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그래서 나 없는 동안 뭐 하고 지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고작 4일 만에 할 얘기는 아닌 듯싶었지만, 뭐, 별것 없었다.
일하고, 퇴근하고, 카밀과 치킨에 맥주 한두 잔으로 끼니를 때운 뒤 최애 배우들의 신작 소식이 없나 포럼을 뒤지는 평범한 4일이었다.
“설마 또 아무거나 먹고, 제임스랑 보낸 건 아니겠지.”
“제임스는 요새 신작이 안 나와서….”
에라블은 웃는 데제를 마주 보며 같이 애써 미소 지었다.
“나 하나론 부족해?”
“미인은 다다익선이랬습니다.”
“…….”
데제는 얼굴을 감싸 쥐고 잠시 어깨를 떨었다. 갑자기 슬픈 생각이 떠오르셨나 보다. 상인 연합 주가라도 떨어졌나.
“많이 먹어요. 오늘 밤엔 잠도 못 잘 텐데.”
“…….”
이번엔 내가 울 차례인가 싶었다. 하여간 그는 늘 그렇듯 다정했다.
만약 원작을 안 봤더라면, 아니, 지난 2년간 겪은 일이 없었더라면, 혹은 오늘 그가 만든 도살장을 못 봤더라면.
그랬더라면 속고 한 방에 죽을 순 있었을 텐데. 그럼 인생이 훨씬 편했을…, 아, 보조 슬롯이 많지. 게다가 적합자고.
역시 내가 상황이 더 안 좋다.
“디저트 시켜 줄까요?”
“예, 그럼 저는 케이크로.”
“그래요, 많이 먹어요.”
그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야근을 빼느라 점심을 건너뛴 에라블은 사양하지 않았다.
“다 먹고 산책이나 할까요? 이 주변 예쁜데.”
그건 사양하고 싶었다. 당연히 생각뿐이었다. 결국 밥 먹자마자 산책로를 걷게 됐다. 물론 대기 없이 실드만 쳐진 산책로의 우주적 풍경은 신비로웠지만….
“힘든 표정이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체력이 부족해서.”
그런 의미에서 이만 앉아서 쉬고 싶었다.
“움직여야 체력이 늘죠.”
그랬다간 숨 쉴 체력도 안 남을 거로 생각했지만, 역시 이번에도 생각뿐이었다. 그의 의견에 반대할 용기가 없다. 대신 새로운 제안을 시도해 보았다.
“마트에 간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산책은 마트에서 하시는 것도.”
“어떻게든 덜 걸어보겠다고 머리 굴리지 말아요.”
시도는 좋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산책로를 다 걸은 뒤에야, 인근에 있는 민간 콜로니의 마트로 갈 수 있었다.
어차피 마트에서 걸을 거 산책은 왜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주변 풍경도 이쪽이 훨씬 신비로웠다.
“피스티스 맥주 행사 중인데 어떠십니까? 두 병을 사면 한 병이 더 생깁니다.”
2+1, 이 얼마나 신비로운가! 어마어마한 우주적 신비를 마주한 에라블은 눈이 돌아갔다.
“에라블, 양만 많으면 그만이란 생각은 버려요.”
“피스티스는 행사 이벤트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안 해도 돼요. 나 부자예요.”
알고 있다. 그는 이 성단 제국에서 한 손가락에 꼽히는 부자다. 하지만 난 아니니까 이 할인 행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정 사고 싶으면 사고.”
데제의 허락에 신이 난 에라블은 직원을 불러 행사 맥주를 두 짝이나 샀다.
두 짝을 사니 세 짝이 되는 마법에 황홀해하는 그녀에게 데제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어떻게 들고 가게?”
“미로에 넣으면 됩니다.”
“아, 그 쓰레기통.”
쓰레기 적재율은 2%도 안 되는데….
“제가 다 치웠습니다.”
“쓰레기통 치우면 뭐가 되는데요?”
“쓰레기통이 됩니다.”
“잘 아네.”
변명하고 싶었지만, 미로에 쓰레기를 던져 넣은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할 말이 궁색했다.
“고기나 좀 사죠.”
그는 마트를 돌며 스테이크용 고기 몇 덩이와 깍지콩, 과일, 샐러드용 채소에 요리용 레드 와인까지 한 병 구매했다. 전부 다 조리해야 하는 귀찮…, 아니 신선 식품이었다.
그가 쓰레기통에 식료품 넣는 것을 거부하는 바람에, 그들은 그걸 다 두 손으로 들고 안타레스 호에 탑승해야 했다.
밥 한 끼 먹는데 사단장급 함선이 움직이는 그와의 저녁은 소시민의 간에 치명적인 부담이었다. 함선에 대기 중이던 개들의 반짝이는 시선도 매우 부담스럽다.
뭐야, 저 눈망울들은…, 진짜 소름 끼친다.
이동형 아티팩트가 내장된 함선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동네 마트 다녀오는 것보다 더 빨리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냉장고에 다 안 들어갈 것 같….”
싱크대 위에 사 온 물건들을 내려놓고 정리를 좀 하려는데, 데제의 입술이 닿아왔다. 느슨한 입맞춤이었다. 미끈한 턱을 떨어트리며 이내 그가 가볍게 입술을 물어왔다.
