. 꿈인가.

“왜, 왜 왜? 뭔데?”

갑자기 사무실 중간에 우뚝 멈춰선 에라블의 모습에 비르고가 궁금해하며 들러붙었다가 김샜단 표정을 지었다.

“아아.”

20만 cp, 통장에 무려 20만 cp가 입금되어 있었다. 에라블의 눈은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난 또 뭔 별일이라고.”

“제 10년 연봉입니다.”

“너 정말 싸구려구나?”

가성비가 좋다고 해줬으면 좋겠다, 이 개새X야. 하지만 난 지금 어떤 개 같은 소릴 들어도 행복해할 수가 있지!

“됐고, 나 커피나 타다 줘.”

“야, 나도.”

이쯤 되면 부관이 아니라 그냥 커피 자판기인 것 같기도 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하지만 에라블은 신나게 한 바퀴를 돌았다.

그러고 나니, 20만 cp+a. 오늘 출근한 지 2시간 만에 어지간한 아파트 보증금이 생긴 것이다.

미쳤다.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 에라블은 설레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꼭 쥐고 화면을 연신 훔쳐보며 휴가 계획을 전면적으로 재편하기 시작했다.

* * *

“넌 왜 매년 같은 데 가면서 매번 휴가 계획을 다시 짜니?”

“안 같습니다. 작년의 여름과 올해의 여름에는 무려 8,760시간의 차이가….”

“적합자랑은 좀 어때?”

에라블의 허튼소리를 무시하며, 카밀은 차트를 흔들어 댔다. 얼굴에 놀리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저 신약 테스트 중이라니까요.”

“제약회사 이름 대봐.”

“피스티스요.”

“거긴 맥주 회사잖아.”

“아주 모르는 게 없네. 술 좀 끊, 악!”

에라블은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