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41사단은 보고되어 있지 않은 수백 개의 팀을 운용 중이었다.
정확하게 402개.
그녀는 주당 92개, 하루 평균 19개 팀의 비품 청구서를 처리했다.
그렇게 되면 한 시간에 청구서 6~7개는 처리를 해야 하는데, 속도가 빨라져서 보통 2시간 이내에 다 마치곤 했다. 만약 아닌 날이면 점심은 물 건너 가버린다.
일이 순탄히 끝난 점심엔 개들의 심부름을 하고, 오후엔 창고로 이동을 했다.
부소대장에게 오전에 받아 정리한 보급품 보고서를 받고, 품목별로 정리한 비품 청구서에 맞춰 소대원들에게 보급품 분류와 포장을 지시한다.
소대원들이 포장하는 동안 에라블은 부소대장에게 받은 보고서와 전날 전송한 발주서를 비교 확인하고 부족분 추가 발주서를 작성, 담당자에게 전송한다.
그쯤이면 보급품 포장 작업이 끝나 있다.
그러면 지역 네트워크 체크 후 이상이 없으면 미로를 이용해 각 팀에 보급 전송, 이상이 있으면 상부에 보고한다.
이게 평소 일정이었다.
여기에 분기별로 한 번씩 창고의 실물 재고를 파악, 장부와 대조 확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밀리면 바로 야근, 꼬이면 철야다. 추가 업무가 발생해도 바로 야근, 철야였다.
에라블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바빴다.
수송형 정령 면허 소지자는 정말 드물었기 때문에, 그녀는 2년 전 황궁 정원에서 본인이 주장했던 대로 몹시 유용했다.
그리고 일이 많은 만큼 컨디션 유지를 위해 가감 없이 온갖 종류의 약물을 사용하고 있었고, 약간의 중독 증세를 보이었으며, 건강 관리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제국 의학에 기대 살고 있었다.
제국 의학을 무슨 미라클 파워, 금지 약물을 무슨 자양강장제쯤 되는 양 수시로 남용했다. 진짜 자양강장제도 그 정도 먹으면 죽을 것 같은데.
거기에 또 자극적인 저품질 인스턴트식품을 굉장히 좋아했고, 저녁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을 삶의 낙으로 여기고 있었다. 물론 진정한 삶의 낙은 역시 제임스였지만.
‘…다 버려버릴까.’
데제는 살짝 갈등했다.
에라블이 숨겨둔 DVD 박스엔 70여 회의 한정판이 빼곡했다.
그 정도면 출시 예정일 정보를 다 꿰고 있다는 뜻이겠지. 잘생긴 배우만 좋아하는 걸 보면 외모 취향이 특이하진 않은데.
“나랑 자면서 눈이 돌아간단 말이야?”
정말 너무하네.
데제는 거울을 보며 한탄을 했다. 나와 지내면서 서운하게 다른 남자나 쳐다보고 있고.
에라블이 먼저 출근한 빈집.
그는 샤워하고 지독히 아름다운 13레벨짜리 제 껍데기를 쳐다보며 습관적으로 양치질을 했다.
욕실 선반은 아주 깔끔했다. 처음엔 단순히 정리 정돈 잘 돼 있는 깨끗한 집인 줄 알았지.
두어 달쯤 지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그냥 정리할 물건이 없는 것뿐이란 사실을.
에라블 버밀리언은 청소하기 싫어 집안에 물건을 들이지 않았다.
싹 모아서 한 번에 폐기할 수 있는 일회용품 애용자였다.
심지어 재직 중 추가 계약한 소형 정령 하나를 아예 쓰레기통으로 사용 중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어찌나 기가 막히던지. 맥주 캔 들고 화장실로 들어갈 땐 뭐 어쩌려나 싶었는데.
화장실에서 정령을 불러선 몽땅 먹여버렸다. 수송형 면허 소지자들은 다들 그러고 사는 모양이지. 뭐, 옆에 있어 봤어야 알지.
“내가 속았어.”
데제는 한탄을 하며, 헹군 핑크색 칫솔을 에라블의 회색 칫솔 옆에 꽂아 놓았다. 집안이 온통 무채색인 이유도 한가지였다. 때가 덜 타서.
에라블 버밀리언은 예외 없이 일거리를 간략화시키는 쪽으로 움직였다.
본인은 합리적이라고 믿는 듯했지만, 그가 볼 땐 그냥 게을렀다.
과중한 업무를 소화해 내는 것과는 별개로 에라블은 천생 자체가 약간 게을렀다. 개인 생활에선 빨리, 대충이 아주 몸에 배어 있었다.
그는 같이 살면서 에라블에 대해 이런저런 것들을 알게 되었고, 알면 알수록 그녀가 살짝 이상한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었다.
데제는 욕실을 나오며 역시 DVD를 다 버려야겠다고 결정했다. 아니면 죄다 유작으로 만들어 버리던지.
둘 다 괜찮을 것 같았다.
* * *
“세탁물 오후쯤에 수거해 갈 거예요. 소위 것도 같이 맡겨요.”
“난 4일쯤 걸릴 겁니다.”
