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밀어붙여 체력을 빼지 않고, 녹진하게 몸을 풀어주는 움직임이었다.
혈관에 고여 굳어있던 안정제 성분이 녹아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흐으….”
눈 앞은 뿌옇게 흐려졌다.
낮은 그의 호흡이 목 뒤를 간질인다. 근육이 단단하게 도드라진 남자의 팔에 어깨 위는 가로막혀 있었다.
에라블은 질끈 눈을 감고 고개를 틀었다. 그가 돌아간 고개를 제 쪽으로 쥐고 입을 맞췄다.
“흑-….”
에라블은 그의 손아귀에 턱이 잡힌 채 잇새로 간신히 호흡했다.
그가 숨을 몰아쉬는 에라블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땀에 젖은 머리칼도 부드럽게 쓸어 넘겨졌다.
다정했지만 내려다보는 시선이 약간 번들거렸다. 꼭 뭔가를 참는 것처럼….
“…….”
데제는 침대맡에 두었던 담배를 찾아 또 입에 물고는 말했다.
“자지 말아요. 뭘 했다고.”
한차례 열기가 빠진 뒤, 그는 몸을 빼고 침대 밖으로 빠져나갔고 눈만 껌벅대던 에라블도 붙들려 같이 침대에서 일어나야 했다.
“평일이라고 봐줬잖습니까. 빨리 일어나요, 머리는 말리고 자야지.”
그는 뭉그적대는 에라블을 떠밀어 기어이 소파에 앉혔다.
어차피 내일 아침에 다시 말려야 할 텐데….
그가 냉장고에 남아있던 시원한 맥주 한 캔도 손에 쥐여주었다. 면티도 한 장 입혀주었고, TV도 틀어주었다.
멍하니 좋아하는 TV 쇼를 보는 동안, 데제는 가볍게 집 안을 돌아다니며 사 온 물건들을 혼자 정리했다.
에라블은 아직도 몸속에 남은 듯한 감각을 견디느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벌건 얼굴로 벌컥벌컥 맥주만 들이켰고, 데제는 사정을 모르는 척 눈꼬리만 접어 웃었다.
혼자 물건을 다 정리하고 태연하게 드라이기를 가져와 머리까지 말려주었다.
이 정도로 다른 건 역시 경험치의 차이인가, 아니면 신체 레벨의 차이인가.
그야 그와 자신을 비교하자면 거의 대자연과 민달팽이 수준의 차이니까 그럴 수 있다.
“무슨 생각 해요?”
“민달팽이와 대자연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사고가 느렸다.
“응?”
멍한 에라블의 대답에 데제는 좀 웃었다.
그는 직접 머리칼을 다 말려주고는 제 허벅지를 베고 눕게 했다.
정말이지 다정한 남자였다. 취미가 정말 나쁘다. 이러니 다들 착각하지. 몰랐으면 진짜 나도 깜박 속고 한 방에 요단강을 건넜을 거다.
30일, 그녀에게 다시 걸린 내기 날짜였다.
벌써 두 번째다.
아리에스는 30일, 다른 개들 역시 고만고만하게 걸었을 것이다. 에라블은 남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 그는 며칠에 돈을 걸었을까 잠시 궁금해했다.
* * *
“…인식표 말입니까.”
다시 며칠 뒤 오후, 데제는 집무실 책상에 걸터앉은 채 자신을 찾아온 에라블 버밀리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에라블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어깨에 기대 흐트러지던 갈색 머리칼이 고갯짓에 흔들린다. 오늘 아침 저 곱슬기 있는 가는 머리칼을 드라이로 말려준 건 그였다. 그는 최근 그것에 재미를 붙였다.
“예, 오늘이 갱신일입니다.”
에라블은 마치 밀린 월세 얘기를 하듯 말했다.
“…….”
물론 그는 에라블 버밀리언에게 별다르게 굴 생각은 없었다.
인식표를 빼줄 생각도 없고, 그들 사이가 전과 달라졌다는 생각도 딱히 없었다. 에라블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갱신일.
여느 날처럼, 그녀는 직접 수건과 손수건을 챙겨 그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엎드리세요.”
갱신이 오늘인 건 그도 알고 있었다. 말을 꺼내면 에라블이 어떤 반응일까 궁금해하기도 했다.
미적거릴까, 아니면 농담이냐고 되묻기라도 할까. 만약 그랬다면 에라블은 오늘 좀 험한 취급을 당했을 것이다.
이런 처지에 있는 그의 적합자가 에라블 하나는 아니었다. 한동안 잘 지내던 적합자들은 위와 비슷하게 굴어왔었고, 다들 비슷한 결말을 맞이했다.
두 달이면 상대와 사이좋게 지낸 최장기간이다.
과민 반응을 일으키는 개들과 달리 데제는 이것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이전 상대들이 지나치게 낙천적이었지.
그들이 에라블의 반만큼만 처신했다면 그와 좀 더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에라블은 늘 그랬듯 제 손으로 책상에 수건을 깐 후 입에 손수건을 물고 가만히 엎드렸다.
