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는 주인이 필요하다-23화 (23/132)

23.

“처리팀을 좀 늘려야 되나.”

“데제, 그 말씀만 벌써 반년 쨉니다.”

안타깝게도 고막은 멀쩡한 남자가 그들의 대화에 눈이 돌아갔다. 에라블은 약간 동질감이 들었다. 한때 그녀는 남자와 비슷한 처지였다.

한 발자국만 삐끗했어도 똑같은 과정을 거쳐, 심문실에서 냉동고로, 다시 사후 처리 후 소각로로 처박혔을 거다.

지금 처지도 뭐 크게 다르진 않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내가 더 나쁘다. 나는 보조 슬롯이 열 개나 되니까. 소각로 대신 모듈이 되었겠지.

비릿한 피 냄새에 에라블은 콧등을 문지르며 랩탑을 재부팅 시키고, 오전에 들어온 자료 파일을 열었다.

대형 트레이너 두 개 분만큼 일이 쌓여 있었다. 죄다 밀수품인 데다가 심지어 아직 산적 항에 적재 중이다.

이걸 오늘 내로 다 확인하고 수송 계획을 짜야 한다. 솔직히 이쪽이야말로 인원 보강이 시급했다.

이 사단은 AT 계열은 넘치는 데 보조 지원 계열 면허 소지자가 전멸 수준이었다. 목숨 걸고 등신짓 하는 데 공권력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직장이 인기가 있을 리가 없다.

인생 막장이나 취업을 희망하곤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처럼.

‘…야근이네.’

에라블은 보자마자 견적을 파악했다.

야근입니다, 네, 오늘은 야근이네요. 숙연한 마음으로 일단 장부부터 정리하기 위해 2번 랩탑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우연히 데제와 눈이 마주쳤다.

“소각 준비하고 일단 대충 쑤셔 넣어. 그리고 정확히 어떤 새끼가 긁어대는지…, 조회해 봐.”

에라블은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뱀 앞에 선 개구리 같은, 뭐, 요즘 습관적으로 느끼는 기분이긴 했지만. 그가 눈을 돌리질 않는다.

왜…, 나 뭐 잘못 한 게 있나. 에라블은 또 습관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복기해 봤다.

“뻔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같은 새끼일 겁니다. 징징거리다 안 되니까 생츄어리에….”

줄줄이 이어지는 아리에스의 불평에 다시 그가 눈을 돌리자, 에라블은 그제야 한숨을 삼키며 서랍에서 안정제를 한 알 꺼내 입에 넣었다.

그와 관계를 하는 동안에는 먹지 않았지만, 그가 외근 나가 있던 4일간은 관계가 없었고 업무량은 많았기 때문에 노이즈가 끼는 기미를 느끼자마자 바로 다시 안정제를 먹기 시작했다.

괜히 방치해뒀다가 다운돼서 클리닉으로 실려 가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일이 밀린다.

에라블은 안정제를 목 뒤로 넘긴 뒤 랩탑의 장부를 열었다.

몇 개의 보안 프로그램을 거치기 때문에 상당히 무겁고 느렸다. 장부가 열리길 기다리며, 그녀는 차근히 서류를 살폈다.

이번에 들어온 보급품은 수량보다도 종류가 더 문제였다. 12EA 연필 한 다스부터 소포장 된 항정신성 마약까지, 종류가 쓸데없이 다양했다. 재수 없으면 내일도 야근이다.

어차피 수송이 시작되면 미로의 가동 시간이 길어져 노이즈가 레드존을 찍을 텐데, 서류 작업부터 이렇게 발목이 잡혀선 곤란했다.

‘어떻게든 오늘 내로 처리를 해야….’

에라블은 가까이 다가온 인기척을 느끼곤 조심히 고개를 들어 보았다.

데제가 느긋하게 생수병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전등을 등지고 선 그의 그림자가 머리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 똑같았다. 조금 전 건장한 남자 하나를 고깃덩이로 만든 직후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평소와 똑같았다.

“안정제, 너무 자주 먹는 것 같은데.”

에라블은 그가 내려놓은 생수병을 가만히 손에 쥐며,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허용량 내에서 조절하고 있습니다.”

그가 검은 슬랙스 바짓단과 흰 셔츠 곳곳에 피가 튀어 있는 채로 에라블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뭐 하고 있었어요?”

그리곤 몸을 기울여 에라블의 랩탑 모니터 화면을 살폈다.

“품목 선별?”

“예, 보급품이 새로 산적되어서 분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관심을 보이신다.

“많아요?”

“트레이너 두 개 분입니다. 정리해서 보고서 올리겠습니다. 내용물 중 몇 가지 금지 품목이 있는데, 용역자 몇 명이 외부인이라 혹시 모를 위험 요소가….”

마침 잘됐다 싶어, 간략히 업무 보고를 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왠지 데제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어딘가 즐거운 듯한 미소였다.

“에라블.”

“예.”

그가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자, 솜털이 주뼛 서는 기분이었다. 남자의 섹시한 중저음이 꼬리뼈 부근을 핥는 듯했다. 진짜…, 목소리까지 야할 필요가 있었을까.