데제는 절대 좋은 남자가 아니고, 골수까지 폭력성에 절여있는 남자였지만, 부정할 수 없이 편한 부분이 있었다.
그는 집안일에 능숙했다.
성향 자체가 깔끔했고, 일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 일엔 사소한 집안일까지 전부 다 포함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였다.
평소 일회용품과 인스턴트식품을 선호하는 에라블보다 생활 식습관도 훨씬 건강했고, 또 여의치 않을 땐 전문가도 잘 불러들였다.
“침대 시트, 이불, 쿠션, 기타 의류 12종. 맞으십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에라블은 요즘 떨떠름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예, 맞습니다.”
“대형 세탁물은 이틀 정도 걸릴 겁니다. 나머지는 내일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보통 시체나 작전 후 구역을 정리하는 처리팀에게 세탁물을 맡기며 에라블은 약간 생각이 많아졌다. 최근엔 항상 많았는데, 오늘은 특히 더했다.
4일 뒤 돌아오겠다던 남자는 이번엔 자기가 말한 날짜에 정확히, 온몸에 소독약 냄새를 풍기며 돌아왔다. 수술대 위에서나 맡아 볼 법한 싸늘한 에탄올 냄새였다.
곧장 심문실이 떠올랐다.
만약 그가 외부에서 보낸 4일간의 일정 중 심문실이 없었다면, 지금 확실히 추가되었다.
“끄윽…, 끄으윽-…!”
부관실 바닥에 쓰러진 남자가 경련을 일으키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도살장에서나 날 듯한 짐승 멱 따는 소리가 사람의 목에서도 난다는 사실을 에라블은 지난 2년간 그의 부관 일을 하며 아주 잘 알게 되었다.
부관실 한쪽은 완전히 도살장이었다.
바닥과 벽, 심지어 천장에까지…, 피 냄새에, 밟힐 때마다 약간 질척거리는 소리에, 짐승 멱 따는 소리까지 더해져 진짜 부관실이 아니라 도살장 같았다.
데제브 아브가니스가 본관 건물에 근무하는 인원을 전부 다 외우고 있었다는 게 저 남자의 불행이었다. 여기서 외운다는 것은 사소한 습관 전부를 말한다.
걸을 때 체중 싣는 방식, 호흡의 깊이, 복식 호흡인지 가슴 호흡이지. 말할 때 억양은 제국식인지 뒷골목 깡패 식인지. 데제는 그 모든 것을 다 외우고 있었다.
TF나 인식 장애, 혹은 다른 어떤 물리적인 방법으로도 이런 사소한 습관 전부를 카피할 수는 없다.
데제의 기억력은 천성적인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요행을 바라기도 어려웠다.
거기에 조금만 의심스러워도 바로 확인부터 들어가기 때문에 피할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
그에게 요원을 보낸 것은 도살장에 돼지를 보낸 것과 다름없는 결과로, 남자는 지금 사지가 끝장나고 있었다.
남은 몸뚱이로 벌레처럼 움틀 바닥을 기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나마도 데제가 발로 등허리를 밟고 있어 제자리였다.
왜 하필 부관실에서 이러나 싶었지만, 특별히 재수가 없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외근 다녀온 데제는 사복 차림 그대로 부관실에 있는 에라블에게 잡담을 걸러 왔고, 그리고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비품 청구서를 들고 있었다.
에라블은 남자와 진짜 가레드 하사와의 차이점을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데제에게는 완전히 낯선 얼굴인 듯했다.
“하사는 B동 창고에서 발견됐습니다. 상부 관절 경직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로 보아, 사망 시간은 1시간 이내로 추측됩니다.”
남자가 가레드 하사를 죽이고 시신을 이틀 전 정리를 끝낸 B 창고에 숨겨 놓았다는 보고였다. 창고 정리를 다시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직 42년인데 벌써 탈락이면 21점이네요. 다음번에 얜 강등시켜야겠습니다. 심문실 열까요?”
“어, 열어.”
21점은 뭐고 강등은 또 뭔지. 이상한 대화를 하며, 데제가 군용 나이프로 이리저리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제대로 처리됐는지 그는 나이프를 털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시그눔 레벨이 높다는 건 대체로 신체 레벨도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보조나 지원 계열이 아니면 보통 그렇다. 특히 AT 타입의 경우 거의 완전히 일치했다.
군용 나이프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콘크리트 바닥에 사뿐히 꽂혔다. 머리 옆면에 꽂힌 나이프에 남자가 벌벌 떨었다.
아직 잘릴 부위가 많이 남았기 때문에 남자의 공포가 충분히 이해됐다.
저 남자 역시 똑같은 살인자지만, 공포에 질린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약간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그 얼굴에 제 얼굴이 겹쳐 보여서였다.
“일단 심문실로 이송하고 의료팀 불러서 지혈시켜.”
“처리팀도 부르겠습니다.”
“어, 여기부터 대충 치우라고 해. 이거 슬롯도 몇 개 없는데. 냉동고엔 빈자리 없지?”
남자는 이미 죽은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었다.
“예, 없습니다. 지금도 다 겹쳐 놔서, 안쪽에 몇 구는 터졌을걸요.”