희게 드러난 목덜미가 가늘게 떨리고 있다. 두려움을 아주 완벽히 숨기지는 못한다. 이어질 고통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 놓은 물건이었다.
데제는 가는 목덜미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에라블은 경직된 몸을 풀려 애쓰며 호흡을 눌렀다.
그는 인식표 케이스를 꺼냈다. 은색 금속제 케이스 안에, 미세한 나노 칩이 든 주사기가 놓여있다.
그중 하나를 꺼낸 뒤 싸한 알콜솜으로 흰 뒷목을 문질렀다. 에탄올 냄새가 싸하게 번진다.
엎드린 에라블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가는 뼈가 도드라진 손등에 희게 핏기가 가셨다.
“야, 약은 싫습니다!”
두 달 전, 약은 안 된다며 매달리던 에라블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약은! 아, 안 됩니…! 제, 제발…!”
그 모습을 떠올리며 그는 주사제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긴 바늘이 에라블의 목덜미에 깊숙이 찔러 들어간다. 핏방울이 맺혔다가 목덜미를 따라 떨어졌다.
에라블은 소리도 없이 고통을 견뎠다.
움켜쥔 주먹에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핏물이 손톱 사이로 스몄다. 몸은 덜덜 떨리고 무릎을 꿇은 두 다리는 뭔가를 자꾸 밀어냈다.
20여 분.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느리게 흘렀다.
“방에 데려다줄게요.”
꼼짝도 못 하는 여자에게 말했다. 그냥 집에서 할 걸 그랬나. 하지만 이런 일을 끌어다 놓고 싶진 않았다. 좀 사적인 공간이니까.
에라블은 가끔 집에선 긴장을 풀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데제는 묘한 기분이 들곤 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어서 더욱.
가끔 그를 옆에 두고 졸거나, TV라도 틀어놓고 웃고 있는 모습은 정말 기분 묘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데제는 딱히 무슨 유감이 있어서 이 인식표를 놓는 게 아니었다.
“…미…, 미로…를….”
입안이 잘못된 건지 발음이 불분명하다.
“에라블, 데려다줄게요.”
손수건을 잘못 물고 있었나. 좀 봐야겠다 싶어 살짝 에라블의 어깨를 당겼지만, 그녀는 온몸에 힘을 주고 버티려고 들었다. 그 힘이 너무 약해서, 오히려 좀 놀랄 정도였다.
“에라블.”
데제는 달래듯 여자를 불렀다.
“…미, 미로…를…, 괘, 괜찮…습….”
끊어질 듯 목소리가 가늘게 이어졌다. 엎드려 책상에 처박은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데려다준다니까.”
그의 말에도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여자는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괘, 괜찮습…, 미, 미로….”
“…….”
“미로…, 괜찮습….”
“에라블.”
“미로….”
뭐, 본인이 그렇게 원하신다는데.
“그래요.”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에라블의 시그눔이 열었다. 희끄무레한 대정령은 곧 여자를 삼켰고, 여자가 사라진 깨끗한 책상엔 희미한 온기만 옅게 남아 있었다.
“…….”
늘 그렇듯 책상 위엔 침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았다.
데제는 손끝으로 느리게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 * *
아파, 에라블은 몸을 웅크렸다. 아프다….
몸이 덜덜 떨리고, 잇새로 고인 핏물이 샜다. 손톱이 들려 올라간 손으로 그녀는 머리를 감쌌다.
귀에선 이명이 미친 듯이 울린다. 그 사이사이에 미로가 우는 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흡, 흡.”
그저 호흡에만 집중했다. 중간중간 컥컥 끊겼지만, 계속 들이마셨다. 다 쉬어버린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괘, 괜찮습…, 미로….”
몸을 더욱 작게 옹송그리고, 쌕쌕, 숨을 들이마셨다. 뒷머리가 갈려져 나간 것 같았다.
“괜찮…, 미로를….”
연습했던 말을 끝없이 되풀이하며 더 작게, 작게 몸을 옹송그렸다.
“미, 미로….”
대정령 내부 낡은 캠핑카 안.
“흡, 흡-.”
에라블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주사제를 팔오금에 찔러 넣은 뒤, 네발로 기어 낡은 캠핑카 침대로 올라가 더 작게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수면제가 강하게 돌며 의식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 만에야 간신히 잠든 그녀를 그가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
집무실에서 에라블을 보내고 두어 시간쯤 뒤, 그는 제멋대로 대정령 내부를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왜.”
그는 어이가 없어 눈을 굴렸다.
내가 대체 여길 왜 와있지.
비 계약자를 삼킨 미로는 겁에 질려 괴로워했지만, 그는 대정령엔 별 관심이 없었다.
“…….”
작은 캠핑카 침대에 파묻혀 있는 에라블은 평소보다 더 작아 보였다.
침대 주변엔 몇 개나 되는 주삿바늘이 흩어져 있었고, 마구잡이로 찔러 넣었는지 여기저기 핏방울이 튀어 있었다.
강력한 수면제와 진통제, 당장 통증을 완화 시키고 신체 재생을 가속화 시켜 줄 효율적인 조합의 주사제들이 웅크리고 있는 그녀의 곁에 널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