“오늘 저녁 괜찮은 식당 알아봤는데, 외식 어때요?”

“예, 알겠습니다.”

에라블은 반사적으로 즉답했다가 아차 했다.

‘오늘 야근인데….’

얼굴에서 낭패한 기색을 읽고 그가 더욱더 즐거운 듯 눈빛을 흐린다. 슬쩍 가까이 몸을 기울이며 웃음기 묻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야근은 미뤄요. 오늘은 나랑 좀 놀아줘.”

나른하게 웃는 얼굴이 소름 끼친다. 여기저기 피가 튄 모습으로도 섹시해 보이다니…, 무섭다.

“데제, 심문실 준비됐습니다.”

이따 보자는 말을 남기고 일하러 가는 그의 늘씬한 뒷모습을 보다가, 에라블은 제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아리에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리에스가 손가락을 치켜들더니 3과 0을 차례로 만들어 보였다.

30일.

‘…….’

또 내기했나 보다. 진짜 돈이 썩어 넘치는 개새X들이다. 이번에 내깃돈 받으면 예금 계좌나 하나 더 개설해야겠다.

요새 윌로우 뱅크 이율이 그렇게 괜찮다던데. 이러다 아주 부자 되겠어. 내가 계속 살아 있다면 말이지.

에라블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할 일로 돌아갔다.

* * *

사람 목숨을 두고 내기나 하는 살인마들의 끔찍한 취미 생활이야 어쨌든 그녀가 상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거긴 천재지변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일에 신경 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처리팀이 유혈 낭자한 부관실을 치우는 동안, 오전 업무를 끝낸 에라블은 창고로 넘어갔다.

“내일 트레이너 두 대가 새로 들어 올 예정입니다.”

“내일 말이십니까….”

“예. 미리 자리를 확보해 둬야 합니다. 미확보 시 야근입니다. 바쁘다고 정리 정돈 미흡해도 야근입니다.”

소대원들의 표정이 또 썩었다. 에라블은 또 동료 직원들에게 격려를 보낼 필요성을 느꼈다.

“꼼꼼히 차분하게 제시간에 비워두고 정시에 퇴근합시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잘하면 될지도 모릅니다!”

“진짜 왜 맨날 똑같은 소리세요!”

격려에 기뻐하는 소대원들과 함께 에라블은 열심히 움직였다. 퇴근 전에 최대한 일을 치워두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6시 정각.

그녀는 데제에게 붙들려 그대로 행성 궤도를 넘었다.

“…….”

맹세코, 에라블은 그가 말했던 괜찮은 식당이 이 행성계 밖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밥 한번 먹는데 무슨….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에도 의심을 품고 있는 지구인으로선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잘 지냈어요?”

레스토랑은 중성미자 베리어에 들어가는 비용으로 인해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이 책정되어 있었다.

가진 적금을 다 깨도 물 한잔 사 마실 수 없는 곳이다.

데제는 비상식적인 금액의 메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문했다. 그런 그가 메뉴판 가격보다 더 비상식적으로 느껴졌다. 정확하겐 그의 미모가….

‘…빛이.’

노을 같은 베리어의 붉은빛이 석고 같은 그의 피부에 붉게 드리워져 있었다.

위로 떨어지는 검은 머리칼, 검은 눈동자… 악의라곤 한 점도 없이 투명해 보이는 눈동자였다. 가볍게 걸려있는 미소 또한 그의 인상을 환하게 만든다.

전체적으로 그는 친해지고 싶은 인상의 미인이었다.

이를테면 상급자 중에 그냥 어려운 사람이 있고, 일을 시켜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친해지고 싶은 아주 희귀한 타입의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명백히 후자였다.

어디로 봐도 불과 몇 시간 전 사람 하나를 출혈 과다로 죽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 도살장은 다 꿈인 듯, 그는 그저 완벽하게 아름다운 남자로만 보였다. 역시 메뉴판 가격보다 더 비상식적이다.

“예, 잘 지냈습니다.”

어쨌든 고작 4일 만에 나누기엔 조금 어색한 대화였다.

“세탁물은 잘 맡겼고?”

역시 끔찍하게 비싼 레스토랑에서 섬뜩하게 아름다운 남자와 단둘이 마주 보고 앉아 나눌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았지만, 세탁물은 중요한 문제였다.

“예, 다 챙겨서 맡겼습니다. 의류는 내일, 대형 세탁물은 내일모레 중으로 다시 가져다주시기로 했습니다.”

“잘했어요. 아, 오늘 돌아가는 길에 마트 들러서 장이나 봐 갈까요? 냉장고 또 비었죠?”

“예.”

진짜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에라블은 우주 생물의 고기 조각을 꼭꼭 씹으며 잠시 의문을 가졌다.

그와 거의 한집에서 사는 중인 터라 화제는 끊이지 않았다.

세탁물부터 빈 냉장고, 욕실 수압, 가습기와 꺼져가는 소파 쿠션 등등 온갖 사소한 문제가 화제로 떠올랐다.

덕분에 조금 굳어있던 에라블은 점차 긴장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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