에라블은 꼿꼿하게 선 채 작게 입을 벌리고 느릿하게 넣어오는 그의 입맞춤을 받아냈다.
“둘이 쓰기엔 냉장고가 작긴 해요?”
그가 두 손으로 에라블의 골반을 감싸 쥐고 지긋이 몸을 붙이며 말했다. 그러다 아예 두 팔로 그녀의 허리와 엉덩이 밑을 받쳐 안아 들었다.
입술엔 두어 번 더 가볍게 입맞춤이 닿아 왔다. 안정제로 불안정하게 눌러놓았던 몸이 녹아내리듯 풀어졌다.
“정리해야….”
“응.”
대답과 달리 그는 에라블을 안고 욕실로 들어와 욕조 난간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바지 뒷주머니에서 은색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한 대만 피울게요.”
그는 케이스를 열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완 성분이 섞인 흔한 기호품이었다. 폭력적인 성향을 자주 보이는 AT 타입들에겐 꽤나 일반적인 생필품이었는데, 그도 자주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집 안에서 피우는 모습은 처음이다.
“요새 내가 너무 흥분해서.”
의문스러운 시선을 읽었는지, 그가 힐긋 시선을 맞추며 야살스럽게 웃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이었다. 맞으면 멍드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그는 잠시 물고 있던 담배를 선반에 그대로 올려두었다.
“자, 팔 들어봐요.”
에라블은 시키는 대로 재빨리 팔을 들었다. 그가 티셔츠를 벗겨내며 조금 웃었다.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가 드러난 살갗에 입을 맞췄다.
“물이 또 이러네. 온수기를 교체해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곤 손을 뻗어 오락가락하는 물 온도를 맞추며 말했다. 욕조에 물이 채워지는 동안, 에라블은 남은 옷이 다 벗겨졌다. 어쩔 수 없는 공포에 비 맞은 개처럼 덜덜 몸이 떨렸다.
“오늘 나잇나잇 쇼하는 날 맞죠? 이따 볼까요, 한잔하면서?”
“내일 출근….”
“보다 자요.”
안 재운다는 거 농담이었어요, 그가 에라블을 일으켜 제 허벅지 위에 다시 앉히며 또 말했다.
“진짜 믿은 건 아니죠? 나도 피곤해요. 내 체력은 끝도 없는 줄 아나 봐.”
샤워볼에 거품을 낸 그가 몸을 문질러주며 투덜댔다.
그의 와이셔츠도 에라블의 몸에 묻은 거품에 젖어갔다.
에라블은 그에게 기댄 채 그저 숨만 쌕쌕 몰아쉬었다.
그가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빈손을 뻗어 담배를 다시 쥐었다.
그새 욕조에 물이 채워졌다.
“잠깐 들어가 있어요.”
에라블은 따끈한 온수에 몸을 녹이며 무릎을 모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가 젖은 옷을 벗어 세면대에 걸쳐 놓았다. 에라블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어색함에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에라블, 뒷목까지 빨개진 거 압니까. 정말 귀엽게 구네.”
웃음기 어린 말투에 에라블은 더욱 작게 몸을 움츠렸다. 또 숫자를 세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진짜 그 짓을 또 하기 전 물이 턱까지 차올랐다.
에라블은 제 몸 양옆에 놓이는 늘씬한 긴 정강이를 훔쳐보았다.
“이리 와요.”
나긋나긋한 그의 목소리는 역효과였다.
하지만 지난 2년여간 공포에 잘 교육된 몸은 그가 말하기 무섭게 움직여 그의 가슴에 착 달라붙었다.
그가 낮은 소리로 또 웃어댔다.
그러면서 에라블의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밀어 넣고 그녀가 제게 완전히 엎드리게 했다.
데제는 느긋하게 연약한 몸을 쓰다듬었다. 그는 오늘 아주 느긋하게 굴기로 한 모양이었다.
“창고 정리는 다 끝나갑니까?”
“이, 이틀 정도면… 다, 흐….”
“하여간 빠르네요.”
그가 느릿느릿 입을 맞춰왔다.
에라블은 그저 그의 몸 위에 엎어진 채 모든 감각을 견뎌야만 했다.
감각은 에라블의 뭉쳐있던 근육이 다 풀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반쯤 정신이 나가 축 처졌을 때쯤, 거의 건져지듯 다시 그에게 들어 올려졌다.
‘…정말, 취미가.’
나쁘다. 그는 정말 취미가 나빴다.
더없이 다정하게…, 그가 진심이라고 믿고 싶게 만든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데, 그는 가볍게도 안아 옮기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침대에 내려놓은 뒤, 이어 몸속으로 치미는 감각에 에라블은 뒷덜미까지 섬찟해졌다.
“…흐으윽!”
그녀는 침대 시트를 움켜쥔 채 몸을 뒤틀었다.
“아흐, 흑-!”
욕실에서 이미 온몸이 다 예민해진 터라 그의 느릿한 움직임에도 하얗게 머리가 비었다.
“괜찮으니까, 긴장 풀어요.”
달래는 말도 느긋하고 다정했다.
에라블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